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고자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수호기사 파멜, 비룡기사와 고렘 마스터 다수, 거대하기 짝이 없는 공성 병기 수십개······ 내가 본 것만 이정도다.’
도시 몇 개는 가볍게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전력들.
웬만한 대도시도 며칠이면 박살낼 규모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국은 외부와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들어 움직인 일이 있다면.
‘심연 미궁, 그리고 사흉 토벌을 위해 데르시안 가문이 움직였지.’
허드슨은 턱을 쓸었다.
플레이어 톡을 통해 플레이어들의 동향을 그는 항상 확인하고 있었다.
덕분에 데르시안 가문이 사흉 토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빠르게 접했다.
‘내전이 아니라면, 이건 사흉 토벌을 위한 준비라고 봐야겠군.’
갑자기 다르칸 영주가 사흉 토벌을?
데르시안 가문이 실패한 일을, 자신들이 성공시키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게다가 모든 게 너무 급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허드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그대들도 함께가지.”
··· 다르칸 영주.
그가 수호기사 파멜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허드슨은 내심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다르칸 영주. 우리는 이곳에서 ‘그분’을 기다릴 거라고 말했을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야.”
“······ 그럼?”
“우리를 따라가면 만나게 될거다. 자, 함께가지. 가서, 그대들이 본 다르칸의 위용을 ‘그분’께 전해주면 진심으로 고맙겠군!”
다르칸 영주를 처음봤을 때, 그는 점잖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은 광기가 가득했다.
소독을 진행한 이후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당연히 사흉을 사냥하러지!”
“사흉을? 왜?”
“‘사흉’은 구제국을 몰락시킨 원흉들 아닌가! 다시금 구제국의 영광을 우리의 손으로 완성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제국의 신민들이 갖춰야할 대의이니!”
진짜로 미쳐버린 건가?
‘저건 단순한 광기가 아니다.’
갑자기 미친 게 아니다.
저건 공포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다.
사신교가 제국의 수많은 귀족을 거리낌없이 쳐내는 것을 보았기에.
제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재차 확인시키려는 몸부림이었다.
‘제국은 사신교를 통한 공포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있다.’
허드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할.
설마 다르칸 영주가 이렇게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
허나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저놈은 자신들을 억지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으니까.
······ 일단은 얌전히 따라줄 수밖에.
*
지이잉!
지이이잉!
워프를 통해, 끊임없이 병사들이 흘러나온다.
모두 제국식의 장비를 착용한 병사들.
“비, 비룡기사!”
“저건 고렘 마스터 아니야?”
“제국이 사흉 사냥을 작심한 건가?”
그들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곳은 용병도시 카르텔.
다섯 중립도시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그라시아는, 한 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순백의 기사?”
저건 분명히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아닌가.
빌헬름의 최측근이었던 그녀. 하지만 대원정 끝에서 죽었다고 알려졌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라시아는 내심 의아했다.
잘못보았을 리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가 맞았다.
비록 빌헬름의 최측근이라 하기엔 실력이 부족했지만, 빌헬름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여자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은가.
워낙에 많은 통수를 당한 끝에 빌헬름은 자신의 주변에 오직 믿을 수 있는 자들만을 두었다.
그 숫자가 워낙 적어서 한때는 ‘원탁의 7기사들’라고도 불렸으니.
허나, 그들 모두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알려졌다.
‘순백의 기사가 어째서 제국과 함께 하고 있는 거냐?’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가 왜 제국과 함께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절대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조합이 함께 있다.
대체 왜?
게다가 저만한 전력.
제국에서 초월자 몇 명을 데려왔던 데르시안 가문보다 훨씬 본격적이다.
정말로 사흉을 죽이려고 모여든 것이다.
“뭐, 뭐야, 왜 우리를 미는 거야?”
“저 새끼들 설마 우리를 방패막이로 쓰려고?”
“중립도시에서 인간끼린 전투금지가 룰 아니었어?”
문제는 저 제국놈들은 중립도시의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을 사흉이 넘어올 워프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흉이 등장할 때 방패막이로 쓰려는 것처럼.
본래 중립도시에선 인간들끼리의 전투를 금지한다.
모든 도시들이 합의한 결과다.
이는 제국이라도 지켜야만 했다.
다만, ‘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라시아님. 한 마디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저 새끼들 심보가 너무 뻔한데요?”
사람들이 그라시아를 중심으로 항변하자, 그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대로 진행하지.”
제국보다 먼저 자신이 죽인다.
그러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까.
왜 순백의 기사가 저쪽에 있는 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 사흉은 내 사냥감이다.’
쩌적!
쩌어어어억!
그 순간, 붉게 팽창한 워프 사이로 거대한 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흉신, 바알이 카르텔을 침략해옵니다!》
《히든 퀘스트가 도달합니다.》
《‘흉신 바알’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는 것을 막으십시오.》
《기여도에 따라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
-와, 대박이네. 카르텔에 거의 만 명 가까이 모였다
-심지어 제국 다르칸 영지가 전력투구로 참가함
-비룡기사랑 고렘 마스터? 둘다 초월자만 가능한 거 아님?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거 질 수가 없겠는데?
플레이어 톡은 다시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국, 다르칸 영지의 참전!
제국 전체는 비밀에 싸여있지만 그중 다르칸은 그나마 이름이 알려져있는 곳이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문검가로.
그곳에서 배출된 기사는 대륙의 모든 기사들보다 수준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했으니.
-수호기사 파멜? 저 사람 혼자서 ‘고룡’도 잡는 괴물임
-뭐? 혼자 고룡을 잡아?
-구라치고있네 그럼 최소 3성이라는건데
-예전에 우연히 ‘고룡’ 토벌하는 거 봤음 진짜임 ㅇㅇ
-그런데 확실히 데르시안인가 뭔가랑은 비교가 안 되긴 하다
-게다가 그라시아도 있잖아
-그라시아가 아무리 ‘심연 미궁’에서 런쳤다고 해도 그래도 다른 영웅들보단 격이 다른 인물이지
-아, 드디어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진짜로 사흉 지구로 오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만하면 솔직히 마왕도 사냥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그땐 제국이 없었으니까
-쌉가능
-지린다 진짜
모두가 안심했다.
저만한 전력이라면 지는 게 이상할 정도다.
아무리 사흉이 강력하다고 해도 고작해야 한 마리 아닌가.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한줄의 글귀가 떠올랐다.
《‘흉신 바알’이 중립도시 카르텔을 함락시켰습니다!》
《‘카르텔’이 심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가능한 일이야?
-그 많던 병력이 또 전멸했다고?
-그라시아는? 파멜인가 뭔가 고룡도 잡던 놈이라며?
-미쳐버리겠네.....
*
모든 워프가 터졌다.
그러자, 도시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봐. 정신차려라.”
쫘악!
누군가가 있는 힘껏 뺨을 때린다.
그라시아는 눈을 떴다.
‘······ 아름답군.’
그라시아의 앞에, 천사가 있었다.
순백의 천사, 세렝게티.
그녀를 보는 그라시아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뺨을 때린 여자도 생전 처음이었거니와.
“그라시아. 이대로 심연에 먹힐 셈이냐? 네놈,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더니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아름답구나.”
“······?”
“너 같은 천사가 있다면, 천국도 나쁘지 않겠군.”
“네놈은 지은 죄가 많아서 죽으면 지옥 확정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그럼 지옥에 왜 천사가 있지?”
“······!!!”
그라시아가 손을 뻗자, 허드슨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심연에 가라앉으며 정신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
‘여긴 지옥이 맞을지도.’
허드슨은 주변을 둘러보곤, 침음을 삼켰다.
“죽어!”
“죽어버려!”
“키히히히히!”
바알은 오직 도시를 심연에 가라앉히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카르텔이 심연에 가라앉자 정신이 나간 자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료였던 자가 등을 찌르고, 멀쩡해보이던 자가 갑자기 검을 들이민다.
아비규환의 지옥.
아무래도 이 심연의 특성인 것 같았다.
‘이전 도시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모두 이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제국놈들은 우리들 따윈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아.’
다르칸 영주는 오직 바알 퇴치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그라시아를 억지로 찾아온 건데, 이놈도 정신을 놔버린 것 같았다.
외부의 조력을 바랄 수 없는 상황.
빠져나갈 방법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저 고치. 저게 바알이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고 있는 거다.’
허드슨은 고개를 돌려 심연의 중심부를 바라봤다.
그곳에, 정말 거대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의 고치가 놓여있었다.
카르텔을 함락시킨 뒤 바알이 스스로 저 고치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 고치만 부수면 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캬아아아아!
검은 날개.
마치 마족과도 닮은 괴물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자들, 특히 초월한 자들은 모두 마족이 된다.
더욱 강력해진 채로 달려들기에 도저히 답이 없었다.
심지어 면역이라도 되는 듯이 웬만한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다.
그 위용 넘치던 비룡기사가 겨우 마족 하나를 상대할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젠장할!’
당연히 초월자조차 아닌 허드슨으로선, 마족이 공격해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욕지기가 절로 나오지만 방법이 없었다.
쩌어어어억!
그때였다.
허드슨의 앞으로, 심연이 찢기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
그를 본 허드슨이 경악하며 외쳤다.
동시에.
콰직!
그는 ‘골통파괴자’를 휘두르며 단번에 마족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렸다.
빌헬름과 제국의 관계
황금 가면이 황궁의 은밀한 곳에 새겨진 벽화를 바라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벽화. 모두 제국의 긴 역사다.
그중 하나.
구제국을 공격하는 사흉의 흉물스러운 그림.
‘사흉 바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
염소의 머리, 짐승의 몸통과 날개를 지닌 ‘바알’이다.
그리고 바알은 여러 이명을 가진 괴수였다.
가장 추악한 존재, 끌어당기는 자, 피를 마시는 짐승 등등.
다른 사흉보다도 이명이 많았던 이유.
바알 자체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저주와 생명, 의식을 다루며, 끊임없이 진화하니까.
“사흉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고 있느냐?”
“아, 아······.”
황금 가면이 묻자 옆에서 따르던 토끼 탈을 쓴 시녀가 몸을 경직시켰다.
두려움 가득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진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을 다스리는 열 한 명의 존재들.
그중 가장 두려운 자가 바로 황금 가면을 쓴 이자였으므로.
“죄, 죄송합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 죄송할 것 없다. 사흉은 ‘멸망’이 만든 애완동물이다. 그리고 구제국은, 그런 괴물들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려고 했었다.”
“저, 저는 사흉이 구제국을 공격했다고 배웠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것은, 숨겨진 비사(祕史)다.
창피하여 지워버린 이야기 말이다.
네 마리의 강력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
구제국은 그 네 마리의 괴물을 자신들이 다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구제국에서 가장 강성하던 네 개의 가문. 그들은 각자 한 마리씩 사흉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구제국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다.”
“분명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고······.”
“너는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궁금한 건 여전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구나.”
“죄, 죄송합니다!”
황금 가면이 피식 웃었다.
“아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데리고 다니는 게지. 어쨌거나, 너무나도 강력한 무기가 생기자 그들은 욕심이 생긴 게다. 네 가문 모두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내분이 일어났나 보군요?”
“그래. 사흉을 사용한 전쟁이 일어났다. 어쩌면 그게 처음부터 ‘멸망’의 의도였는지도 모르지.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황금 가면은 작게 혀를 찼다.
구제국은 대륙 전체를 압도할 만큼 강성했으나 몰락했다.
사흉을 이용한 내분. 그 외의 여러 이유들 때문에.
“그, 그래도 결국 구제국의 후예들이 사흉을 봉인했다고 배웠습니다.”
“그것도 제국의 입맛에 맞게 변형한 이야기다.”
황금 가면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흉이 봉인되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을 봉인한 자들은 구제국의 후예가 아니다.
그저 제국을 부활시키고자 변형시킨 이야기들 중 하나일뿐.
“그럼 누가······?”
“천계.”
“여신이 사는 곳이요?”
“아니, 천계는 ‘천상인’이 사는 곳이다. 선계(仙界)라고도 부르지. 그곳의 선인들을 ‘천상인’이라고 부른다더군.”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시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덧 대화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사흉을 봉인할 정도로 엄청난 존재들인가보네요? 그럼 멸망을 같이 막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들은 여신의 편이 아니다. 멸망의 편도 아니고. 멸망과 여신, 그 사이의 중립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숫자도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그들이 그 정도로 엄청났다면 왜 사흉을 봉인만 했을까.
확실한 건 현 제국의 황제 역시 ‘천계’에서 왔다는 것이다.
초대 황제가 천계에서 가져온 11개의 알.
그것들을 ‘정통’이라 불렀으니.
오직 ‘황제’만이 천계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황제는 아득히 오랜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