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죽지는 않을 거다.’
사신에게 젊음을 빼앗긴 뒤 그라시아는 빠르게 노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사흉 바알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으니까.
‘사흉 바알은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 놈을 죽이면 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사흉은 강력하다.
네 개의 도시가 단 하루도 안 되어 함락될 정도로.
그러나 그라시아가 자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것까지는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그라시아가 품에서 ‘병’하나를 꺼내, 병의 마개를 열고 ‘푸른 서광’에 부었다.
그러자 푸른 서광이 녹빛에 물들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체를 즉사시키는 독. 아무리 사흉이라 할지라도 이 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순 없다.’
이 독은 그라시아도 우연히, 그리고 힘겹게 구한 독이다.
생명을 지닌 이상 닿으면 무조건 죽이는 독.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이었으니까.
《푸른 서광이 ‘우로보로스의 독’을 완전하게 흡수했습니다.》
*
사신의 만찬회.
모든 정통이 만찬을 위해 모이는 장.
그리고 정통들 사이에서 ‘첫 만찬회’가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신력이 없는 사신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으니.’
열두 번째 정통이 그간 한 번도 식사하지 못했으리라고 여기는 원인은 간단했다.
사신력이 없는 정통은 사신을 소환하지 못하고, 사신을 소환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신으로 잡아들인 죄인의 ‘불꽃’만이 정통의 진정한 식사가 될 수 있으므로.
하여, 모든 정통은 처음 겪는 만찬회에서 ‘만식’에 도전한 뒤 사신력을 갖춘다.
그게 규칙이고 규율이다.
하지만, 첫 만찬회에서 만식에 성공한 정통은 여태껏 없었다.
열한 명의 정통 모두.
‘하물며 이번 죄인의 불은 다른 때보다 두 배는 더 크다.’
잡아들인 죄인의 격에 따라 불꽃은 크기를 키운다.
평균적인 불의 크기는 웬만한 성인 남성만 하였다.
지금은 무려 그 두 배.
그라시아의 젊음, 다수의 하이랭커를 잡아들인 것이 불의 크기를 키우는 데 크게 일조한 것이다.
‘평균적으로 정통의 첫 식사는 40% 정도.’
오랫동안 허기진 정통은 첫 만찬회에서 상당한 양의 불을 먹어치운다.
평균 40% 안팎.
한꺼번에 많은 양을 흡수한 정통은 날개를 추가로 얻고, 사신력이 생기며 사신을 소환할 수 있게 된다.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다만, 궁금할 뿐.
‘오랜 시간 존재하지 않았던 열두 번째 정통. 그리고 흰색의 날개라.’
모든 정통은 알의 상태로 사신교에 귀속되어있었다.
자격을 지닌 자들만이 ‘알’을 깰 수 있고, 후견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교단 바깥에서 정통이나 정통의 알이 발견된 사례는 여태껏 없었다.
저 흰색 날개 역시도 이질적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잡종’인 줄 알았다.
그래도 정통은 정통.
배척하기보단, 확인하는 게 먼저다.
저 정통과 자신들의 정통이 뭐가 다른지.
-캬캬캬컄!
머지않아 검은 염소의 정통이 죄인의 불을 보곤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식사’를 알아본 것이리라.
오래된 허기를 억누를 순 없을 터.
후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보고, 반응했다면, 먹어치우는 게 당연한 일.
‘그래봤자 대략 10% 정도 먹어치우고 말겠지.’
물론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흰색이 섞인 잡종.
다른 정통들이 묘하게 따르는 모습도.
결국 ‘구경거리’가 아니겠나.
정통들 역시 신기하기에 어울려주는 것이다.
짐승 우리에 갇힌 짐승을 바라보듯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건 황금가면뿐만이 아니었다.
‘반반이니까 5%?’
‘흰색은 쉽게 물드는 색이다. 정통에겐 독과 같지.’
‘어딜 잡종 따위가.’
‘신기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일 거다.’
다른 정통의 후견자들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종, 혹은 잡종.
무언가 섞여 있다면 순혈(純血)이 아니다.
순혈의 정통도 아닌 놈이 만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소로울 수밖에.
이윽고, 열두 번째 정통이 입을 열었다.
“······!!!”
“······ 뭣?!”
가소로움에 코웃음을 치던 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어진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으므로.
거대한 죄인의 불이 휘청이며,
······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설마?”
“먹어··· 치웠다고?”
“만식······!”
죄인의 불이 증발할 리는 없었다.
갑자기 사라졌다면, 그것은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만식!
만찬에 준비된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는 행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포식을 해낸 것이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단순한 잡종이 아니었나?”
“우리의 정통을 넘어서는 정통이라는 거냐?”
“검은 염소··· 자신 넘치던 이유가 있었군.”
“게다가 저 정도로 먹어치웠으면 ‘급성장’할 거다.”
“으음, 첫식사부터 만식이라면 엄청난 사신을 소환할 수도.”
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만식’했다면 어느 정도의 성장을 보일지 귀추가 궁금할 따름.
첫 식사에서 평소보다 두 배는 큰 만찬을 만식했다. 얼마나 성장하며 어느 정도의 사신력이 생길지 예상도 가지 않는 탓이다.
정통마다 소환하는 사신 역시도 특성에 차이가 있었으니.
모두의 시선이, 헬에게로 모였다.
-캬······ 캬?
갸우뚱.
순간 헬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먹은 ‘식사’로 성장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걸까?
이내 웃음소리마저 멈춘 헬은 재차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카악, 퉤!
······ 뱉어냈다.
그것을 보며, 후견자들이 비웃었다.
“욕심을 부렸나 보군.”
“푸하하! 그러게 적당히 먹었어야지!”
그러면 그렇지.
만식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욕심을 부려서 토해낸 것 분명했다.
-퉤퉤퉤퉤!
하지만 그런 이유도 아니라는 게 곧 밝혀졌다.
입에 남은 잔재마저 털어내듯 헬은 연신 토악질을 해댔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 맛이 없어서.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맛이 없는 음식을 먹을 때나 보이는 행동이었다.
잠시간의 정적.
그 가운데 황금가면이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규칙은 규칙, 첫 식사는 실패했으니 다음 차례로 넘어가지.”
만식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실패했다.
먹은 걸 토해냈으니 더이상 기회는 없다.
검은 염소는 아쉽겠지만 제알아서 식사를 찾는 노력을 해볼 수밖에.
“기껏 기회를 주었건만 줘도 못 먹을 줄이야. 쯧쯧.”
황금 사자.
그가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커커커!
그라시아의 젊음을 강탈한, 머리에 뿔이 나고 몸집이 우람한 사신.
녀석이 다시 뱉어진 죄인의 불 가까이 다가갔다.
“먹어치워라. 이번에야말로 만식하여 더 강한 정통이 되는 거다!”
황금 사자가 외치자, 뿔난 정통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커커!
“뭐 하는 거냐? 어서 먹어치우래도?”
-커커!
명백한 거부의 의사.
이는 다른 정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예 낫으로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돌린 정통도 있었다.
그 행동은 마치.
“······ 지금 먹고 뱉어서 더럽다는 거냐?”
“이런 미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만찬을 눈앞에 두고, 모든 정통이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이미 한 번 먹고 뱉어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 이런 상황은 또 처음 겪는군.”
황금가면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만찬회가 열린 이래로 단 한 번도 없던 집단 식사 거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 저 검은염소의 정통 때문이다.
‘먹고 뱉다니···.’
못 먹겠으면 처음부터 먹질 말던가, 뭐 저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
‘먹고 뱉기 논란’은 한참을 이어졌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러워서 안 먹겠다는데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먹일 수도 없고.
“······ 이 ‘죄인의 불’은 검은 염소, 그대가 처리하도록.”
결국 황금가면은 처치곤란해진 죄인의 불을 내게 넘겼다.
다른 후견자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먹이지도 못할 것을 갖고 있어봤자 귀찮기만 하다.
이어 황금가면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허나 다음 만찬회까지 제대로된 ‘만찬’을 준비하지 못하면 그대는 후견자의 자리를 박탈당한다. 정통을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것 역시 후견자의 의무이니.”
박탈.
적어도 사신교에 발을 붙일 수는 없게 된다는 말이다.
불을 먹고, 헬을 성장시킨 뒤 직접 사냥을 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황금가면이 다른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이대로 만찬을 진행하긴 어려울 것 같군. 그럼 다음으로 ‘소독’을 진행할 도시에 대해 투표해보도록 하지.”
짝!
황금가면이 한차례 박수를 쳤다.
그러자 천장이 열리며, ‘구슬’이 내려왔다.
‘염원구슬? 생긴건 비슷한데 훨씬 크군.’
이무기가 용이 되기 전에 입에 물고 있는 염원구슬과 닮았다.
하지만 염원구슬보다 그 크기가 족히 백배는 컸다.
“보이거라.”
동시에.
노란 구슬의 위로 글자와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접속자 수 : 220,779」
······ 뭐냐, 저건.
동시접속자 수?
설마 현재 접속해있는 ‘플레이어’를 뜻하는 건가?
사신교가 플레이어의 정확한 숫자를 알고 있다고?
“22만! 아직도 우리가 단죄해야할 죄인이 이렇게나 많다. 모조리 엄벌하기 전까지, 저 숫자가 0이 될 때까지 우리의 ‘소독’은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황금가면의 말에 다른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여도 줄여도 줄질 않는군.”
“벌레같은 놈들······.”
순수한 악의가 느껴졌다.
왜 이렇게 제국은, 사신교는 플레이어를 혐오하는 건지.
“어느 곳이 좋겠나? 특별히 검은 염소, 그대의 의견부터 들어보겠다.”
황금 가면이 입가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희번떡거리는 눈.
그것은 광기에 사로잡힌 자의 눈이었다.
그 상태로 지금 내게 묻고 있는 것이다.
어느 도시에 플레이어가 많겠느냐고. 어딜 부숴야 하겠냐고!
‘제정신이 아니로군.’
미쳐있었다.
나를 제외한,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때였다.
“어서 골라보거라. 정통의 후견자라면 그대 역시도 ‘신병’을 앓았던 자일 터. 그렇다면 초월한 순간 보았을 것이다. 죄인놈들이 그대를, 우리의 세계를 농락하던 모습을!”
*
······ 일련의 소란이 지나간 뒤.
사신의 만찬회가 마무리되고, 황금 가면은 나와의 약속을 이행했다.
별 의심 없이 내가 고른 ‘세 개의 보물’을 건네준 것이다.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없었으며, 그중에는.
‘바알 갑옷!’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바알 세트 중 유일하게 부재했던, ‘바알 갑옷’을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은 것이다.
‘더이상은 돌아가지 않겠다.’
먼 길을 돌아왔다.
처음 수련자의 산에서 검선일기를 얻고, 제국으로 흘러들어와 황실, 사신교에까지 닿고서야 마침내 취할 수 있었다.
허나, 바알 세트를 완성한만큼 더이상 돌아갈 길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건 직진뿐이다.
나는 빠르게 불길하기 짝이 없는 바알 갑옷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즉시 착용하자.
《’바알 세트‘가 완성되었습니다!》
《’검선일기‘ 최후의 장이 생성되었습니다.》
《히든 피스, 검선일기 최후의 장에 의해 ’바알 세트‘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불길한 바알‘의 모습이 ’황금빛 바알의 상‘으로 진화합니다.》
《모든 바알의 장비가 ’궁극 신화‘에서 ’초월 신화‘ 등급으로 격상합니다.》
《히든 옵션 ’초월한 바알‘이 등장했습니다!》
박살
“여,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겁니까?”
발테.
수련자의 산에서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한 그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허드슨에게 물었다.
경매가 끝난 직후 란돌프는 돌연히 황금 가면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란돌프가 돌아올 때까지 둘은 계속해서 다르칸 영지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
“자신을 가져라.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시며 허드슨이 말했다.
제국 귀족들 저리가라 할 품위.
“그런 모습으로 말씀하셔봤자······.”
발테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문제는 허드슨의 몸과 얼굴이, 성별조차도 아예 다르다는 것이었다.
듬직하던 허드슨은 온데간데없고 웬 호리호리한 여자가 눈앞에서 허드슨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이, 이러다가 저희도 쥐도 새도 모르게 암습당하는 거 아닙니까?”
발테는 여전히 겁이 많았다.
란돌프가 직접 ‘버서커 세트’를 하사 했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잘 때도 절대로 벗지 않고서 항시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란돌프님이나 허드슨님처럼 되기는 글렀어.’
발테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둘 다 제국에서 보여준 위풍당당한 모습은, 남자가 봐도 반할 수준이었다.
특히 란돌프의 그 위엄은 두 눈으로 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없는 남자.
그게 란돌프였다.
“쯧쯧.”
그런 발테의 행동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찬 허드슨이, 창밖을 바라봤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워! 워!”
이곳은 영주성.
바깥에선 수많은 기사와 병사가 분주하게 무언가를 옮기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을.
“오늘은 보급품을 옮기고 있군.”
“예.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
사신교의 소독이 끝나자마자, 다르칸 영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자를 조달하고 있다.
정말 전쟁이라도 준비하려고 저러는 걸까?
‘마치 충성심을 보이려는 듯이, 절박해 보인다.’
도시에서 소독이 진행됐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