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113화 (113/317)

*

“사, 살려주세요. 제발.”

앞에 바짝 조아린 데르시안 영애를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피폐하기 그지없는 모습.

하루가 다르게 퀭해지는 얼굴.

‘소독’에 겁을 먹고 결국 나에게까지 닿았으리라.

언제 죽일지 모르는 공포감이 그녀를 무릎 꿇린 게다.

‘자신이 죄인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있다.’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당당하게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공포로 다가온 것인지.

아니면 찔리는 게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는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 살려달라?”

생각을 정리한 뒤, 무겁게 읊조리자 데르시안 영애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턱을 쓸었다.

그녀는 ‘죄인’의 목록에 처음부터 없었다.

허나 그 사실을 데르시안 영애는 모를 테니.

굳이 알려줄 필요 또한 없으리라.

‘데르시안 영애는 나를 사신교의 관계자로 여기고 있다. 그것도 1번과 같은 권한을 지닌 간부로서.’

틀린 것은 아니다.

1번 역시도 나를 그와 같은 ‘황금빛 정통의 후견자’라 칭했으니.

나는 영애의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상체를 숙인 채, 그녀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어 두 눈을 정면에서 마주하자 데르시안 영애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진심으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든지?”

“사, 살려만 주신다면······.”

살려만 주면 그게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이 제멋대로 착각한 것이지만, 이 오해를 더 키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너는 네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고 있나?”

“제, 제가······ ‘의심자’의 목록에 올라서 아닙니까······?”

“왜 그 목록에 올랐는지, 알고 있나?”

“그건······.”

모른다.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백 명의 ‘경매 참가자’들은 모두 ‘죄인 의심 대상’의 목록에 올라있는 자들이다.

모두 죄인으로 추정되는 이유가 있다.

데르시안 영애 역시 마찬가지일 터.

“너는 정말 이자벨라인가?”

“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나는 질문을 바꿨다.

“너는 ‘언제부터’ 이자벨라였지?”

“그거야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거짓이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이자벨라’라고 여기고 있다.

나는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짜임을 인지하고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쯤 사막도시 파이살메르에서 여왕의 자리를 계승 중일 이자벨라가 가짜라는 건가?

‘그 기억만은 진짜다.’

그럴 리가.

이자벨라는 사막에서 기억이 지워진 채로 깨어났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오직 자신의 풀네임 뿐.

허나 그 이름이 거짓될 리 없었다.

내가 키운 캐릭터지만 닉네임이 아니라 ‘진명(眞名)’ 자체가 이미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이었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생성할 때 짓는 이름은 닉네임이다. 일종의 별명 같은 것.

하여, 캐릭터가 가진 ‘진명’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 사막에 있을 그녀가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임은 확실하다.

“몇 살 때부터 기억하지?”

“··· 첫 기억은 3살 때부터입니다.”

“그때도 ‘데르시안 가’에 있었나?”

“트, 틀림 없습니다.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묻는 말에만 답해라. 쌍둥이거나, ‘이자벨라’가 둘은 아니었겠지?”

“예······. 아!”

무언가 기억난 듯 데르시안 영애의 눈이 커졌다.

“저, 저와 닮은 아이를 보았던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때문입니까?”

“계속 말해보도록.”

“‘신병(神病)’에 걸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쌍둥이는 아니지만 저와 묘하게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어서 기억이 납니다. 하,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신병(神病)?

신의 병. 그런 이름이 붙은 병이 있던가?

“신의 병이라.”

“그게······ 저도 가문의 어르신들이 언급하여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만 납니다. 그게 무슨 병인지는 잘······.”

살짝 떠보자, 모른다는 반응이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무래도 이자벨라와 저 ‘신의 병’이라는 게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묘하게 닮긴 했군.’

눈앞의 이자벨라와 사막의 이자벨라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커가면서 달라졌겠지만, 어렸을 땐 쌍둥이처럼 닮았을 수도 있을 듯싶다.

“제, 제가 아닐 겁니다. 분명히 그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죄인입니다!”

데르시안 영애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내 물음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나저나.

‘가문의 어른들은 알고 있다. 만약 그 신병에 걸린 아이가 사막의 이자벨라라면, 데르시안 가문 자체가 그녀를 버린 것일 수도 있겠군.’

더 자세히 알아봐야할 문제지만 과연 자신의 근원을 찾는 게 사막의 이자벨라, 그녀에게 구원일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살려주마.”

“아아············!”

“허나, 조건이 있다.”

“무, 무엇입니까?”

“가문으로 돌아가 ‘신병’에 걸린 아이에 대해 ‘조용히’ 조사하도록. 이후 아르카나에서 허드슨을 통해 나를 찾아와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참작해주마. 허나 내가 주문한 것 외에 쓸데없는 언행을 한다면 다시 ‘소독’의 대상에 올릴 것이다.”

“네,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데르시안 영애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표정과 함께.

하지만 두 눈은 의지로 불탔다.

자신과 그 ‘신병’ 걸린 아이가 착각되어 이곳에 오게되었다고 철썩같이 믿는 모양새였다.

그 오해가, 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웠다.

그래서 말했다.

“또, 내가 알아야할 게 있느냐?”

알아서 불어보라고.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이내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 데르시안은 모든 사흉을 사로잡아 ‘전쟁무기’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델피안에서 한 번 실패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바알을 잡으면 남은 사흉도 모두 깨울 수 있다고······.”

계속되는 이야기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허.’

자신이 살기 위해, 가문을 팔았다.

······ 아주 훌륭한 자세다.

*

‘소독’과 ‘경매’가 모두 끝난 뒤.

남아있는 참가자는 75명이었다. 참가자 25명과 그들을 보좌한 자들 모두가 사신교에 의해 납치, 살해된 것이다.

‘운도 좋은 놈이로군.’

53번, 마스터는 용케 이 덫을 빠져나갔다.

둘째날 이후로도 테스트는 계속 되었지만 전부 피해간 것이었다.

운도 좋지만 눈치도 기가 막힌 셈.

“여기가 사신교의 본단이다.”

······ 그리고 소독이 끝난 이후 나는 1번을 따라, 사신교의 본단까지 단번에 도착하게 되었다.

몇 개의 워프를 넘어서자 그 즉시 거대하고 호화로운 궁전이 나타난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영토는 분명히.

‘황실.’

분명히, 제국 황실의 것이었다.

내가 판게니아를 플레이하며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말이다.

흉신(凶神)

빠드득.

지구에서, 마스터는 이를 갈았다.

제국에서 살아 나왔으나 도저히 굴욕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놈들이 나를 낚아?’

얼마나 기대하던 특급 경매인가.

경매를 위해 급하게 팔았던 유적들.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허나, 단순히 금전적인 손해만 보았다면 복구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복구할 수 없는 자존심.

그들은 자신을 덫에 잡힌 사냥감처럼 여겼다.

제왕으로 군림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나약한 사냥감이 되어 하루하루를 불쌍하게 연명해나갔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감히······!’

떠오른다.

진실의 가루에 손을 넣은 그 순간이.

제국에서의 모든 순간 중 가장 굴욕적이었으며,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다른 모든 것은 참고 넘어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네년. 살고싶으면 변명이라도 해야할 것이다.”

마스터는 살기를 드러내며 흑요를 노려봤다.

흑요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몸을 떨었다.

“왜, 왜 그래?”

“제국과 내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더군.”

“무,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납치당해 있었다고!”

“개소리.”

“진짜야. 납치당해서 네 정보를 불라고 했다니까? 난 한 마디도 안 했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올 수······.”

콰득!

마스터 주먹을 뻗었다.

콰지지직!

동시에, 흑요 주변의 공간이 그럼처럼 깨졌다.

공간 부수기. 마스터의 고유능력 중 하나.

“네가 납치당해서 내 정보를 안 불었다고? 누가 그딴 소리를 믿지?”

연회장에 흑요는 없었다.

혼자 몰래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상식적인 선에선 납치당했다고 봐야하나, 상대는 흑요다.

납치를 당했다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자기 혼자 살고자 마스터에 대해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서 바칠 여자가 바로 흑요였다.

납치당한 게 아니라면, 남은 수는 하나.

처음부터 제국의 끄나풀이었다는 것.

“허나 이건 믿어도 좋다. 지금부터 전부 불지 않으면 모조리 으깨주마. 시작은 얼굴부터. 그 다음은 머리칼을 뜯어내고, 이빨을 전부 뽑고, 지져서, 잇몸과 상처 전부에 녹인 소금을 부은 뒤 천천히 박살내주겠다.”

“아······ 으······.”

흑요가 몸서리쳤다.

진심이다.

마스터는 진심으로 자신을 부숴버릴 셈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하지만 오해하지마. 나도 진짜로 그런 자리인 줄 몰랐으니까. 나, 난 그냥 ‘플레이어’들의 정보를 조금씩 짭짤한 가격에 판거 뿐이라구······!”

“내 정보도 팔았나?”

“전혀! 내가 아무리 돈에 미쳤어도 그런 짓까지 할까봐? 그럼 나도 위험해지는데? 게다가 그 가면쓴 놈이 그런 놈인 줄 알았으면 가까이 가지도 않았을 거야. 젠장, 나도 속은 거라고!”

“언제부터?”

“저, 접근해온 건 얼마 안 됐어. 이제 반년? 제발 날 믿어줘!”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간 플레이어의 정보를 팔아넘기며 장사수단으로 이용한 모양.

흑요 혼자라곤 생각 안한다.

그녀와 같이 정보를 파는 ‘정보상인’들이 꽤 있었을 터.

그렇게 종합하여 모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경매에 불러모은 듯싶었다.

흑요가 마른 입을 훑으며 말했다.

“그래도 살아돌아왔잖아? 이제 우리를 플레이어라고 전혀 생각 못할 거 아니야? 그 악랄한 사신교라면 플레이어인 걸 알고 살려보내 줄 리가 없으니까.”

“아니. 적어도 네년은 일부러 살려보내준 거다.”

마스터는 확신했다.

그들은 흑요가 플레이어인 걸 안다.

알면서도 내보내준 건 다시 이용하기 위함이다.

배신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니까.

하물며 처음부터 돈을 받고 정보를 판 인간임에야.

흑요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플레이어인 걸 알고 있다고? 일부러 진짜 정보랑 가짜 정보를 섞어줬는데도?”

“그래. 그리고 그들이 접근해오면 너는 거절할 수 없다. 양쪽에 배신자로 낙인 찍히면 무조건 죽음뿐이니.”

“······ 여태까지 사신교의 움직임이랑은 너무 다른데?”

사신교는 죄인과 절대 접촉하지 않았다.

죄인이라 판단되면 사신을 붙이거나 죽였다.

사신교가 죄인과 거래한다?

그간의 행보로는 있을 수 없는 일.

“방식을 바꾼거겠지. 상황이 달라졌지 않나.”

“무슨 상황이 달라져?”

“빌헬름이 죽었다.”

“······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심어린 흑요의 의문에, 마스터는 혀를 차고 말았다.

“사신교가 게이머의 아바타인 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유일한 인간. 아예 접근조차 못한 인간. 그게 빌헬름이니까.”

“잠깐. 알고 있었다고?”

굳이 더 설명하진 않았다.

다만, 마스터는 흑요와 달리 대원정과 관련된 더 깊은 상황을 알고 있다.

사신교는 빌헬름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접근할 수 없었다.

사신을 붙이지조차도, 죄인의 오명을 씌우지도 못했다.

‘빌헬름이 사신교의 준동에 일종의 억제기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정확한 이유는 마스터도 모른다.

제국이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가 빌헬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확신했다. 더불어 그 이유에는 사신교도 엮여있을 것이다.

다만, 이 정도 규모의 ‘플레이어 숙청’은 이전에도 없던 일.

있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갑자기 사신교가 방식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빌헬름이 죽어서, 더 눈치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게다가 반년이면 빌헬름이 죽은 시기와 겹친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사신교가 흑요에게 접근한 때가, 대원정이 실패한 시기와도 겹쳤다,

이게 단순히 우연일 리는 없다.

그리고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사신교. 네놈들은 판게니아에서 플레이어를 전부 소독이라도 할 셈이냐?’

이만한 악의(惡意)라니.

······ 그건 정말 벌레나 병균의 취급이 아닌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