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회장을 가로막은 다르칸 영지의 기사들. 그들 하나하나의 무력 자체도 이미 자신을 넘어선 상태였으니.
‘절대로 란돌프님과 결부시켜선 안 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란돌프와 엮이면 안 된다.
란돌프에겐 목숨을 바쳐도 부족하지 않을 은혜를 몇 번이나 입었다.
진심으로 따르며 충성을 다 바치리라 맹세하지 않았던가.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줘선 더욱 아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세렝게티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한테 현실은 의미가 없어.’
허드슨에게 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세렝게티를 구할 수만 있다면, 의미 없는 자신의 목숨도 가치가 생기리라.
지구에서 올리버로서의 허드슨은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반면, 판게니아에서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나.
모험과 사랑, 함께할 동료를 얻었다.
몇 번이나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했다.
불가능한 일을 넘어서며 더욱 높게 달성하는 자와 함께 숨을 쉬었다.
그 기적의 존재는 자신과 세렝게티를 재회하게 했으며, 직접 대화를 나누게까지 해주었다. 심지어 모두가 포기한 심장까지 고쳤다.
어두운 삶에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희망을 맛본 것만으로도, 충만했다.
-허드슨. 이번에 돌아가면, 세렝게티를 완전하게 깨울 수 있을 것이다.
······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지만, 주군께선 더욱 높게 나시길.
팬텀, 나의 희망이시여.
유일무이한 빛이시여.
부디··· 판게니아를 부탁합니다.
현실에서의 삶에 지쳐있던 제게 모든 걸 가능케 했던 이 땅을.
마음껏 걷고, 뛰며, 사랑하게 해주었던 이곳을.
‘다른 이들은 판게니아를 그저 게임으로, 가상의 공간으로만 여기더군요.’
플레이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의 죽음이 현실의 죽음과 같다고 해도, 결국 그들의 근본은 지구에 있었다.
하여,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플레이어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허드슨이 홀로 정착했던 이유다.
자신과 다른 이들의 차이.
판게니아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달랐으므로.
이곳을 가상의 공간이나 게임쯤으로 여겨 패악질을 부리고, 희롱하며, 파괴를 일삼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 이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 자체가 허드슨에겐 불가한 일이다.
반면, 란돌프는 어땠던가.
‘······ 처음으로 저와 같은, 동류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기사의 정원.
와이저 후작의 영지 중심에 위치한 비석.
그곳엔 대원정에서 희생당한 기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란돌프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맹세했다.
-나는 기사왕의 후계자로서 그들의 영광스런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다시 없을 영웅들의 영면을 위하여, 그들을 가슴 속에 영원히 묻을 것이다.
순간 허드슨의 눈에 란돌프가 ‘기사왕 빌헬름’으로 비쳤다.
진심을 가득 담아,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
설혹 하더라도 입에 발린 말만 늘어놓았겠지.
하지만 그는 판게니아인들의 죽음을 온 마음을 다해 애도하였다.
플레이어 중엔 처음으로, 판게니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를 만났다.
그 순간 얼마나 벅찼던가.
이후에도 다른 기적 같은 일들을 많이 겪었으나, 허드슨에겐 오직 그 장면만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었다.
정말 영원토록 잊지 못할 기억.
그러니, 판게니아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란돌프뿐이다.
판게니아를 구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생각해봐라. 세렝게티와 완전히 재회하는 모습을. 세렝게티와 식을 올린다면 주례는 내가 서주마.
-······.
-세렝게티가 드레스를 입고서 너와 함께 식장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봐라. 물론 상상만이 아니다. 곧 현실이 될 테니.
······ 예쁘겠다.
진심으로.
식장의 상상하자, 머릿속에서 세렝게티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란돌프는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전하는 건가.
희망을 놓지 말라고?
아니다. 여기서 그의 걱정을 사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더이상 시간을 끌면, 란돌프와 관계되어 있다는 의심만 더 사게 될 것이다.
허드슨은 구멍이 뚫린 오크통에 있는 힘껏, 깊숙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이후 오한과 함께 전신의 근육과 골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떴을 때.
‘········· 뭐야 이거.’
허드슨은 여자가 되어있었다.
*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보통 식장에서의 모습을 떠올리라 하면, 정장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기 마련 아니던가?
아니, 신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떠올리지 않나?
그런데 왜 허드슨은 갑옷을 입고 있는 걸까.
순백의 기사.
허드슨은 그 이름처럼 새하얀 갑옷을 입은 세렝게티의 모습이 됐다.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라.
1번의 남자 역시 그녀를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세렝게티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녀가 판게니아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세렝게티는 플레이어일 수가 없다는 사실 역시도.
-허드슨. 그가 사랑하는 자로군.
이 대목에서는 살짝 놀랐다.
제국은 세렝게티와 허드슨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세렝게티의 짝이 허드슨인 건 대원정 마지막에 이르러서 겨우 알았는데.
그것도 세렝게티에게 직접 듣지 않았나.
역시 허드슨을 ‘죄인’이라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전에 이미 허드슨에 대한 정보를 제국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빌헬름의 후계자라 떠들었던 나도 알고 있겠군.’
허드슨과 세렝게티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주력에 대해선 아직 모르겠지만, 빌헬름의 후계자 란돌프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을 해놨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폐쇄적이지만, 제국은 더욱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냥 폐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제국은 많은 걸 알고 있다.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잡아먹히리라.
곧이어.
-솔직히, 놀랐다. 나는 진정으로 허드슨이 ‘죄인’이라 생각했거늘.
1번의 남자는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언제나 여유롭던 그의 태도에 마침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으음. 플레이어가, 판게니아의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는······ ‘죄인’이 아니로구나.
1번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
그것을 이용한 외형의 변형을 시도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플레이어라면 보통 지구의 본체를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세렝게티를 생각한 허드슨의 진심을 1번의 남자도 알게 된 것이다.
거짓이나, 희롱이 아닌, 진정한 허드슨의 마음을.
-내기는 내가 이겼다.
-······ 궁금하지 않나? 허드슨이 왜 저런 모습이 됐고,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야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을 썼으니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모른다.
나도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겨우 추론해낸 것이었으니.
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론이 틀렸으면 진짜 큰일날 뻔했다.
살아서 빠져나갔을 확률은 2% 미만. 그것도 나 혼자서의 일이다. 허드슨과 함께 도망쳤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계속 단순 무식한 바바리안 행세나 해야겠다.
-그는 죄인이 아니다.
-············ 그래. 그대가 제대로 보았다는 말이다. ‘저것’은 진심을, 진실을 다해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만드는 물건이지. ‘죄인’은 저 가루에 닿으면 모두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아예 타인이 될 수는 없으니.
허드슨은, 자신의 몸보다 세렝게티를 우선으로 여겼다.
그런 허드슨이 세렝게티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저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허드슨은 여전히 당황한 채였다.
자신의 몸을 훑고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1번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얼마나 손을 담갔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래도 완전한 변신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풀릴 것이다.
-그건 다행이군.
-아무튼, 이번 내기는 내가 졌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3개의 경매 물품을 넘겨주지. 나중에.
-······ 나중에?
-당장 준다고는 안 하지 않았나?
이런 약아빠진 놈을 보았나.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기약 없이 기다리란 말은 아니다. 내가 그 정도로 경위 없는 사람은 아니니. 그대가 나와 함께 ‘본교’로 간다면 그곳에서 즉시 주도록 하마.
-본교? 사신교의 본교 말이냐?
-그러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온 것 아니었나? ‘황금빛 정통의 후견자’는 모두 얼마 뒤에 있을 ‘만찬회’에 참석해야만 되니.
사신의 만찬회.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심연 미궁의 은여우가면에게서.
‘87일 후에 사신교에서 만찬회가 있을 거라고 했지.’
문제는 사신교가 어디 있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1번이 안내해주겠다는 말이다.
‘그곳에 헬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1번 또한 자신을 정통의 후견자라고 말했다.
아마도 헬과 같이 ‘자신의 영역’에 숨겨두고 있으리라.
워프를 마음껏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의 헬은, 반대로 공간 이면에 숨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러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바알 갑옷을 얻어야 세트가 완성되고 놈을 제어할 수 있다.
준다는데 당장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이 촉박하지만, 그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당기려다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으므로.
‘사신교. 사신교라.’
게다가, 사신교를 제대로 알 기회다.
이들은 제국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심지어 제국의 귀족들보다도 위에 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들!
‘예전에 제국 황실에 몇 번이나 침투했다가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지. 이번에는 꼭 성공하고 만다.’
몇 번이나 제국에 침투하려고 캐릭터를 생성해봤다.
딱 한 번 성공한 적이 있는데, 황실까지 닿기 전에 발각되어 죽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난이도.
제국 중심에 침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포기했다.
반면 사신교를 통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헬이 있고, 1번조차도 나를 ‘정통의 후견자’라 여기는 이상.
-53번. 그도 기대되는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53번, 마스터.
그는 과연 눈치를 챘을까?
오크통 앞에 선 53번은 이윽고 통 안으로 손을 넣었다.
화아아악!
이윽고 마스터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호라!
그 모습을 본 1번의 남자가 경탄을 늘어놓았다.
*
일차적인 ‘소독’이 끝나고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미 바알 갑옷을 골드의 소모 없이 획득한 이상, 남은 건 ‘가치 높은 물건’을 싹쓸이하는 것뿐.
갖고 있던 15억 골드로 대략 40억 어치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을 사들였다.
이렇게 ‘가성비’로 사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빛의 옥좌를 업그레이드한다.’
최소한 ‘찬란한’ 어미를.
혹은 ‘그 너머’의 어미를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찬란한 빛의 옥좌는 그 자체로도 ‘무적’의 효과를 갖고 있다.
사신교에 가게 되거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정통이라는 게 헬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쉽게 도망칠 수도 없겠지.’
텔레포트 북을 열어서 도망치려 해봤자, 정지시키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생존을 위한 물건 하나쯤은 챙겨야 하지 않겠나.
경매의 물품을 모두 전달받은 뒤,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빛의 옥좌’에 해당하는 장비를 제물로 바치시겠습니까?》
일전 ‘찬란한 빛의 옥좌’를 띄울 땐 대략 20억 골드의 가치를 사용했다.
반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을 모두 사용하면 그 두 배의 가치다.
예상대로라면 ‘찬란한’ 옥좌의 다음을 볼 수 있으리라.
‘시작하자.’
황실
‘어, 어떡해야 하지?’
데르시안 영애.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서 퀭한 눈, 움푹 팬 볼살, 바짝 마른 입술.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 것만 같았다.
‘벌써 스무 명이 넘게 사라졌어.’
둘째 날의 ‘소독’이 끝난 뒤, 경매는 재개되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경매의 참석자는 줄어들었다.
100명으로 시작한 경매는 막판에 이르러 77명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는 초청자들뿐만이 아니라 ‘제국 귀족’ 역시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귀족이 죄인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처음부터 계획된 거야. 죄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만 경매에 참석한 거라고!’
데르시안 영애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더 뜯을 손톱조차 없었다.
피부가 터져 핏물이 입가를 적셔도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이 경매는 애초에 사신교가 주최하여 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만을 모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과연 사신교만 알았을까?
‘설마, 가문에서도······ 가문에서도 나를 죄인으로 생각해서? 그래서 이곳에 보낸 거야?’
-이자벨라. 데르시안 가문의 대표로 다르칸 영주와 협력하여 ‘특급 경매’를 성사시키거라. 너의 능력을 보여다오.
떠나기 전, 가문의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
특급 경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능력을 보이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경매에 왜 자신을 보낸 것인지.
데르시안 가문은 현재 후계자들의 경쟁 구도로 내환을 겪고 있었다. 온갖 권모술수와 피가 낭자했으나 가문은 이를 용인했다.
하지만 이곳에 자신을 보낸 자는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이미 포섭된 걸까?
무엇보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놓고, ‘그놈’은 델피안으로 보냈다.
엄청난 전력을 포함해 사흉의 토벌에 앞장서게 한 것이다.
무려 광전사 다섯을.
반면 자신에겐 고작 한 명만 호위로 붙였다.
‘······ 그놈은 사흉을 토벌한 영웅으로 만들고, 나는 이곳에서 죄인 취급되어 죽게 만들려고? 정말 그런 거야?’
확신이 섰다.
단순히 후계자들끼리 향한 장소가 달라서만은 아니었다.
다르칸과 데르시안이 공동주최하였으나, 다르칸의 영주는 사전에 ‘사신교’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할지도 말이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말만 ‘공동 주최자’이지, 그들의 방문 예정도, ‘소독’이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나.
소독.
사신교가 ‘죄인’을 찾아낼 때 사용하는 은어다.
소독이 진행되면 아무리 고위귀족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도시 전체를 폐쇄한 뒤 죄인을 모조리 찾을 때까지 소독은 멈추지 않는다.
길어지면 도시 자체가 폐사하는 때도 있다. 더욱 심할 경우 심연에 가라앉거나.
하여, 자신의 도시가 ‘소독’의 대상이 되는 걸 귀족들은 두려워한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소독’이 진행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 모두가 모를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다.
‘죄인으로 지목당할 수는 없어.’
데르시안 영애가 방의 구석에서 깍지를 끼고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죄인으로 특정되어 사신에게 처단당하면 제국은 그 사람의 모든 걸 ‘삭제’한다.
기록을, 심하면 기억까지도 말살시킨다.
그렇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만든다.
제국 내의 귀족이 죄인으로 특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아예 없진 않았다.
영주가 죄인이 된 일도 있었는데 그 영지 자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제국 내에서 ‘그 가문’을 언급하는 건 금기시되었다.
자신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을 선정하는 기준은 아무도 모르므로.
‘살아야··· 살아서 나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하루에도 몇 명씩 사라져간다.
귀족과 외지인을 가리지 않았다.
이 도시 어디에도 안전한 장소는 없다.
워프 전체가 중단되어 빠져나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두렵다. 무섭다. 숨도 못 쉴 만큼. 질식해 죽을 것만 같다.
‘그, 그 바바리안.’
자신의 호위를 때려죽인 그 흉악한 전사.
처음에는 단순한 호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1번. 사신교에서 나온 고위 간부. 그와 계속해서 함께하고 있는 탓이다.
‘누가 죄인인지 선정하는 건 1번이야. 그리고 그 바바리안도 마찬가지고.’
흠칫!
그런 생각이 들자, 데르시안 영애의 안색은 더욱 굳어버렸다.
만약 그 ‘바바리안’이 ‘1번’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라면,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할 건 물 보듯 뻔한 일.
토끼를 사냥하듯 자신을 몰아넣고, 가죽을 벗겨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죄인으로 선정하여 기록조차 남지 않게끔.
데르시안 가문의 불명예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지겠지.
‘사과하긴 했잖아.’
사과는 했다는 안도.
그러나 그러한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음식점, 다르칸의 오후에서 먼저 공격한 일.
결국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영주성까지 갔다.
한데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확신했던 다르칸 영주는 그녀에게 사과를 종용했고, 그녀는 반강제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을 당시만 하더라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억지 사과’를 그는 과연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였겠나.
“아······.”
정신이 번쩍 든 데르시안 영애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우당탕!
바짝 마른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몇 번이나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귀족의 품위와는 맞지 않는 행동이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