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111화 (111/317)

신문의 메인에 뜬 기사도 연합을 칭찬하는 글이었던 탓이다.

‘왜 그러냐고?’

박태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들 태평한 소리만 해대고 있으니 답답해서 그렇다.”

“지금은 태평하지 않습니까? 모두 계약도 완료했고······.”

말마따나 태평성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금률의 조각’이 부족해 허덕이던 연합.

결국, 연합원들 전원이 특정 성좌들과 ‘계약’을 체결하며 부족한 조각을 수급했다. 거기에 성좌의 특별한 스킬까지 얹자 전투력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이후 한국에 열린 워프를 통해 넘어오는 괴물들을 모조리 토벌하고,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표면적으로는 걱정할 게 전혀 없는 상황.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하지만 연합장 박태우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우뚝 섰지만,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재난.

항거 불가능한 ‘재해’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그 ‘워프’가 한국에만 생성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워프.

최근 생성되고 확인된 붉은색의 워프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델피안에서 사흉의 침략을 받기 직전에 나타난 워프와 같았다.

‘지난주에 제주도에서 발견한 붉은 침략형의 워프. 겨우 숨기긴 했지만 만에 하나 저게 사흉의 침략 전조라면······.’

델피안 함락 이후 제주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워프.

만약 그것이 사흉 침략의 전조라면 도저히 답이 없었다.

허나 붉은색의 워프가 한국에만 나타난 건 아니다.

현재 비밀리에 확인된 것은 한국을 포함한 세 곳.

문제는.

‘······ 팽창하고 있는 워프는 제주도 워프뿐이다.’

숨겨놓은 그 워프가 팽창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게 침략의 전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절망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왜 하필! 왜 하필 제주도냐. 넓디넓은 지구에서 왜 하필······!’

영웅 연합이 한국에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

이제 판게니아에서 도시만 점령하면 모든 게 완벽했다.

거점을 구축하고 날아오를 일만이, 황금빛의 미래만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제주도로 사흉이 쳐들어온다면 희망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리라.

공지사항에 적힌 대로 남은 4곳의 중립도시가 함락되면, 이후 사흉은 지구로 향한다.

아마도 한국으로. 제주도로 올 가능성이 흘러넘쳤다.

연합에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연합장은 핸드폰을 열어, 다시 한번 저장해놓은 영상을 확인했다.

-존경하는 전사들이여. 내게 ‘히드라곤의 혼’을 가져와라. 그럼 내가 직접 주도하여 사흉을 토벌하겠다. ······ 시간이 많지 않다.

그라시아가 남겨둔 이 짧은 영상이 벌써 천만뷰를 넘긴 상태였다.

댓글 창에는 사흉에 대해서, 그리고 그라시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

건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해탈한 것만 같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사흉이 침략해온다면 희망은 그라시아 뿐이라는 것이다.

결정을 내린 연합장 박태우가 입을 열었다.

“연합원 전부 소집하도록.”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전원 소집은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지금 같을 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은평구를 샅샅이 뒤져서 ‘히드라곤의 혼’을 소유한 플레이어를 찾을 것이다.”

괴물들의 침략이 시작된 초창기.

은평구에서 히드라곤을 소환하여 자이언트 맨티스를 사냥한 플레이어가 있다. 지구에서 소환했다면 ‘혼’을 이용한 게 분명할 터.

그러나 상대는 미등록 플레이어다. 은둔자 말이다.

은둔자들은 자신의 신상이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게 숨이었다.

“찾아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무릎을 꿇고서라도 빌어야겠지.”

“············ 전원 긴급 소집명을 내리겠습니다.”

연합장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은둔자를 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연합원 전부가 투입된다면 찾지 못할 수가 없으니까.

*

-그럼, 내기하지.

마지막으로 묻겠다는 1번의 말.

허드슨을 플레이어가 아니냐고 묻는 그의 말을 나는 가볍게 받아쳤다.

-······내기를 하자? 2번 허드슨이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를 두고서 말이냐?

-당연하다. 내가 본 것과 네가 본 것이 다르다면 내기를 할 수밖에. 왜, 자신 없나?

나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첫 만남 때부터 1번에게 묘하게 말렸다. 지금까지 만난 강자들과는 달리, 제대로된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모든 건 쇼다.’

쇼(Show)다.

오로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꽤 많았다.

우선.

‘첫 날 68번이 사라졌다.’

델피안이 함락되었다는 말에 반응한 68번은 다음날 쥐도새도모르게 사라졌다.

플레이어임을 확신하여 죽였거나, 어딘가에 감금시켜 두었겠지.

여기까진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이틑날이다.

‘이틑날 경매장에서 76번이 사신에게 목이 잘렸다.’

목이 잘린 남자는 76번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왜?

굳이 경매장에서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68번처럼 조용히 처리하면 됐을텐데.

플레이어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는 게 낫다. 경각심을 주고 혼란을 유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죽은 뒤 흰색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지구인의 모습이 나타났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악스러운 장면이다.

아무리 죽은 시체라지만 로그인과 로그아웃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또한 의아한 일이었다.

‘진짜 그 플레이어의 모습이 맞나? 단순히 외형만 변경시킨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제국은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다.

오랜시간 플레이어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지구에 대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차피 죽은 시체. 그저 ‘외형’만 변경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설혹 진짜 지구에서의 몸이라 할지라도, 왜 하필 죽은 상태에서 가루를 뿌린걸까?

‘···크람델로 향하기 전. 시체 까마귀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던전에 갇힌 두 아이.

소년과 소녀는 시체 까마귀가 만든, 플레이어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하지만 그 외형은 틀림없이 지구인의 것이었다.

플레이어로 소환되었을 두 아이가 어째서 지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겠는가.

‘그때, 시체 까마귀는 두 아이의 기억을 읽고 재현해냈다. 그 결과 플레이어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지구의 어린아이로 나타났지.’

나 역시도 속을 뻔했다.

하지만 시체 까마귀가 소환된 두 아이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억을 훑는 방법뿐이다.

죽은 자의 기억을 토대로 외형을 변경시키는 수법은 이미 한 차례 겪었다.

만약 흰색의 가루가 그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걸리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왜 그 자리에서 바로 소각했을까.’

단순히 위협을 주고자 그런 것은 아닐 테다.

오래 볼 수 없게끔, ‘쇼’가 드러날까봐 그런 것이 아닐는지.

단순히 기억을 토대로 재현한 것이라면 묘한 이질감이 발견될 수 있으므로.

내가 두 아이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시체 까마귀를 역으로 유인한 것처럼 말이다.

‘내 가정이 맞다면······ 확실하게 플레이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지금은 내 가정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곧 1번의 남자가 말했다.

-좋다. 무엇을 걸고 내기할까? 그대가 내건 빛의 옥좌?

-글세, 옥좌에 걸맞은 물건이 준비되어 있나?

바알 갑옷이 경매물건으로 나왔을 때 나는 입찰하지 않았다.

고로, 그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흠. 유일급의 물건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만······ 경매에서 내가 보였던 물건들 중 두 개 정도라면 어떤가? 얼추 가치는 비슷할 거 같은데.

-세 개.

-······ 욕심이 많군.

타협은 없다.

이조차 응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본 게 잘못되었음을 시인해라.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진행하지. 대신 확실하게 선별해야겠군.

1번의 입가에 미소가 띠었다.

······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하지만 허드슨이 플레이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확인할 방법 또한 있다는 듯이 늘어놓았다.

“지금부터 오른쪽에 위치한 자들은 이 ‘진실의 가루’에 손을 담근다.”

은여우가면이 말하자, 검은 후드를 눌러쓴 교도들이 오크통 하나를 가져왔다.

‘안 보이는군.’

확실하게 볼 수만 있다면 저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있는 위치에선, 보이지 않는다.

손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만 작게 뚫린 통.

오크통 자체도 겉에 온갖 것을 발라둔 상태였다.

내부를 살필 수 없도록.

‘강력한 관찰류의 스킬, 혹은 대현자를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확인할 수 없게끔 해놨다.

나 역시 알 수 없지만, 대신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기억을 토대로 외형을 변형시키는 무언가······.’

죽은 자만이 아니라, 산 자까지 통용되는 그런 게 있었던가?

설령 가루가 아니어도 좋다.

저들이 쇼를 하고 있다면 저 가루 역시도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찰나지간 시체를 소각시켜버린 것도 같은 맥락 아니겠나.

머지않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

······ 있기는 있었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

아이작이 그토록 찾아헤메던 보물.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주며, 완벽하게 ‘외형 변경’을 해주는 전설의 물약이다.

그게 맞다면 ‘원하는 모습’이란 역시 기억에 기준할 터.

가장 강렬한 기억, 모습.

그것을 ‘진실의 가루’라 속여서, 지구에서의 모습으로 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닐까.

“가루에 손을 담그면 진정한 자신의 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죄인만이 변하겠지.”

말이 길다.

직접 설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그냥 마음대로 진행하면 될 것을.

그야말로 플레이어만 반응하게 할 속셈이다.

“2번. 통 안에 손을 담구도록.”

동시에 허드슨의 눈이 작게 떨렸다.

그러나 내 생각이 맞다면, 저 통 안에 든 건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이다.

강제로 강렬한 기억에 맞춰 외형을 변경하게끔하는 물건은 그 외엔 없으니까.

그럼 ‘올리버’의 모습을 떠올리지 말라고 해야할까?

‘떠올리지 말라 하면 더 떠올리는 게 사람이지.’

안 그래도 지금 허드슨은 지구에서의 자신을, 올리버의 모습만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예 생각 자체를 돌려야만 한다.

-허드슨. 이번에 돌아가면, 세렝게티를 완전하게 깨울 수 있을 것이다.

-······.

황금률의 선을 연결하여 말하자, 허드슨은 답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쪽을 쳐다도 안 보고 있었다.

내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고자.

그저 혼자 감수하는 중이었다.

-생각해봐라. 세렝게티와 완전히 재회하는 모습을. 세렝게티와 식을 올린다면 주례는 내가 서주마.

-······.

-세렝게티가 드레스를 입고서 너와 함께 식장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봐라. 물론 상상만이 아니다. 곧 현실이 될 테니.

허드슨을 여기서 잃을 수는 없다.

만약 들통난다면, 함께 빠져나가야만 했다.

단순히 워프를 중지시켜둔 것이라면 헬로 다시 작동시킬 수도 있을 터.

쑥!

허드슨이 오크통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화아아아악!

허드슨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벼, 변했다!”

“그런데 저 모습은······.”

“······ 순백의 기사?”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의 모습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기사왕 빌헬름의 최측근.

그것도 늠름하게 순백의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 그럴 리가.”

1번의 남자가 처음으로 이맛살을 구겼다.

시작하자

‘······.’

허드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실의 가루.

경매장에서 보았던, 신체를 지구의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독이다.

적어도 플레이어라면 절대로 손에 닿아선 안 되는 강력한 독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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