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복제품이라 그런지 여전히 나의 가치는 확인이 안 된다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대단하십니다. 첫날 경매에 4억 골드를 쓰시다니!”
“1등 아닙니까?”
“처음 뵙는 분인데, 어느 도시에서 나오셨습니까?”
허드슨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경매의 참가자들이다.
첫날 경매에서 혼자 4억 골드를 썼으니, 소란이 되는건 당여지사.
오른쪽에 앉았던, 외부인들의 중심에는 허드슨이 섰다.
그리고 제국 귀족들의 틈에는 다르칸 영주와 데르시안 영애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슬쩍슬쩍 허드슨을 염탐하는 중이었다.
“첫날부터 4억 골드라······.”
“저만한 돈을 어디서 구한거지?”
“괜스레 무리한 것 아니겠나.”
말은 비웃고 있지만, 그조차도 관심이다.
제국의 귀족들은 관심 없는 자는 눈길도 주지 않으므로.
과연 계속해서 이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절로 궁금증이 들었던 탓이다.
무엇보다, 그가 어느 도시에서 초청된 자인지도.
이곳 연회는 경매가 끝난 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사교의 장. 당연히 경매에서 눈에 띈 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놈 뭐야?’
데르시안 영애 역시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내심은 구겨질대로 구겨진 상태였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저만한 금액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건만.
대체 어디서 저만한 돈을 끌어온 걸까?
그것도 괴물의 도시, 미궁에서 온 자가.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되는데, 어느덧 모든 관심을 저놈이 받고 있었다.
‘1번은 안 보이는군.’
그 시선을 아랑곳않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1번을 찾고 있었다.
다르칸 영주나 데르시안 영애보다 앞번호에 있던 자.
다른 자들보다도 1번이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내일 경매는 뭐가 나올지 진심으로 궁금하군요.”
“이것 참. 내일이라도 경매물건을 등록해야 조금이라도 경매에 참가할 수 있겠습니다.”
“55번께서도 경매물건을 등록하셨겠지요?”
“오오, 어떤 물건을 등록하셨는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허드슨이 관심을 끌며 이야기를 선도해나갔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쯤.
《도시 ‘델피안’이 함락되었습니다.》
《‘사흉 바알’이 ‘델피안’을 심연에 가라앉힙니다.》
······ 느닷없이 메시지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으음!”
그 순간, 침음성을 내뱉은 남자 한 명.
큰 반응은 아니지만 델피안의 함락 소식을 보자마자 소리를 내뱉었다.
‘68번.’
절묘한 타이밍.
우연이 아니라면, 68번은 플레이어다.
다행히 허드슨은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면 68번의 반응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 그나저나.
‘델피안 함락이라.’
바알이 델피안을 함락시켰다니.
3천 명의 전사가 델피안에 모였다는 이야기가 퍼진 게 불과 어제 일이었다.
그게 고작 하루만에?
쿵!
곧이어 연회장이 열리며, 몇몇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의 귓가에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델피안의 함락 소식을 전하는 것이겠지.
“······ 뭐? 그 말이 정말 사실이냐?”
“예. 영애님.”
동시에 데르시안 영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차마 감추지 못하는 기쁨 절반과, 당황스러움 절반의 얼굴.
이야기를 전해들은 귀족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당황의 비중이 크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제국과는 상관없는 도시들.
“하하하!”
연회장은 금새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
다음날, 두 번째 특급 경매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날과 달라진 게 있었다.
바로 번호.
‘2번.’
55번에서 2번으로 급등했다.
왼쪽 제국 귀족들의 자리로 이동한 것이다.
‘전날 돈을 쓴 순서대로 위치가 재배열되나보군.’
나름의 특혜라면 특혜일까.
3번 자리엔 데르시안 영애가 앉았다.
‘어제자 68번은······ 없다.’
모든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어제 반응한 68번만 없었다.
플레이어임을 눈치채고 제거한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 검은 염소라.”
그때였다.
1번의 자리에 앉은 남자가,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드슨이 아닌 나를 정확히 바라보면서.
1번에 앉은 남자는 어제 경매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제일 돈을 많이 쓴 게 나임에도, 여전히 1번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턱시도와 흰색의 가면으로 전신을 가린 자.
그가 나를 향해,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어제의 68번은 플레이어였다. 그대도 알고 있었겠지?
광역 도발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음성.
마치 머리 안에서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귓속말은 아니다. ‘전음(傳音)’ 부류의 스킬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 식의 스킬이었다면 내가 먼저 눈치챘을 터.
‘황금률의 선.’
그와 나 사이에 연결된 황금색의 실선.
오직 연결된 자들만이 말하고 들을 수 있는 ‘황금률’을 이용한 대화였다.
황금률의 조각을 이용해서 이런 것도 가능했단 말인가?
허드슨이 알려준 ‘자동번역’의 기능에서 한발 더 나아간 기술이다.
하기야, 성에만 틀어박혀 있던 허드슨이 황금률에 숨겨진 대화의 기능을 알 수 있을 리가 없긴 했지만.
‘전할 말을 실에 담아서 보낼 수 있나 보군.’
무심결에 떠올린 생각을 즉시 전달하진 않았다.
눈앞에 내가 생각한 내용이 글자로 떠올랐고, 그중 원하는 것을 실에 담아 보낼 수 있는 형식이었다.
실 전화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
‘······ 플레이어를 알고 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상대는 분명하게 플레이어를 언급했다.
뿐만인가.
68번, 그가 사라진 이유 역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물며 ‘너 역시 알고 있었느냐’며 내게 묻고 있었다.
무슨 연유일까.
왜 나한테 묻는 거지?
‘확실한 건, 다르칸 영주보다도 윗선에 있는 자라는 것.’
경매를 주최하여 자신의 영지에 내세운 다르칸 영주는, 당연히 특급 경매 1순위다.
그런 다르칸 영주보다도 앞에 있으며 제국 귀족들 역시 별반 의구심을 갖지 않는 남자라.
어제 경매를 진행하며 본 제국 귀족들의 성향은, 대부분 자신보다 못난 자가 앞에 있는 걸 절대로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장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네 가지.
최고위귀족, 황실, 사신교······ 혹은 특별한 플레이어.
‘황금률을 다루는 건 플레이어만이 아니다. 심연 미궁에도 판게니아인들이 속속들이 들어왔었으니. 그러나 가능성의 한 가지로는 충분해.’
심지어 괴물들도 다루는 게 황금률의 조각이었다.
황금률을 다룬다고 플레이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68번이 누구냐?
하여, 능청을 떨었다.
1번은 여전히 경매장을 보고 있다.
그는 내게 전혀 관심 없는 척을 하며 답을 보냈다.
-정말로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마치 알아야 할 것을 모르냐는 듯한 말투다.
나는 내심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68번은 죽었다고.
어딘가로 사라진 것도, 영지에서 도망친 것도 아니라, 죽은 것이다.
-없는 자를 두둔할 필요가 없을 뿐.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굳이 두둔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윽고 1번의 목소리가 재차 머릿속에 퍼져나갔다.
-나는 플레이어일세.
내심 인상을 찌푸렸다.
········· 뭐라는 거야, 이놈?
갑자기 플레이어라고?
설마 내 반응을 떠보려는 건가?
68번이 플레이어인 것을 알고 있었느냐며 떠보더니, 이제는 아예 자신이 플레이어라며 막 던지고 보고 있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던지면 내가 반응을 보이리라고 생각하는지.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하마터면 진심으로 움찔할 뻔했다.
-아.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겠군. 나는 ‘민트초코맛있어요’ 일세. 만나서 반갑네.
*
델피안 함락!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3천 명이 넘는 인원.
게다가 다수의 초월자가 참가했음에도 고작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니!
-다크스타 공식 입장 없음?
-잠잠함
-다크스타가 런을 못했다고?
-런크스트가 런을 못 칠 정도면 몰살당한 거냐 설마?
-미친... 어떻게 단 하루 만에 도시 하나가 사라질 수가 있냐?
-델피안이면 나름 건실한 중립도시 아니던가
-대장장이 삼대 도시 중 하나인데 당연히 건실하지... 그리고 토벌하려고 공성 무기도 엄청나게 제작해놓은 거로 아는데
플레이어 톡의 플레이어들 역시도 충격의 도가니였다.
사흉 토벌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이 자신감을 표출하던 게 고작 어제의 일.
그 규모와 참가자들을 보았을 때, 패배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건만.
게다가 무려 델피안이다.
대장장이의 도시로 가장 유명한 세 곳 중 한 곳!
참가자를 모집하고자 고등급의 장비를 내세웠지만, 도시 자체를 ‘공성 도시’로 탈바꿈시킬 만큼 엄청난 준비를 해온 장소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참가자들 다 죽은 거야? 아무나 제발 말 좀 해봐. 내 친구 참가했는데 소식이 끊겼다고
-말
-개새끼야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이나 죽을래?
-ㅇㅇ죽여보셈
-너 어디 사냐?
그중에는 흥분하여 싸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
-이상하긴 하네. 보통 이때쯤이면 누군가가 살아있다고 해야 할 타이밍 아님?
-심연에 전부 가라앉은 듯
-누가 확인 좀 해봐
-심연으로 꺼졌는데 어떻게 확인을 해 이 자식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어...
-잠깐만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그때였다.
동시다발적으로 당황한 듯한 게시글이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지사항 뜬 거 맞지 지금?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도시 다섯 곳이 전부 심연에 가라앉으면 사흉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된다는데?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뭐임?
-공지 내용이 저게 전부가 아니잖아
-아 ㅅㅂ 누가 공지로 장난쳐놓은 거냐?
-이게 말이 돼?
-지구...로 온다는데...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온다고?
-지구 어디로?
-그건 안 적혀있음
-초월자급 다수가 포함된 3천명이 못 막았는데 지구로 넘어오면 막을 수 있나?
-넘어오자마자 핵 쏴야할 듯
-워프 넘어온 괴물들은 황금률로 변신한 상태의 공격만 통하는데 핵이 소용이 있겠냐
느닷없이 떠오른 공지사항으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
판게니아에서도 막지 못한 괴물이 지구로 넘어오면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무엇보다 어디로 공격해올지 예측을 할 수 없는 상황.
-이건 좀 많이 큰일인데?
-지금 안 그래도 침식률 20% 다가오지 않았나
-첫 침략이 망자왕 아흐람이었고, 두 번째 침략은 그보다 강한 놈일 테니까...
-아흐람은 란돌프가 막았다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잖아
-사흉이랑 마계 침공이 겹치면 진짜 지구 멸망 각 잡힐 수도 있겠네;;
-그라시아랑 마스터는 뭐하냐? 다른 영웅놈들은?
-둘 다 잠수중이다
-런크스타 이번에는 런친거 인정해줄 테니까 좀 나타나서 말좀해봐 제발
-판게니아에서도 별 말 없음? 델피안에 지원한 도시들 있을 거 아니야?
-다들 혼란 상태임 일단 내가 알기로는 생존자 없음
-도시 전부 함락되기 전에 플레이어들이 모여야 할 거 같은데...
-총대를 누가 맴
-그라시아 나타났다!!
-뭐? 어디?
-유튜브 라이브! 지금 막 켰음
그라시아가 자신의 채널에서 라이브 방송을 켰다는 소식에, 너나 할 것 없이 입장하여 그라시아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라시아를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상태가 좀 안 좋아보이네
-그러게... 왜 갑자기 백발이 됐지?
-거기서 뭐래?
-‘히드라곤의 혼’을 가져오면 자기가 토벌하겠다는데?
*
······ 민트초코맛있어요?
오직 플레이어들만이 알고 있는 닉네임.
판게니아인이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름을 1번이 언급했다.
게다가 그것을 자신이라며 소개하는 모습까지.
‘민트초코맛있어요가 제국의 관계자다?’
제국은 플레이어를 대놓고 멸시한다.
그럼 몰래 잠입이라도 해있는 건가?
어쩌면 이조차도 낚시일 수도 있었다.
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히든 특성 ‘영원군주의 심장’ 덕이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공지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떠오른 메시지.
마침 잘 됐다.
진짜 플레이어라면, 이 공지사항에 대해서도 언급할 테니.
-··· 사흉 바알이 지구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군. 이걸 어찌 막는다.
놀랍게도, 1번은 공지사항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방금 떠오른 공지사항을 사전에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1번이 플레이어라는 의미인가? 이놈이 진짜 민트초코라고?
하지만 언제까지고 대답을 피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