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주력이 새로 탄생했노라고.
신화의 관을 넘어서며 신비를 파괴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백왕조차도 넘어설지 모르는 진짜 괴물이라고!
······ 하지만, 소문은 와전되는 법이다.
“그래. 그는 나를 죽일 가능성을 지닌 자다.”
“······!”
그런데 백왕이 순수히 인정했다.
그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를 아리아는 처음 보았기에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사실이란 말일까?
“너도 오주력을 만나게 된다면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말투가 묘하다.
마음에 들어한다?
자신이 오주력을 마음에 들어해야할 이유가 있나?
‘설마?’
아리아는 인상을 구겼다.
“관심없습니다.”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
“오주력은 현재 심연 미궁의 주인이 되어있는 바, 그곳의 정리가 끝나면 만날 수 있을 터. 자리를 마련해주마.”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다.
백왕은 오주력이란 자에게, 그 까마귀의 왕에게 그녀를 바치려고 하고 있었다.
한 번 정해진 백왕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게 싫어서 아리아는 수련자의 산에 박혀있던 것이었다.
“······ 마음에 둔 자가 있습니다.”
“잊어라.”
“그는 락투샤를 뛰어넘는 강자입니다. ······락투샤에게서 저를 살렸으며, 어쩌면 사흉조차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본 게 확실하다면 그는 분명히 락투샤를 뛰어넘는 검신이다.
수련자의 비석을 단칼에 베어냈으니.
무엇보다 검선이 남긴 책을 넘겼다. 책에 적힌대로 그는 비석을 자르고 가장 흉흉한 검, 사흉 바알을 제어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역시나 사흉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왕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다면, 데려오거라.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자신이 직접 오주력과 그 남자의 실력을 저울질하겠다는 거다.
게다가 정말로 사흉 바알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일이다.
사실일 경우 오주력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아가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 전에, 북천검을 깨우겠습니다.”
“··· 북천검을?”
북천검은 북부에 봉인된 유래를 알 수 없는 검이다.
하지만 워낙에 위험하고 강력하여 백왕이 직접 봉인해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을 끌려거든, 저 역시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궤변이군.”
“사실입니다.”
아리아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천재가 많다.
천재를 뛰어넘는 진정한 천재들이 말이다.
그들과 마주하려면 모든 도전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락투샤보다 강하고, 사흉마저 제어할 수 있는 자라.’
궤변임을 알지만 구미가 당기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흑왕이 자신을 노리는 게 확실해진 이상 백왕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대비는 하고 있지만, 수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한 번 만나보고싶군.’
*
젠장할.
입안이 쓰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팬텀의 정체도, 백왕의 딸도 납치하지 못한 이상, 마스터에게 남은 건 제국에서 열리는 특급경매뿐이었다.
‘엄청나군.’
경매의 주체가 되는 다르칸의 영지에 들어서자 가히 절색이었다.
검술 명가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워프 앞에서부터 수많은 예술품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건물은 어찌나 큰지.
하나같이 아름다운 양식에 압도되어버릴 것 같았다.
워프를 지키는 병사들조차도 심상치가 않아보였다.
“더 화려하게 올 걸 그랬나?”
“이거보다 더 화려하게 오는 게 가능해?”
마스터의 말을 흑요가 받았다.
흑요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마스터를 서포트하고자 따라왔다.
황제가 탈법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팔두마차를 끌고온 마스터는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최대한 이목을 끌어, 제국의 귀족들과 접선해야만 된다.
주변 곳곳에 있는 마차들도 자신의 것보다 화려하진 못했다.
아마 저들 중 몇몇은 특급 경매에 초대받은 자들이리라.
다르칸 영지에서 경매가 열리기 전에 정보를 파악하려고 먼저 온 게 분명했다.
“플레이어 중엔 우리가 최초로 참가하는 거 맞지?”
“······ 닥쳐라.”
“아, 여기선 그 단어 말하면 안 되나?”
이곳은 제국이다.
제국은, 플레이어를 대놓고 꺼려한다.
아마도 사신교가 제국 어딘가에 뿌리를 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괜히 찍혀서 죽기 싫으면 입조심을 해야함이었다.
“하여간 대단하네. 제국 휘하 가문의 영지가 이 정도인데, 황실은 어떨까?”
황실이라.
상상도 가질 않았다.
하지만 만약 황실까지 닿을 수만 있다면, 모든 손해를 만회하고 더 높이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황금의 팔두마차는 이곳에서도 제법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제국시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마차가 천천히 걸었다.
‘마음껏 쳐다봐라. 이 마차를 준비하는데 삼천만 골드나 들어갔으니.’
물론 그 삼천만 골드는 흑요에게서 회수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시선을 만끽하며 마스터는 한껏 콧대가 올라가 있었다.
“뭐, 뭐야?”
“히드라곤?”
“괴물이 어떻게 워프를······!”
그때, 워프의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괴물 하나가 워프를 넘어서 있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으로 넘어오는 워프는 철저하게 감시, 감독된다.
강력한 제국의 기사들이 직접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넘어서 괴물이 워프를 타고 넘어왔다?
백 번 양보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히드라곤이 아닌데?”
“······ 히드라곤의 혼으로 소환한 히드라곤이다.”
미친.
히드라곤의 혼이라니!
그라시아가 판게니아와 지구를 다 돌면서 찾고 있는 물건 아니던가.
허나 확신했다.
뿔이 달려있긴 했지만 저토록 이질감없는 히드라곤은, 히드라곤의 혼으로 소환된 개체 말곤 없었다.
대체 누가?
어떤 간 큰놈이 히드라곤의 혼을 소환해 다르칸 영지를 밟은 거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히드라곤을 소환하고 그 뒤에 마차를 달아서 올 생각은 못할 텐데.
“정지!”
“멈추십시오!”
더욱이 놀라운 건 병사들의 태도다.
곧장 공격해도 부족할 판국에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골통파괴자’······?”
“저거 거인족 전용무기 아니야?”
남자가 든 무기가 유독 눈에 익다.
골통파괴자.
분명히 거인족의 최고전사가 사용하는 검이다.
거인족 전용무기를, 인간으로 보이는 자가 착용하고 있었다.
“저 검은 염소 투구는 뭐야? 패션 한 번 끝내주네.”
흑요가 중얼거렸다.
쓰고 있는 투구는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거인족 전용무기인 골통파괴자를 든 강력한 전사임은 분명했다.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할까, 압도적이었다.
3m가 넘는 대검을 한손에 쥔 채 검은 염소의 탈을 쓰고 있었다.
상의는 아예 입지도 않았다.
완벽한 야생마의 몸매. 넋이 나갈 것만 같다.
“우리도 통과하는데 30분은 걸렸는데. 저걸 통과시킬까?”
“······ 통과 못하겠지.”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가 분명하다.
변신한 거인족이거나.
당연히 제국이 저 정체모를 자를 받아줄 리 없었다.
초대장을 든 자신들도 신원확인을 하고 통과하는데 30분이 걸리지 않았나.
하물며 제국 도심에 히드라곤을 끌고 왔다?
그걸 묵인할 리가.
“통과!”
“통과하십시오!”
“······ 뭐야.”
흑요가 어이없어 했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자, 그 즉시 통과된 것이다.
아무런 확인 절차도, 조치도 없이.
히드라곤을 앞세운 마차는 자유롭게 도시로 들어왔다.
주변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무력(武力)
“크게 의심은 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워프를 벗어난 허드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에 하나 통과를 못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계속하고 있었던 탓이다.
나는 그런 허드슨의 태도를 보며 피식 웃곤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완벽하게 넘어갔다.”
초청장을 보이자마자 통과했다는 건, 다르칸의 영주가 직접 승인했다는 의미.
허드슨을 백왕의 관계자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영지 내에서 책을 잡힐 일은 없었다.
“그나저나, 제 호위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 말을 놓도록.”
“······ 제가 감히 어찌.”
“다르칸 영지에 초대받은 사람은 너다. 나는 호위로 충분해.”
“노, 노력해보겠습니다.”
적응해야할 일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허드슨의 호위로 이곳에 참가했으니까.
“············ 저기.”
그때였다.
마차 안에서 불현듯 끼어든 음성.
고개를 돌리자, 멀뚱멀뚱 눈을 뜨고 양손에 창을 쥔 남자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는 중이었다.
“여, 여긴 제국 아닙니까? 제가 따라와도 되는 건가요?”
창술사 발테!
수련자의 산에서 주워온 부캐다.
장장 2년간 제한을 최대치로 올린 채, 혼돈 수련자 영역에서 창만 휘두르던 녀석.
외기의 개화에 성공한 캐릭터를 버리긴 아깝지 않나.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허드슨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허드슨 역시 발테가 나의 부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작,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조, 좋은 경험이요? 제가 도움이 될까요?”
미친 듯이 떨어대는 발테를 보고 시선을 돌려 허드슨과 눈을 맞췄다.
‘숙맥이군.’
‘숙맥이로군요.’
아무래도 창술사 캐릭터는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Lv. 10】
놀랍게도, 창술사 발테의 레벨은 10이었다.
모든 제한이 풀리자 본연의 레벨이 나타난 것이다.
레벨 7에 수련자의 산에 올랐는데 10이 되어있는 건 2년간 상당한 경험을 축적했음을 의미했다.
백왕의 딸과 매일 대련을 한 게 도움이 된 걸까?
정작 본인은 자신을 괴롭힌 게 백왕의 딸이라는 걸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듯했지만.
“저, 저의 형편없는 실력이 누가 되지 않을지요······.”
“너는 훌륭하다.”
“아, 아닙니다. 저따위가 어떻게.”
발테는 자신의 가치를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레벨 10에 외기를 개화한 창술사.
별을 먹어 초월할 압도적인 가능성을 지닌 예비 초월자나 다름이 없다.
만약 누군가가 발테의 잠재력을 알아차렸다면 어떻게든 데려가려 할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대기만성형의 인재다.
‘2년간 패배만 한 탓에 이런 성격이 되어버렸군.’
아리아한테 매번 쥐어터진 덕에 소심해진 듯싶었다.
물론, 그 외에도 내가 버려두고 간 게 결정적인 원인이었을 터다.
방치만 안 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테니.
‘묘하게 나사 하나 빠진 캐릭터만 만나는 기분이 드는데.’
판게니아를 플레이할 때의 나는 실험적으로 많은 캐릭터를 육성했다.
족히 수백 개의 캐릭터가 방치되었고 발테도 그중 하나일 따름이다.
이자벨라, 아이작, 발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씩 하자가 있어서 내버려 둔 캐릭터들을 계속 만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심혈을 기울여 키운 캐릭터는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빌헬름에게 별을 몰아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캐릭터가 초월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명란젓고난, 사람낚는어부, 뇌신강림.’
SP를 1만 포인트나 들여서 공들여 키운 검술의 대가, 명란젓코난을 계승한 후계 캐릭터.
명란젓고난.
녀석은 어디 있을까?
‘사람낚는어부’는 바다의 주인, 멸어(滅漁)도 낚는 낚시꾼이다.
‘뇌신강림’은 전격의 대마법사고······.
좋은 아이템을 전부 빼놔서 빌헬름에게 옮긴지라 빈껍데기긴 하지만, 초월하여 능력 자체는 출중했던 강력한 부캐들.
다 어디 간 걸까?
‘죽었나?’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소식을 들리게 만들 캐릭터들이다.
이 정도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정말 죽은 건가 싶었다.
“발테. 영주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마십시오. 영주님께서 훌륭하다면, 훌륭한 겁니다. 따라 하십시오. 나는 훌륭하다.”
“예, 옙. 나는 훌륭하다.”
“좋습니다. 영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항상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잊지 않겠습니다.”
허드슨이 발테의 기강을 잡기 시작했다.
외기를 개화하는 데 도움을 준 게 나라는 걸 발테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재차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마차를 멈춰세운 허드슨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영주님. 출출한데 식사부터 하시죠?”
“여긴?”
“다르칸 영지에서 가장 비싼 음식점입니다. 제국의 귀족이나 도시의 주인들만 이용한다는군요.”
“들어가지.”
고개를 끄덕였다.
특급경매까진 시간이 꽤 남았다.
그 전에 미리 도착한 건 다르칸 영지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특급경매를 위해 제국의 귀족들과 다른 도시의 주인들도 대거 다르칸 영지에 들어왔을 터.
미리 그들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