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괴물의 격돌.
산이 무너지고, 전역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우, 우리를 풀어줘!”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고!”
혼비백산.
인간과 괴물 할 것 없이 모두가 혼란한 상태였다.
산을 점거했던 괴물병단도 락투샤가 밀리자 당황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락투샤를 돕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산을 오르는 수련자들이었다.
락투샤의 말대로 전체를 구류시켰지만 뒤에 혹을 단 채로 사흉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엔카사님. 저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 죽여라.”
괴물병단은 수련자들의 몰살을 택했다.
“아악!”
“사, 살려줘!”
결국, 수련자들을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엔카사. 락투샤를 따르는 최강의 검투사.
락투샤의 실력에 끌려 평생 그를 떠받들기로 맹세한 사자 얼굴의 수인이었다.
“지금부터 전원 락투샤님을 돕는다.”
“하, 하지만 상대는 사흉······!”
촤악!
괴물병단 중 한 명이 겁에 질려 입을 열자,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목이 잘려나갔다.
이후 엔카사가 황금빛 검기를 흩날리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겁에 질린 자가 더 있느냐?”
“······.”
있을 리가 없었다.
엔카사가 고개를 돌렸다.
락투샤는 수련자들을 구류시키라고 했지만, 구류 시킬 수련자가 없으니 명령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음?’
주변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기척.
엔카사가 시선을 돌리자, 누군가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산의 상층부에 있던 수련자나 수행자일까?
“인간이 들쳐매고 있는 게 백왕의 딸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분명히 백왕의 딸입니다.”
백왕의 딸과 웬 남자를 들쳐맨 인간이었다.
엔카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치려했군.’
그러나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정면에서 딱 마주쳤으니.
락투샤를 도울 때 돕더라도, 원래의 목표였던 백왕의 딸 역시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엔카사 부대장님. 당장 죽이고 빼앗죠.”
“······ 잠깐.”
일만에 달하는 괴물병단.
고작 인간 한 명 죽이는 거야 일도 아니다.
헌데, 왜일까.
뭔가 이상하다.
굉장히 찝찝했다.
이윽고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 산의 정상에서 저 저주를 뚫고 멀쩡하게 내려왔다고?’
산의 정상, 사흉과 락투샤가 전투를 벌이는 곳.
그곳에서 내려온 게 분명할텐데 저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락투샤조차 바알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건만.
심지어.
“비켜라.”
“······.”
뭐지, 이 당당함은?
1만의 대군을 앞에 두고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도리어 죽기 싫으면 비키라는 듯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엔카사가 자신의 갈기와 같은 황금빛의 검기를 일으켰다.
찝찝한 놈이지만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빠르게 죽여서, 빼앗······.
후우우우웅!
그 순간이었다.
인간의 전신에서 더욱이 찬란한 황금의 기운이 떠올랐다.
기운은 이내 실타레처럼 엮이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바로, 검.
‘저, 저건······!’
꿀꺽!
엔카사가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건 검기가 아니다.
단순한 검기였다면 이처럼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기운을 검에 씌울 뿐인 검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저건.
저건······.
‘검강·········!’
검기를 실처럼 엮어,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기술.
착각할 리 없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검강이 바로 저것이었으니!
허나, 락투샤도 펼칠 수 없는 게 검강의 영역이다.
엔카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짜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다. 이 압박감이 결코 거짓일 리 없었다.
“부대장님?”
부하들은 의아해하고 있다.
저 검강의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오오오오오오!
쾅! 쾅! 콰르릉!
사흉의 소리가 더 크게 퍼져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락투샤는 크게 밀리는 와중이었다.
사흉의 공격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리라.
“······ 비켜줘라.”
“부, 부대장님?”
“우리는 락투샤님을 돕는다.”
저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을 상대하려 들었다간 락투샤는 죽고 말 터.
게다가 백왕의 딸보단 락투샤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자신들 전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락투샤 하나를 살리는 게 훨씬 의미있었다.
*
용병 호아킨과 숀, 말리부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대, 대장. 이거 담력훈련 아니죠? 저거 다 진짜죠?”
“이제 진짜로 도망쳐야할 것 같은데요?”
동료 부하들의 물음에 호아킨은 워프를 바라봤다.
수련자의 산으로 락투샤를 비롯한 괴물병단이 넘어가더니, 머지않아 갑자기 사흉이 등장했다.
워프가 타오르며 보이는 내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정도면 그 남자도 분명히 죽었을 거라니까요!”
“사, 사흉이라니, 미친 거 아닙니까 진짜?”
확실히 저 정도 소란이면 남자는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남자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사흉과 락투샤의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호아킨이 작게 혀를 찼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금쯤 용병도시도 난리가 났을 테니까.
“잠깐.”
그때 불현 듯 저 멀리서 보이는 인영이 있었다.
워프 가까이로 다가온 인영은 바로 자신들을 고용한 남자였다.
“고용주님?”
저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온 걸까?
게다가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분명히 들어갈 땐 두 명이었는데, 나올 땐 네 명이었다.
“한 명씩 업어라.”
“예?”
“한 명씩 업고 이곳을 벗어난다. 최대한 멀리. 머지않아 워프가 터질 거다.”
“아······!”
워프가 터진다.
말인 즉, 이 땅이 심연에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심연에 가라앉으면 그때부턴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
‘미친!’
살려거든, 땀띠나도록 뛰어야 했다.
*
사흉의 등장으로 인해 워프가 망가졌다.
텔레포트 북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냥 무작정 뛰는 것뿐이다.
다음 도시와 연결된 워프가 있는 곳까지 말이다.
‘세아 이 녀석은 대체 왜 기절해 있는 거지?’
세아 성녀도 발견해서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워프 부근에서 기절해있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살아야했다.
용병 호아킨의 안내를 받으며 기적적으로 용병도시 카르텔의 워프를 통과하였다.
“헉! 헉! 커허헉!”
“허억! 허억!”
진땀나는 상황이다.
동시에.
쿠우우우웅.
워프가 들썩인다.
곧이어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워프가 정전이 되듯 까맣게 물들었다.
“······ 워프, 가라앉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역 전체가 잠겼다.
용병들은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뻔했으니까.
‘역시 역부족이었나보군.’
락투샤와 괴물병단만으로는 사흉을 막기 역부족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사흉의 제거 자체는 실패한 듯싶다.
“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숀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될까.
확실한 건 사흉은 죽지 않았다.
사흉이 죽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다른 영역을 침략할 것이다.
아마도 이곳 카르텔을 포함한 다섯 중립 도시 중 한 곳을.
막으면 다행이지만, 못 막으면 재앙이다.
몇 개의 도시가, 왕국이 파괴될지 모른다.
‘백왕의 딸이 책을 넘겼지.’
괴물병단을 마주하며 백호의 수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백왕의 딸이었다.
헌데 그녀가 재차 기절하기 전에 나한테 책 한 권을 건넸었다.
나는 품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검선일기.’
검선일기라 이름 적힌 책.
동시에.
《검선의 안배를 깨우쳤습니다.》
《‘사흉 바알’을 제어하기 위해선 ‘검선일기’와 ‘바알 투구’, ‘바알 갑옷’, ‘바알 탈리스만’이 필요합니다.》
《‘사흉 바알’을 제어하기 위한 준비 중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바알 갑옷’의 위치가 서책에 표시됩니다.》
책의 위로 지도가 나타났다.
그 사이에 있는 붉은 점.
‘제국.’
분명히 아르혼 제국의 어딘가다.
바알 갑옷이 저곳에 있다는 말이다.
갑옷만 구하면 사흉 바알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걸까?
헌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메인퀘스트 7 : 수련자의 산에서 숙련도 레벨 15 달성하기’를 완료했습니다.》
《내용을 정산합니다.》
수련자의 산을 완전하게 벗어나자, 메인 퀘스트 7이 종료되며 정산이 시작되었다.
끝나지 않는 정산
넓은 회의실.
자그마치 서른 명의 ‘지배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각 도시를 대표하는 주인이며 막강한 권력과 권한을 지닌 최강자들.
수련자의 산과 이어진 다섯 도시와, 그 도시와 연결된 스물다섯 도시의 지배자들이 지금 이 회의실에 모여있는 것이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모두가 지배자의 신비를 두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날 선 말을 나누며 작금의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워프를 끊고 단교하겠다고?”
용병도시 카르텔의 주인, ‘붉은 삵 제라프’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다른 도시의 주인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어댔다.
“사흉이 다음으로 노릴 건 ‘수련자의 산’과 연관된 다섯 도시 중 한 곳일 터.”
“단순히 워프가 이어져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까지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않소?”
“음. 제라프, 대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다.”
힘을 합쳐 대비해도 모자란 판국에 워프를 끊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워프를 끊는다는 건 단교를 뜻했다.
도시 간의 왕래 자체를 없애고, 동맹을 파기하겠다는 의미다.
이유는 하나.
사흉의 침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쿵!
제라프가 원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도저히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싫다.
도시 간에 이어진 워프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워프가 이어진 도시끼리는 암묵적인 동맹으로 간주가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최소 세 개의 워프를 잇지 않으면 도시는 심연에 가라앉는 탓이다.
“워프를 모두 끊으면! 카르텔을 심연에 처박겠다는 말이오?”
“그대들 중립 도시끼리 이으면 되지 않나.”
“음. 다섯 도시가 이어지면 심연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제라프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해결하라는 말인가?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다섯 중립 도시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라?”
“꼭 그런 말이 아니라··· 제국이나 여신교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커험. 용병이라서 그런가 너무 극단적이군.”
그들의 의도는 간단했다.
수련자의 산과 연결된 다섯 도시가 힘을 합쳐 알아서 사흉을 막으라는 게다.
설령 실패해도, 이어진 다섯 도시가 함락되면 사흉의 힘도 상당히 빠지게 될 것이었다.
중립 도시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뻔한 의도를 제라프가 모를 리 만무했다.
“다섯 도시가 함락되면, 그대로 끝날 것 같나? 워프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사흉이 침략하지 않을 것 같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이미 수련자의 산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사흉은 ‘심연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것도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흉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면 어차피 워프가 이어지지 않아도 마음대로 침략할 수 있소. 게다가 저 괴물은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파괴자요. 대비하려 해도 대비할 수 없어질 테니, 나중에 막으려면 이미 늦다는 걸 진정 모른단 말인가?”
제라프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면 무작위 도시가 침식당한다.
침식당한 순간 이어져 있는 도시들 역시 침략의 대상이 된다.
대비할 수 없고, 도리어 더 힘겨워질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