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창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강해져 갔다.
순식간에 자신을 따라잡고 넘어서서 검기를 피워냈다.
‘······ 또 다른 천재인가.’
매번 자신을 꺾은 천재와 같은 부류다.
또다시 자신의 노력을 비웃을 자가 나타난 것이다.
몇 년을 노력해도 천재는 고작 한순간에 뛰어넘어버리니까.
자신이 아무리 발악해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을 농담처럼 닿아버린다.
도리어 시시하다고, 이딴 걸 왜 넘지 못하느냐고 범재나 둔재의 느림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가고 싶어도 따라갈 수 없는, 남겨진 자의 설움 따윈 천재들은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리라.
한껏 코웃음 치며 손가락질이나 할 테지.
-보여봐라.
-너의 한계를, 내게 보여 보아라.
그런데 이자는, 다른 천재와는 달랐다.
계속해서 자신의 창을 받아내고 있었다.
압도하지도, 그렇다고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실력을, 발테가 갈고 닦은 창술을 탐미하는 것이다.
‘···오냐, 보여주마.’
의식이 피어나며 오기가 생겼다.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한계를 단정 짓기도 싫었다.
사력을 다해, 연격을 펼쳤다.
창을 쥔 손이 부르트고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휘둘렀다.
그는 발테의 창이 더 멀리 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지루해하지 않고, 혀를 차지 않으며, 진지하게 전체를 봐주고 있었다.
마치 스승이라도 되는 양.
그리하여 모든 걸 불살랐을 때.
‘아······.’
어느덧, 자신의 창에 외기가 덧씌워져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선명한 기운의 느낌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했던 영역이건만.
툭!
누군가가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렸다.
그다.
천재이자,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존재.
무의식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을 꺼내준 은인.
‘아.’
동시에 발테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전신이 쇳덩이처럼 무겁다.
두 눈이 절로 감겼다.
그러나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낀 게 얼마 만일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이런 거였던가······.’
어쩌면 그저,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노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그 한 마디가 가장 절실했던 게 아닐까.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발테는 보이지 않는 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전신이 비명을 내질렀다.
‘세아 성녀가 없다는 걸 간과했군.’
치료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몸을 굴렸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
하지만 여기서부턴 혼자 올라가야만 한다.
‘이 위는 선계다.’
외기의 영역에 들어선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산의 부분. 그곳을 ‘선계’라고 불렀다.
그리고 선계에 오르면 20레벨 이상의 숙련도 수련이 조금 더 쉬워진다.
나는 쓰러진 창술사를 뒤로한 채 산을 올랐다.
‘따라오는 시선이 있다.’
혼돈 수련자 영역을 벗어날 때부터, 뒤에 붙은 시선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다.
당장의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선이 범상치 않다.
숨기지 않고 대놓고 드러내는 걸 보면 상대는 나라는 인간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적의는 없지만 호기는 있다. 싸우고 싶지만 참고 있다. 내가 더 강해지길 기다리는 건가?’
높은 확률로 그런 것 같다.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가려는 곳까지 따라오진 못할 테니까.
‘역시 있었군.’
내 목적은 선계이되 선계가 아니다.
선계에 존재하는 숨겨진 길.
【히든 특성 ‘돌연변이’가 숨겨진 길을 밝힙니다.】
【‘수련의 신전’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렸다.
*
“저, 저거······!”
수행자가 기겁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선계에 오른 남자가 갑자기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급히 벼랑으로 다가가 아래를 확인했지만, 남자는 온데간데 사라져있었다.
“아, 아리아님!”
문제는 아리아 역시 벼랑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뛰어내린 아리아는 어느덧 수행자의 옆에 있었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곳은 선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곳.
“······ 뛰어내려봤자 이렇게 다시 돌아와야 정상인데,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
아리아도 의문이었다.
선계는 정해진 길 외엔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길이 이탈하면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벼랑에 뛰어내린 남자가 사라졌다.
반면에 같은 장소에서 뛰어내린 아리아는 되돌아왔다.
‘어디로 간 거지?’
자신과 같은 천재.
이 고독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감해줄 존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약했다.
찬란한 재능을 지녔으나 성장 중이었다.
산을 오르며 조금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산의 정상에 올라 어느정도 완성되거든 붙어볼 작정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1년간 정체되어있었던 자신의 실력이 진일보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헌데, 사라졌다.
마치 유령처럼.
······ 이 묘한 상실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다시 돌아오겠지.’
자신과 같은 부류라면 반드시 정상의 정복을 원할 터.
중간에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만나게 되거든, 그땐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아리아가 벼랑 아래를 흘끗 쳐다보곤 정상으로 향했다.
*
《최초로 ‘수련의 신전’에 입장했습니다.》
《신전의 효과로 제약이 사라집니다.》
《명예가 50 상승합니다.》
눈을 뜨자, 신전이었다.
‘진짜로 제약이 사라졌군.’
더욱이 놀라운 건 수련자의 산을 오르며 설정한 제약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시야가 보이고 온 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수련자의 산보다 이 신전이 더 상위에 있기 때문일까?
‘제약을 사라지게 한 이유가 있겠지.’
허나 안심해선 안 된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척이나 오래된 듯 곳곳이 낡고 부식되어 있었지만 주변에 남아있는 신전의 상징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여긴 바알의 신전이다.’
검은 염소의 조각들.
틀림없이 사흉 중 하나인 바알이다.
하지만 ‘수련의 신전’이 어떻게 ‘바알의 신전’일 수 있는 걸까?
‘바알이 수련했던 장소이거나, 후대를 위해 남겨둔 장소 같은데.’
애초에 인간의 수련을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든 특성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결코 침입이 불가했을 장소 말이다.
바알 자신이 수련을 위해 지은 장소가 틀림없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저주받은 기천석】
거대한 바위. 높이만 5m에 이르는 기천석!
오직 검기로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특수한 재질의 바위다.
저 정도 크기는 처음보지만.
《‘저주받은 기천석’은 오직 저주와 외기를 동시에 사용해야만 반응합니다.》
《일천번을 때려야 1mm의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저주받은 기천석’을 타격에 성공하면 저주와 외기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저주받은 기천석’을 파괴할 시 ‘바알’이 남겨둔 대량의 숙련도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딴걸 수련이랍시고 준비할 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흉 바알밖엔 없다.
저주와 외기를 동시에 사용해 천 번을 때려야 고작 1mm가 파인다니.
저 기천석을 부수려면 수억번은 때려야할 터.
혼자서 바위 하나를 수억 번 때리려면 몇 년이 걸려도 부족하다.
평생을 저 바위 하나만 부수고 있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외기의 숙련도 상승!’
20레벨을 넘어서야 발현할 수 있는 외기.
그 외기의 숙련도가 올라간다는 건, 검의 숙련도가 올라간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20부터는 오직 검기의 영연인 탓이다.
‘게다가 부수면 대량의 숙련도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
얼마나 대량인지는 몰라도 바알이 남겨뒀다면 그 양이 결코 적지는 않을 터.
혼자서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쩌업!
시체 까마귀의 핵을 삼키자 전신이 부풀며 모습을 달리했다.
그리고.
까악! 까악!
까아아악!
백여마리가 넘는 시체 까마귀가 순식간에 소환되었다.
혼자서 천 번을 때리면 한 세월이지만,
백 마리가 넘는 시체 까마귀가 동시에 때린다면 시간은 대폭 단축되리라.
단순히 백 배 빨라지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바알 투구로 궁극진화한 게 여기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소환된 시체 까마귀들은 기본적으로 저주계열인데다, 내가 사용하는 스킬 따위를 흉내낼 수 있었다.
외기 역시 마찬가지.
게임상에선 검기도 스킬의 한종류로 분류됐었으니까.
‘이거 완전히 나를 위한 안배로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외기의 수련을 이런 식으로 하게 해두다니.
사흉이라 불리던 괴물이라 그런지 발상 자체가 다르다.
나를 위해 바알이 남겨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까아악!
곧이어 저주와 미약한 외기를 품은 시체 까마귀 떼가 바위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
《외기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검 숙련도 레벨이 21로 올랐습니다.》
《‘상급 시체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이 11을 달성했습니다.》
까악!
까아악!
까아아아악!
시간이 지날수록 시체 까마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벌써 200여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 까마귀가 늘어날수록, 기천석에 균열이 생기는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었다.
쩌어억!
쉴 새 없이 저주받은 기천석을 쪼아대자 곧이어 기천석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쿵!
머지않아 저주받은 기천석이 정확히 반으로 나뉘었다.
그 순간.
《‘저주받은 기천석’을 파괴했습니다.》
《‘바알’이 남긴 대량의 숙련도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검 숙련도 25Lv을 달성했습니다.》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거절합니다.》
《더 높은 숙련도 레벨에 도전합니다.》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기천석의 바위 안에서 ‘바알 탈리스만’을 발견했습니다.》
“······.”
파멸적인 옵션
예상을 넘어서는 보상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바알이 남긴 대량의 숙련도 경험치로 순식간에 검 숙련도가 25레벨에 이른 탓이다.
이만한 ‘초고속 성장’은 나 역시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아니, 이건 초고속을 넘어 버그 수준의 성장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바위 하나에 20에서 25레벨이 됐다.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직접 경험한 나도 믿기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불신할 게 당연하다.
고작 단단한 바위 하나.
누군가는 절차탁마의 마음으로 쉬지 않고 노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걸 한순간에 넘어섰다.
‘백성전의 성좌들도 놀랍긴 매한가지일 터.’
얼마나 놀라우면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좌 열일곱이 갈려 나간 이후 내게 시선을 주길 꺼리는 기색이 느껴졌음에도, 이 버그 수준의 성장은 도저히 안 지켜볼 수가 없는 것이다.
‘숙련도 경험치를 보상으로 주는 경우는 그간 없었지.’
한 번도 없다.
일반적으로 ‘대량의 경험치’를 준 적은 몇 차례 있지만, 레벨업을 위한 필요경험치이지 숙련도 경험치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다.
하여 처음 기천석의 설명을 보았을 때 고개가 약간 갸웃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바알이 직접 남겨두었다······. 보상이 아니라, 계승을 위해서.’
어쩌면 저주받은 기천석에 남겨진 저 숙련도 경험치는 보상의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바알이 자신의 ‘숙련도’를 후계자에게 ‘계승’하고자 남겨둔 게 아닐는지.
그렇다면 나는 허락받지 않은 손님인 셈이다.
‘바알 탈리스만.’
바알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저주받은 기천석을 깨거든 바알 탈리스만도 자동으로 건질 수 있게끔 안배를 해놨으니까.
의도는 알겠다.
아마 바알은 자신의 후계자가 ‘온갖 개고생’ 끝에 기천석을 부수고, 숙련도 경험치와 함께 탈리스만을 가져가길 바랐을 것이다.
내가 기천석을 부수는 방식을 바알이 봤다면 뒷목잡고 쓰러지지 않았을까.
“운이 좋군.”
어쨌든, 운이 좋았다.
그야 수련자의 산에 숨겨진 장소가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바알 탈리스만을 여기서 구할 줄은.
바위틈에서 작게 빛나는 정수를 손에 쥐었다.
둥근 구슬과도 같은 형태.
흑진주의 느낌을 주는 이게 바알 탈리스만이었다.
‘영롱하기 그지없구나.’
작게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