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었어? 새로 입산한 수련자 중에 제약을 최대치로 설정했다는 인간이 있다는 얘기.”
“정신나간 놈들이 가끔 들어오곤 하지.”
“아무리 그래도 최대치는 2년 전에 그 ‘창잡이’말고는 살아남은 자가 없지 않나?”
산의 중턱.
갖은 종류의 수인들이 절벽의 바위 위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리아, 어떻게 생각해?”
“······.”
“아, 맞다. 너도 제약으로 말 못했지?”
“······.”
백호의 가죽을 뒤집어쓴 수인, 아리아가 관심없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은커녕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좌선수행 중이었으니.
‘무(武)에는 끝이 없다. 극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무를 탐하고 탐할뿐. 진정한 무의 앞에서 나는 아직 너무나도 초라하다.’
스스로를 깨닫는 수행.
자신만의 무를 찾아 아버지를 넘어서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벽에 막혀있었다.
숙련도 레벨이 정체한지 벌써 1년.
‘이곳에는 나의 적이 없다. 그게 내가 정체한 이유.’
물론 뭐가 문제인지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었다.
적이 없다는 것.
그녀의 호승심을 불지를 존재가 이 산에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산만이 아니라 세상 어딜 가도 그녀가 호승심을 느낄 존재는 없을 테니까.
천재를 넘어선 천재.
언젠가 백왕을 뛰어넘을 기량을 지닌 불세출의 천재가 바로 그녀였으므로.
창잡이
“마스터, 메인 퀘스트 7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이네?”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에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 내가 관심이 있든 없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흑요?”
구미호 흑요.
7영웅 중 일인인 그녀가 정장 차림을 한 채 선글라스를 내리곤 눈웃음을 지었다.
“실은 재밌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자랑하던 암살단이 모조리 죽어버렸다고. 그것도 팬텀을 노리다가.”
“어디서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지껄이는 것이라면, 좋은 말 할 때 꺼져라.”
철저하게 함구시켰는데 이야기가 새어나간 모양이다.
아니, 아니다.
자신의 부하들이 그럴 리는 없다.
필시 저 구미호년이 매혹의 구슬로 수작을 부린 것이리라.
“무섭다~ 내가 가져온 정보는 안 듣고 싶나 보네?”
“그래 봤자 쓸모없는 것이겠지.”
“흑왕과 관련된 정보인데도?”
흑왕.
백왕에 견주는 존재.
백왕이 언급되면 항상 함께 언급되는 괴물이었다.
당연히 흑왕의 정보라면 부르는 게 값.
“······ 앉아라.”
쯧. 마스터는 작게 혀를 찼다.
흑요가 간혹 물어다 주는 정보는 진짜였으니까.
정보를 취급하는 데 있어서 그녀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흑왕의 세력이 수련자의 산에 모여들고 있어.”
사뿐하게 자리에 앉은 흑요가 운을 뗐다.
“이유는?”
“백왕의 딸이 수련자의 산에 있어서?”
마스터가 미간을 구겼다.
“오랜 시간 잠잠하던 흑왕이 갑자기 백왕의 딸을 노린다고? 그랬다간 전쟁이 벌어질 텐데.”
그랬다간 흑왕과 백왕의 전면전이 펼쳐질 것이다.
걷잡을 수 없다.
중간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가 불타오르리라.
하지만, 백왕과 흑왕은 20년 전 한 차례 싸운 뒤로 계속 평화상태였다.
무승부. 도저히 싸움이 끝이 나지 않는 탓에.
흑요가 두 눈을 빛냈다.
“백왕을 죽일 수 있는 ‘비밀무기’라도 얻은 게 아닐까?”
“그런 게 있다 치더라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우리 헛똑똑이 마스터. 잘 생각해봐. 이건 흑왕 쪽에 붙을 절호의 기회라구.”
“설마 백왕의 딸을 납치해서 흑왕에게 내어주자는 소리냐?”
흑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는 들었다.
혹시나싶었는데, 그 혹시나가 사람을 잡았다.
말인즉슨, 흑왕을 등에 업고 백왕을 적으로 돌리자는 뜻.
마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진행한들 수련자의 산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 들어간다 하더라도, 백왕의 딸이라면 그만한 강자일진대. 납치할 방법은 더더욱 없어.”
“들어갈 사람이야 구하면 되지. 플레이어만 들어갈 수 있는 산은 아니잖아? 용병이 됐든, 모험가가 됐든, 부랑자가 됐든, 구하려면 충분히 구할 수 있어.”
······ 그건 그렇다.
골드만 충분히 지급하면 수련자의 산에 들어가려는 판게니아인은 넘치고 넘쳤다.
하지만 마스터의 방식은 아니다.
마스터는 자신을 따르는 자가 아니면 기용하지 않으므로.
“백왕의 딸이더라도 레벨 자체는 낮을 거야. 내 능력 알지?”
“그럼 네가 혼자서 진행하면 될 일 아니냐.”
“마스터. 내가 왜 너를 찾아왔겠어?”
“······ 돈을 달라는 소리군.”
“역시! 척하면 척이라니까. 진행비 2천만 골드. 추가로 내 수고비 3천만 골드.”
도합 5천만 골드.
앞으로 있을 특급경매를 대비하는데 5천만 골드가 나간다면 타격이 크다.
“날강도 같은 년. 그래서 내가 얻는 건?”
“팬텀의 정보. 그리고 흑왕의 보은? 네 이름도 특별히 얹어줄게.”
“팬텀의 정보를 네가 캐낼 수 있다고 보는 거냐?”
흑요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수련자의 산에 있을 거 아니야? 팬텀이라면 눈에 띌 텐데.”
“놈을 만만하게 보면 큰코다칠 거다.”
흑요가 입술을 훑으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스터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아아~ 그래서 가만히 놔두고 있었구나? 겁먹어서?”
마스터의 표정에 살기가 스쳤다.
“······ 뭐, 라고?”
“괜히 건드렸다가 또 된통 당할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야?”
팬텀을 건드렸다가 잃은 게 많다.
본전은커녕 계속해서 손해만 보고 있었다.
그제야 흑요도 왜 마스터가 수련자의 산을 노리지 않은 건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스터의 성격이었다면 자신이 말한 방법 외에도 다른 수를 구해서 진즉에 인력을 투입했을 터.
········· 마스터는, 겁을 먹은 것이다.
자신이 쌓아 올린 제국이 무너질까 봐.
“한 마디만 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네년의 혀를 잘라주마.”
“워워. 진정해. 그보단 팬텀이 이번 전당에 톱(Top)에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나 얘기해보자구.”
흑요가 급히 주제를 바꿨다.
짧게 심호흡한 마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 못 오를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해?”
“클래스마다 주어지는 맥스 레벨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팬텀이 특별한 클래스를 얻었다면?”
“그래봤자 24레벨 전후겠지.”
“1등이 그라시아, 24레벨이던가?”
“그래. 설령 더 높은 격의 클래스를 얻었더라도 24레벨 이상은 힘들 것이다.”
검성 클래스의 숙련도 최대레벨이 24라고 알려졌다.
만에 하나 그 이상의 클래스를 얻었다고 한들, 수련자의 산에서 25레벨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팬텀이 숙련도 보정을 안 맞추고 들어갔을까?”
“숙련도 상승률 1,000%를 찍어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25레벨은 절대로 찍을 수 없어.”
19레벨부터 숙련도의 필요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20을 찍는 것도 어렵지만 24레벨에서 25레벨로 가는 길은 지옥 그 자체다.
수련자의 산에서 찍을 수 있는 한계 레벨은 24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팬텀도 1등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흑요라는 변수가 생긴 이상 더더욱 요원해지리라.
*
《‘용암 수련자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근원의 불’로 인해 화염저항이 대폭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16Lv로 상승했습니다.》
《업적 ‘지치지 않는 수련자’를 달성했습니다.》
《명예 40이 상승합니다.》
연기가 자욱한 땅.
바로 아래 용암이 흐르는 ‘용암 수련자의 영역’에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수련자의 산은 오를수록 난이도가 상승하며, 더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을 밀어붙여야만 숙련도를 고레벨까지 올릴 수 있게끔 설계되어있다.
“······ 괴물이냐?”
지켜보던 수행자는 도저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수련자는 불과 3일만에 산의 중턱에 올랐다.
뿐만아니라 1분 1초도 쉰 적이 없다.
물론 3일만에 산의 중턱을 돌파한 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처음에 입산했을 땐 형편없었건만.’
하지만 그들은 전부 어느정도 ‘완성된 뒤’ 산에 오른 자들이었다.
그것도 한계 제한 없이.
반면 눈앞의 남자는 아니지 않나.
한계 제한 최대치 설정, 숙련도 레벨도 형편없었다.
쏴아아아!
힐을 받더라도 피로는 누적될텐데.
저 수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앞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무섭지 않은건가?’
시야는 진즉에 사라졌을 터였다.
뿐만인가.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이 사라졌을 것이었다.
오로지 고통만이 느껴지고 있으리라.
생명체라면 모두가 공포스러워 해야할 상황.
그런데,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를 자의로 억누르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도리어 적응한 채 사라진 감각을 상상으로 대체하는 수준이다.
이런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기에 수행자는 할 말을 잃었다.
《검 숙련도가 17Lv로 상승했습니다.》
숙련도 레벨이 또 올랐다.
16이 된지 반나절만에.
남자의 숙련도 레벨을 확인한 수행자는 경악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누군가는 한 달을, 누군가는 반 년을 수련해도 닿지 못하는 레벨.
그것을 고작 3일만에 달성했다면 그 누가 믿을까.
자신조차 믿지 못할 것이다.
남자는 이내 용암 지대를 벗어났다.
그리곤 더 높은 영역에 있는 지대.
《‘폭풍 수련자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근원의 바람’로 인해 바람저항이 대폭 상승합니다.》
《업적 ‘멈추지 않는 수련자’를 달성했습니다.》
《명예 50이 상승합니다.》
폭풍 수련자의 영역에까지 들어섰다.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어서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기 힘든 곳.
자칫 잘못하여 날아갔다간 그대로 즉사할 가능성이 높은 장소.
중턱에 존재하는, 가장 까다롭다 전해지는 ‘사속성의 땅’ 중 하나!
‘여기는 조금 힘들 거다.’
검의 자유를 잃기에 여태껏 건너온 다른 영역과는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다.
허나, 이 또한 오산이었다.
쉭! 쉬이익!
그는 바람의 결을 따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바람을 읽고, 바람의 저항을 분쇄한 채로.
《검 숙련도가 18Lv로 상승했습니다.》
······ 고작 하루.
숙련도 레벨을 올린 뒤 영역을 벗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심해 수련자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근원의 물’로 인해 물저항이 대폭 상승합니다.》
《업적 ‘한계에 도전하는 수련자’를 달성했습니다.》
《명예 50이 상승합니다.》
결국,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
히든 특성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
그를 통해 진화한 속성들로 인해 내 속성 저항력은 미칠 듯이 뛰어있었다.
수련자의 산에서 가장 어려운 난관이라 전해지는 ‘사속성 영역’을 손쉽게 돌파할 수 있었던 이유다.
‘19레벨까진 사속성 수련자 영역에서 올리는 게 정석이지.’
보이지 않는다.
냄새도, 소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확신하며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히든 특성 돌연변이.’
돌연변이로 말미암아 눈을 감아도 길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레이더에 점처럼 표시되듯 단순히 ‘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만하면 산을 오르는 데에는 충분했다.
《검 숙련도가 19Lv로 상승했습니다.》
《‘사속성 수련자 영역’을 모두 돌파했습니다.》
《업적 ‘속성 영역의 끝을 본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명예 100이 상승합니다.》
《경악스러운 성장 속도에 백성전의 새로운 성좌들이 눈을 크게 뜹니다.》
《세 명의 성좌가 사도 계약을 제안합니다.》
본래 영역을 돌파한다고 업적을 달성하는 일은 없다.
허나 제한을 최대치로 해서인지 추가되는 업적이 있었다.
나는 산을 올랐다.
《다음 수련자 영역부턴 수행자가 조언을 줄 수 없습니다.》
《수련자의 특성에 따라 이동되는 영역에 차이가 있습니다.》
《다음 수련자 영역에 도전합니다.》
《‘혼돈 수련자 영역(10)’에 들어섰습니다.》
지체없이 땅을 밟자, 주변의 모든 게 변했다.
혼돈 수련자 영역.
옆에는 수행자도, 세아 성녀도 없다.
이곳은 오로지 혼자서 나아가야하는 구간이었다.
스으읏!
촤르륵!
차창!
허나, 곧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이곳은 혼돈 수련자 영역 중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곳.
제한을 최대치로 설정하고, 숙련도 레벨을 어느정도 달성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헌데, 나 말고 이미 도착한 누군가가 있다.
사람일까?
아니면 이 영역이 나를 위해 준비한 시련인지.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돌연변이를 통해 파악한 바를 내 나름대로 정의할 순 있었다.
‘창잡이?’
묘하게 끝이 뾰족한 느낌.
움직임과 미세한 동작을 통해 상대가 창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움직임은 생각보다 빠르진 않다.
나와 같이 제한을 최대치로 설정한 자가 분명했다.
허나 생각할 여유가 길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