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도시와 연결된 워프를 찾아내어, 빠르게 정복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백왕이 끼어들었다.
공식적으로 모든 도시에 선포한 것이다.
건들면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미친놈이 따로없지만 상대는 백왕이었다.
백왕이라면, 저런 말을 해도 된다.
“젠장. 백왕의 세력이었을 줄이야.”
마스터가 혀를 찼다.
팬텀 란돌프가 아니라 백왕 산하의 오주력이라니.
동명이인일 순 있다지만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힌다.
“혹시 팬텀이 외형변경이라도 한 건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종 자체를 바꾸는 게 아닌 이상.”
단순히 외형만 괴물로 바꾼다고 그걸 못 알아볼 백왕이 아니다.
백왕은 미래시를 지녔다고 알려져있다.
먼 미래까지 일어날 일을 보는 자가 인간을 못 알아볼 리가.
하물며 메두사는 어떤가.
고로, 외형만 바꾸는 것으로는 오주력의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진짜 동명이인이다? 이름만 같은 거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종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스킬이나 아이템이 있나?”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으로도 종족을 바꾸진 못하니 없지 않겠습니까?”
“히든 특성이라면?”
히든 특성.
현재까지 밝혀진 것들 중에 종과 관련된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을 떠올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식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대식가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대식가는 가장 쓸모없는 히든 특성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괴물의 특성을 지니게는 해주지만 독과 정신오염으로 절대로 숙주가 살 수 없다고······.”
“상대는 팬텀이다. 팬텀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초월자의 신체로도 버틸 수 없다 결론난 것을 아무리 팬텀이라한들 방법이 있겠습니까?”
대식가는 신체변형과 괴물의 특질을 갖게 해주는 히든 특성이다.
하지만 제약이 너무나도 심하여 그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쓰레기 히든 특성’이었다.
모든 히든 특성 중에서도 가장 쓸모가 없는.
남자가 첨언했다.
“그리고 대식가로도 종 자체를 바꿀 순 없습니다. 괴물의 특징을 몇 가지 갖게 해주는 정도지요.”
“······ 그래. 그랬었지.”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로 이름만 같은 건가?
수십, 수백 번을 시험한 내용이다.
이 내용이 틀릴 리는 없었다.
대식가는 확실하게 쓰레기 히든 특성이라고 결론이 났다.
마스터가 미간을 문질렀다.
“가뜩이나 김하나 그년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경고를 보낼까요?”
“아니. 놔둬라. 암살대도 새로 정비해야하니, 적당히 기사자체를 묻어버릴 수밖에.”
암살대 전원이 란돌프에게 향했다가 심연에 묻혔다.
뼈아픈 손실.
아직 그 손실을 복구하지 못한 상황.
그러다가 불현 듯 난 생각에 마스터가 말했다.
“제국에서 진행되는 ‘특급경매’는 차질없이 준비되고 있겠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입은 손해를 만회하려면, 특급경매에서 좋은 성적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제국에서 1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특급경매는 오직 초대장이 있는 자만 참석할 수 있고, 그 초대장은 웬만한 도시의 지배자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선택받은 자들 끼리 모여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놓고 경매를 진행한다.
이는 플레이어들의 경매장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잘하면 제국의 귀족과도 연결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활을 걸고 참여해야하는 경매인 셈이다.
“경매 전까지 골드가 얼마나 모일 것 같나?”
“1억 골드 정도는 모을 수 있을 듯합니다.”
“2억 골드까지 모아라. 유적의 유물을 전부 판매해서라도.”
“괜찮겠습니까?”
“제국에서 처음으로 초청받았다. 확실하게 내 능력을 보여줘야만 해.”
플레이어 중에서도 알려진 바로는 최초였다.
제국에서 열리는 특급경매의 초청장을 받은 자는 말이다.
그러니, 확실하게 각인시켜줘야만 하는 것이다.
‘절호의 기회다. 제국 귀족과 연을 만들 수만 있다면 더 위로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야.’
그게 가능하다면 모든 손해를 만회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성과를 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는 없다.
꽈악!
마스터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
허드슨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아니, 눈앞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떠냐. 이 몸이 평생 모은 보물이!
허드슨의 앞에서 탐욕이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과시했다.
끝없이 펼쳐진 금은보화의 산.
“그, 그니까 이걸 전부 란돌프님이 가지셨다는 겁니까?”
-······ 그래. 이젠 전부 그분의 것이다.
하지만 이내 탐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평생을 모았지만 결국 모든 겜블에서 패배한 채 란돌프에게 전부 빼앗겼기 때문이다.
허드슨의 눈이 핑핑 돌았다.
구제국 주화와 구제국 관련 보물들.
“최소 10억 골드······.”
머리도 팽팽 돌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모든 걸 처분하면 최소 10억 골드다.
잘만 하면 13억 골드 이상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 많은 걸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점인데.
-그래도 괜찮다! 나는 다시 모으면 된다. 그분과 계약하여 20%는 내가 갖기로 했으니까. 이곳 미궁에는 보물이 많으니까······.
애써 자기위안하는 듯 슬퍼보이는 음성으로 탐욕이 말했다.
심연 미궁에서 태어난 탐욕은, 미궁을 벗어날 수 없다.
대신 이곳 미궁을 지켜주는 대가로, 미궁에서 탐욕이 직접찾은 보물의 20%를 갖기로 란돌프와 협약을 맺은 것이다.
‘고작 20%?’
허드슨은 양팔을 교차한 채 침음을 흘렸다.
미궁도 지키고, 보물도 직접 찾는데 고작 20%라니.
하지만 허드슨은 말을 아꼈다.
그보단 보물의 처리가 더 급했다.
‘황금도시 아르카나를 들러야겠군.’
이걸 처리할 수 있는 곳은 제국을 제외하면 아르카나뿐이었다.
시의회와 거물들에게 경쟁을 붙이면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허드슨은 의지를 불태웠다.
‘아르카나의 인맥은 아직 살아있지. 카지노를 다시 되찾고, 돈세탁도 좀 시켜야겠군. 최고의 워프공학자를 불러서 미궁에 워프도 추가로 더 건설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모두 란돌프가 자신에게 맡긴 것.
그러나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이 미궁을 최고의 도시로 만들자.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지상최대의 규모로. 그리고 세렝게티에게 고백하는 거야.’
심장이 나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세렝게티가 깨어나면, 그 즉시 고백하리라.
그러니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최대한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된다.
첫 번째 목표는 보물을 판매하고 돈을 굴리는 것.
‘란돌프님에게 내 진짜 능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자신을 믿고 모든걸 맡긴 란돌프를 실망시킬 순 없다.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도움이 되리라!
허드슨의 두 눈에 광명이 깃들었다.
*
란돌프가 수련자의 산으로 떠난 뒤.
이자벨라도 떠날 준비를 끝냈다.
-란돌프님.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로 저 혼자 향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여왕이 죽은 지금, 그곳의 정통한 후계자는 저뿐입니다.
뱀공주.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걸 싫어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사막 여왕은 죽었으니까.
사막도시 파이살메르의 주인이.
이제 그곳을 통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자벨라, 그녀뿐이었다.
이자벨라가 사막도시의 주인이 된다면 미궁의 세 번째 워프 연결지로 선정할 수도 있을 터.
‘이 또한 내 숙명이겠지.’
어린시절 납치되어, 뱀공주가 됐다.
그리고 란돌프를 만나고 사막여왕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면 영원히 제자리걸음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젠 나아갈 때였다.
그리하여 반드시 사막도시의 주인이 되리라.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이자벨라가 사막도시로 향했다.
*
“헉! 허억!”
아이작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이어 목을 매만진 아이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젠장할 악몽 같으니.”
아이작은 요즘들어 악몽을 계속 꾸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
결국 목이 베어져 죽는다.
크람델을 나선 이후부터 계속 꾸고 있다.
“누가 나를 쫓고 있는 건가?”
란돌프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작은 불안했다.
악업이 지워져 도시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음에도 쉽사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미궁 도시가 안정화 할 때까지 와이저 후작가에 머물기로 했으나 이곳 역시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좀이 쑤셔서 도저히 안 되겠군.”
결국 아이작은 바깥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책이라도 좀 하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
작은 숲길을 따라 아이작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 그만 따라오고 모습을 보여라.”
바깥에 나온 즉시 누군가가 붙었다.
워낙에 은밀하여 처음엔 암살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번이나 기회를 줬음에도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드디어 나를 찾아냈구나.”
곧이어 나무 뒤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하얀색의 망토를 걸치고, 하얀색의 상아와도 같은 뿔이 이마에 솟아있는 자.
간혹 보이는 살결에는 온갖 문신으로 가득했다.
아이작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누구냐, 넌?”
“성각자다.”
“······ 성각자?”
“자격을 갖춰 나를 찾아냈으니, 그대여. 별에 도전하거라.”
“네가 성각자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냐?”
란돌프 역시 성각자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자는 뭔가 달랐다.
“그대여. 매일 쫓기며 목이 잘리는 악몽을 꾸지 않았는가?”
“······.”
“그대에게 자격을 부여한 별이 보낸 신호다. ‘목 잘린 자의 별’말이다.”
“그딴 이름이 붙은 별이 있다고?”
“아아. 있고말고.”
성각자에게서 왠지 모를 사짜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성각자라면 이건 기회였다.
초월자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녔다.
세렝게티만 하더라도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별을 먹어 강해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쫓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란돌프도, 이자벨라도, 성녀 세아도 떠났으니까.
허드슨은 보물의 판매와 미궁의 일에 매진하고 있다.
모두가 각자 할 일을 하는 중이다.
아이작만 빼고.
“별에 도전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글쎄. 빠르면 한 달, 늦으면 기약이 없다.”
“좋아. 이주안에 해결해주지.”
“······ 그 자신감은 매우 좋군.”
“가자. 앞장 서라.”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아이작의 호기에 성각자가 말했다.
“따라오거라. ‘목 잘린 자의 별’의 인도를 받는 자여.”
숙련도의 신
수련자의 산으로 향하는 워프는 총 다섯 도시에 연결되어있다.
모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도시이자, 수련자들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 정비를 끝내는 장소였다.
그중 한곳, 용병도시 카르텔.
“한잔해! 한잔!”
“아이샤, 장사 잘 되어가나?”
“우웨에에엑!”
카르텔에 도착하자 땀냄새 진득한 용병들이 술에 취한 채 거리를 걷고 있는게 보였다.
“다들 취해있네요~?”
면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세아 성녀가 말했다.
확실히.
‘이상하군.’
백주대낮부터 술에 취한 용병들이 너무 많다.
그야 용병은 항상 술과 여자를 끼고 사는 이미지라지만 적어도 이곳 카르텔의 용병들은 의뢰에는 항상 진심인 자들이었다.
일이 있는 이상 대낮부터 술을 마시진 않는다.
‘수련자의 산으로 향하려면 길잡이를 구해야한다.’
의아하긴 하지만, 길잡이 용병을 구하려면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수련자의 산으로 길잡이 수행을 하는 건 카르텔 용병들의 주수입원 중 하나였으니까.
수련자의 산으로 향하는 입구는 매번 그 위치가 바뀌고 가는 길이 험하여 길잡이 없이는 찾기가 힘든 탓이다.
나는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큰 용병길드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어떤 용병을 찾으시나요?”
용병길드의 꽃이라 불리는 여자 안내원이 입구로 마중나왔다.
길드의 내부는 펍처럼 운영되어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는 용병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이 정도 규모의 용병길드면 안내원도 도도함의 끝을 달려야 정상이건만 입구 마중이라니.
······ 혹시 일거리가 없나?
“길잡이를 찾고 있다.”
“아! 잘 찾아오셨습니다! 험악한 바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절벽? 언제 뒤에서 괴물이 덮쳐올지 모르는 미지의 숲?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희 길드는 세상의 그 어느 곳이라도 길을 안내해줄 숙련된 용병들이 있으니까요!”
“수련자의 산으로 향할 길잡이를 찾고 있다.”
“······ 수련자의 산이요?”
순간 안내자의 표정이 굳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엿다.
“지금 이 시기에 수련자의 산을 가는 미친놈이 있어?”
“쯧, 간만의 의뢰인이라 기대했는데.”
“소문을 못 들었나보군.”
“에라이. 오늘도 허탕이구만.”
반응이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