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89화 (89/317)

그게 바로 자신이거늘.

고작 그런 까마귀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이어진 백왕의 말에, 대토룡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놈은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

백왕이 직접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백왕을 죽일 수 있는 존재라면, 대토룡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주력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주력이 바라는 건 ‘동등한 자리’다. 말인즉슨, 오주력 역시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일 터. 이제 서로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거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하, 하오나! ‘송곳니’가 어디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주력은 마지막에 이르러 거래를 권유했다.

빌헬름에 의해 잃어버린 백왕의 송곳니.

빌헬름이 죽고 난 뒤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고.

“아니, 오주력의 말은 사실이다.”

단순히 미궁에 있다고 말했다면 거짓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주력은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송곳니는 보유자가 죽은 뒤 ‘특수한 장소’에 인계되었다, 까악.

-알려줘도 너희들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장소다, 까악.

천하의 백왕과 사주력이 닿을 수 없는 장소에 ‘인계’되었다는 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옮겨놨다는 뜻이다.

대원정에서 빌헬름이 죽고 난 뒤에.

란돌프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닿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송곳니를 가져오면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묻는다.

‘동등하다. 최소한 같은 값어치를 지닌 것이 아니면 거래하지 않겠다.’

하지만 자신의 송곳니와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 물건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백왕 자신의 송곳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므로.

가장 소중한 것을 또 내어줄 순 없지 않은가?

“송곳니를 되찾으려면 무엇을 주어야겠느냐?”

“거래를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대토룡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가 몰려든 탓이다.

백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받아들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송곳니의 가치에 들어맞으며, 오주력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다.”

잠시 침묵하던 대토룡이 결국 반쯤 포기한 채 의견을 꺼냈다.

“··· 하나, 있지 않습니까.”

“······ 하나?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걸 말하는 것이냐?”

“예.”

“나의 딸을, 말하는 것이라고?”

“예.”

“······ 흠.”

백왕은 턱을 쓸었다.

슬하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이 하나 있기는 하였다.

송곳니와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으로 아끼는 딸이다.

“란돌프가 수컷이던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으음. 녀석은 아직 수련 중일 터인데.”

“흑왕의 무리가 ‘수련자의 산’에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 듣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빼내야 합니다.”

“묘안이라면, 묘안이다만······.”

백왕이 깊게 탄식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 란돌프.

그를 딸과 묶어 혼인시킨다면 모든 위험은 제거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강력한 우군을 영원히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군.’

그 말괄량이가 자신의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성격 교정과 수련을 위해 수련자의 산으로 보냈지만, 핏줄이 핏줄인지라.

다른 형제들을 닮아 강철처럼 드센 성격이 벌써 죽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만 하다면, 이보다 좋은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흐으으으음.”

백왕의 고민이 깊어졌다.

*

심연 미궁의 공략이 끝난 이후.

플레이어 톡 역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사 봄? 한국에서 란돌프 관련해서 기사 난 거.

-ㅇㅇ봄. 진짜 간덩이도 크다

-김하나? 이 사람 그라시아랑 인터뷰한 여자 아니냐?

-맞아. 김하나가 따로 익명으로 취재했나 봄

-‘‘타차원에서 홀로 괴물과 싸우는 진정한 영웅 란돌프”라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ㅋㅋㅋㅋㅋㅋ

-말한 사람 틀림없이 팬텀교 신자일듯

-마스터의 암살자들이 무섭지 않느냐!

-그러니까. 마스터 입장에선 란돌프란 이름은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우고 싶어할건데...

김하나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난 기사.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디맨션 워리어’말고도, 타차원에서 홀로 고군분투중인 ‘란돌프’에 대해 기사화하며 난리가 난 것이다.

물론 별 거 아닌 내용이다.

타차원에 란돌프라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가 끝이니까.

문제는 란돌프라는 이름의 언급 그 자체였다.

-기사 내용 요약좀 해줄사람?

-현재 새롭게 생성된 워프들은 타차원의 ‘미궁’에서 지구를 침략하고자 만든 것이다. 그것을 ‘란돌프’라는 영웅이 목숨을 바쳐 막아냈다.

-뭐야,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긴 뭐가 별 거 아니냐. 이제 사람들이 란돌프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할 거 아니야

-취재한 사람이나, 취재에 응한 사람이나 목숨 두 개냐

-오히려 최근 유명해진 사람이라 쉽게 못 건들 수도?

-이슈화를 안 시키겠지 그냥 덮어버린다에 한표

-알고 있는게 저것 뿐이겠냐? 일단 기사화 시키려고 절제해서 저 정도 내용만 담은 거겠지

-아 이거 내가 다 쫄리네

-애들아 이럴 때가 아님. 판게니아 난리났다.

그때였다.

한창 기사화 관련으로 플레이어 톡이 시끄럽던 찰나.

갑자기 로그아웃한 플레이어들이 판게니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왜? 무슨 일인데?

-난리는 맨날 나는데 호들갑은ㅋㅋㅋ

-모든 도시에 공문 갔다. 그것도 백왕 이름으로!

난데없이 백왕이라니.

그 이름을 모르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백왕? 북부 크람델의 그 백왕?

-와 진짜네 도시 먹은 길드들도 난리났다네

-뭔데 ㅅㅂ 무슨 내용인데

-잠만. 미궁 도시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하겠대. 크람델에 이어 백왕의 두 번째 공식선언임 건들면 다 죽이겠다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미궁 도시 지배한 건 란돌프 아니었음?

-도시를 직접적으로 통치할 지배자는 오주력 란돌프라는데?

-...?

-?????

-오주력?

-그래. 크람델에 새로 등극한 다섯 번째 주력. 시체 까마귀의 왕 란돌프래

-아니, 뭐?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그럼 심연 미궁 클리어한 게 우리가 아는 란돌프가 아니라 시체 까마귀 란돌프였다고?

-동명이인이라는 소리임 지금????

-나 많이 혼란스러운데

-나 지금 머리가 띵해

-그니까 팬텀 란돌프가 아니라, 괴물 시체 까마귀 란돌프다?

-뭐야 이거...... 진짜임?

-시체 까마귀 란돌프는 누군데?

-환장하겠네 우리가 열광했던 게 팬텀이 아니라 괴물이었어?

-크람델에서 인간을 받을 리가 없으니까 찐 괴물이겠지

-그럼 진짜 란돌프는 어디 있는데?

-수련자의 산에 있지 않을까?

-누가 가서 확인해봐

-거기 7레벨에 한 번밖에 못 올라가잖아

-산 주변에 괴물 급증했음 아예 산으로 가는 길이 막혔어 가면 죽는다

-와... 소름

-대박,,,,...

*

수련자의 산.

7레벨을 달성하고 메인 퀘스트 6을 클리어하면 자동으로 시작되는 구간이다.

단 한 번만 올라갈 수 있고, 클래스 관련 숙련도 15레벨을 달성하지 못하면 하산조차 할 수 없는 반강제적인 수련장소.

‘얼마나 높은 숙련도 레벨을 달성하느냐가 관건이겠지.’

백왕이 송곳니에 대한 대가를 고민하는 사이, 나는 수련자의 산을 오를 작정이었다.

허나 철저하게 준비하여 끝을 내야만 한다.

기회는 한 번.

두 번은 없다.

입산한 순간부터 하산할 때까지 특출난 성적을 내야만 했다.

‘클래스마다 주어지는 숙련도 맥스 레벨이 다르다.’

일반적인 클래스, 예컨대 ‘궁수’라면 활 관련 숙련도를 15레벨까지 찍을 수 있다.

15레벨. 이게 기본이다.

그 이상의 격을 지닌 클래스를 갖게 되면 당연히 맥스레벨도 높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지고의 검성. 최대 검 숙련도를 30레벨까지 올릴 수 있는 히든 클래스.’

히든 클래스, 지고의 검성!

지고의 용과 검성 라일리 모두의 인정을 받고 격상한 클래스를 거머쥐었다.

최대 숙련도 30레벨에 육박하는 클래스는 듣도 보도 못했다.

관련된 별을 먹고 맥스 레벨을 초월하는 경우는 있어도, 시작부터 30레벨이라니!

‘최소 23레벨 이상은 찍고 내려와야겠군.’

허나 20레벨을 넘어가면 그때부턴 고난과 역경이 시작된다.

바알 투구와 손재주가 있어서 23레벨까지는 어찌어찌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련자의 산에서 23레벨을 찍은 사람은 아마 한 손에 꼽을 것이었다.

“출발하지.”

“네에~”

옆에서 성녀 세아가 대답했다.

약간 나사가 빠져있는 것 같긴 했지만, 수련자의 산에 한 번도 입산하지 않은 건 그녀뿐이었다.

아이작이나 이자벨라처럼 플레이어의 캐릭터도 아니며, 태어날 때부터 판게니아의 성녀였던 그녀는 굳이 수련자의 산에 입산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입가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성녀가 아니다.

‘무한 힐 셔틀.’

수련자의 산에서 지친 심신을 회복시켜줄 존재.

무한한 수련을 위한,

그냥 힐 셔틀일 뿐이었다.

그것도 가공할 신성력을 지닌 최강의 힐 셔틀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잘하면 23레벨 이상으로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내 생각대로만 진행된다면, 메인퀘스트 7의 명예의 전당 가장 꼭대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조차도.

목 잘린 자의 별

화산.

불의 성지라 불리는 장소.

끼아아악!

그곳에서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새가 비명을 내질렀다.

신화종 중에서도 급이 다르다는 피닉스!

그러나 지금은 양쪽 날개에 검이 박힌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얌전하게 별을 내놓아라, 별 수호자.”

그 앞에선 그라시아가 천검을 돌리며 말했다.

피닉스는 불의 별을 지키는 별 수호자.

자격을 달성한 자를 시험하여 별을 내어주는 특수한 존재였다.

하지만 피닉스는 눈앞의 남자, 그라시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꽈르릉!

까아아악!

끊임없는 천검의 공격에 피닉스는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라시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라시아의 안중에 이미 피닉스는 없었으니.

《심연 미궁의 주인 ‘검성 라일리’가 도전자 ‘란돌프’에게 패배했습니다.》

《페이즈 5, ‘심연 그 자체인 자’를 ‘란돌프’가 제거했습니다.》

《‘심연 미궁’ 클리어! ‘란돌프’가 미궁도시의 주인으로 떠오릅니다.》

······ 다시금 떠오르는 기억.

그라시아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해내지 못한 걸 놈은 해냈다.

물론 팬텀 란돌프가 아닌, 크람델의 오주력이자 시체까마귀의 왕 란돌프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찝찝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인정했다.

자신이 오만했음을.

검성이라 불리며 천검을 다루는데 심취하여 성장을 등한시해왔다.

그 결과, 옛 검성조차 이길 수 없지 않았나.

‘팬텀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팬텀의 최강 캐릭터 빌헬름이라면 검성 라일리를 이겼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천만 분에 하나, 저 란돌프가 팬텀이 맞는다면······.

‘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라시아가 피닉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별을 내놓거라, 별 수호자.”

띠링!

띠리링!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검은 종의 소리.

화산의 성지까지 사신이 따라 들어온 것이다.

최근 들어 그 주기가 더 빨라지고 있다.

심지어 자신을 찾아온 사신은 이전 한국에서 맞이한 사신들과도 달랐다.

숫자도, 생김새도.

고작 두 마리. 이마에 솟은 뿔이 세 개.

한데, 느껴지는 중압감 자체가 다르다.

그라시아가 표정을 굳혔다.

“······ 오냐, 네놈들도 함께 끝장을 보자꾸나.”

*

“············ 이게 백왕이 보낸 공문이라고?”

“예, 마스터.”

유적 도시의 집무실에서 복면을 쓴 한 남자가 대답했다.

동시에 도시로 도착한 공문을 넘겼다.

공문을 확인한 마스터는 고개를 이맛살을 구겼다.

-모든 도시의 주인들이여! 미궁 도시를 백왕의 영역으로 선포한다.

-허나, 미궁의 실질적인 주인은 새로이 등극한 오주력이자, 시체 까마귀의 왕 란돌프가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불장난을 하려는 자는 타 죽으리라.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

뭐?

‘불장난을 하면 타 죽어?’

아무리 백왕이라지만, 모든 도시에 이와 같은 공문을 보낸 건 확실히 선 넘은 짓이었다.

선전포고도 아니고······.

두려울 게 없다는 건가?

결국, 마스터는 쓰게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군.”

“계획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왕이 끼어들었으면 어쩔 수 없지. 계획을 백지로 되돌린다.”

계획.

다름 아닌 미궁 도시의 공략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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