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88화 (88/317)

명백한 서열 관계가 있음에도 없다고 하는 저 행태가.

“백왕, 까악. 나는 말장난을 매우 싫어한다, 까악. 나를 멋대로 움직이려거든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까악.”

그까짓 주력의 자리.

그까짓 백왕의 천명.

동등하지 않으면 다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말장난이나 하는 놈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포했다.

백왕의 가면이 파르르 떨렸다.

“······ 그래서. 말장난을 하면, 죽이겠다? 이 백왕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 있다.

하지만 살의가 가득한 웃음이다.

그 누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대놓고 발언하겠는가.

그것도 감히 백왕의 앞에서 말이다.

마치 훈계하듯 말장난이나 하지 말고 제대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자가 한 번도 없었기에 백왕은 어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

상황은 더더욱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허나, 그럴수록.

나는 더욱 여유를 부렸다.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렸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서로 퍼담을 생각이 없으니, 남은 건 다시 물을 따르는 것뿐이다.

어떻게 다시 따를 것이냐.

누가 따를 것이냐.

그 문제는 이제부터 정할 일이었고.

“왕좌에 앉아라 백왕, 까악.”

왕좌에 앉아라.

백왕전에 마련된 너의 자리에.

내 말을 들은 사주력과 백왕은 잠시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왕좌에 앉으라는 건, 왕임을 인정하겠다는 말 아닌가?

이곳에 마련된 최고의 자리.

신하가 되기를 자처하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그 순간.

《‘불길한 빛의 옥좌’를 사용합니다.》

《‘불길한 빛의 옥좌’에 앉으면 주변 모든 것에 ‘불길한 형상’으로 투영됩니다.》

《‘불길함의 끝(Lv10)’을 사용하면 접두사가 소멸합니다.》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선 같은 테이블에 앉을 필요가 있었다.

백왕은 백왕의 자리에.

“나는 나의 자리에 앉겠다, 까악.”

나도 나의 자리에.

자. 이제부터 정해보자.

누가 다시 컵에 물을 따를지.

‘찬란한 접두사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것도 나쁘지 않군.’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불길한 빛의 옥좌.

빛의 옥좌는 제물로 바친 물건에 따라서 붙는 접두사가 천차만별이다.

‘불길한’ 접두사는 ‘극 철검’ 두 자루를 제물로 바쳐서 띄웠다.

수련자의 산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숙련도를 올리면 어차피 필요 없어질 무기.

미리 띄워둔 게 천만다행이다.

이윽고 내가 자리에 앉자 사주력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특히 메두사의 반응은 더욱 극적이었다.

모든 눈을 가린 메두사는 앞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자세하게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불길함 그 자체인 형상을 마주하자 절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대토룡도, 사왕도, 궁기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주력 전원이 불길한 빛의 옥좌에 반응했다.

그렇다면, 백왕은 어떨까?

그때였다.

“그만하지.”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백왕과 나의 사이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면서.

나타난 존재는 사왕이었다.

그가 나와 백왕의 사이에 선 채로 중재를 나선 것이다.

내게 그만하라 말한 사왕은 이내 백왕을 쳐다봤다.

“흑왕의 의도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백왕이시여, 오주력은 다른 주력들과 다르다는걸 인지하셔야합니다. 그는 저희와 달리 백왕께 받은 ‘은혜’가 없지 않습니까?”

백왕을 따르는 사주력들은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오주력은 다르다.

오주력은 처음 등장부터 백왕에게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

아직 선물로 준다는 ‘도시’조차도 지정하지 않았으니.

도리어 스스로 자신의 도시를 쟁취했다.

심연 미궁.

구제국의 땅이자, 검성 라일리가 가라앉은 그곳을!

고로, 동등하다.

강제로 명령할 수 없다.

사왕이 재차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주력. 그대도 그만해라. 별 수호자가 아닌 주력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 역시 결국은 그대다. 지금 우리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그대 역시 곤란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 와서 별 수호자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그랬다간 멸악의 거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서 크람델까지 적으로 돌리면 사방천지가 다 적이 된다.

‘뭐하는 거지?’

동시에 사왕의 공허한 오른쪽 해골 눈에 붉은 선이 떠올랐다.

나만 볼 수 있게끔 떠오른 그 붉은 선은 ^ 표시를 만들었다.

‘······ 윙크?’

설마 지금 나한테 윙크하는 건가?

사왕이 그 상태로 계속해서 말했다.

“오주력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분명히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서로가 극으로 가면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걸 그대도 알진대. 정말 전쟁을 원하는건가? 말장난이 아닌 진실된 ‘동등함’을 원하는 것 아니었나?”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멋대로 부르고, 강제로 일을 떠맡기는 건 모로 보나 동등한 관계와는 거리가 머니까.

게다가 끼어든 게 사왕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왕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다.

다만.

“내가 주력이 되는 최소조건이다, 까악. 동등하지 않은 자리는 필요 없다, 까악.”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처음 주력이 되었을 땐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서 제대로 못 짚고 넘어갔지만, 이 조건이 확실해지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리하여 나는 백왕에게 공을 넘겼다.

동등하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백왕, 너의 생각은 어떠냐.

너와 나를 동일 선상에 두는데 동의하는가?

“······ 정녕 겁을 상실한 놈이로군.”

이 정도로 뒤 없이 막 나가는 놈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격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놈은 원래부터 이런 놈인 것이다.

겁이 없고,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도전하길 좋아하는.

백왕이 아니라 설령 상대가 신이라 할지라도 놈은 똑같이 행동할 터였다.

이 정도로 미친 까마귀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단순히 미치기만 했으면 이미 백 번은 죽였을 텐데,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지니고 있어서 여간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 패기는 마음에 든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그래서 백왕은 한발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 한결같은 패기를 본받아, 한 번은 수위를 넘는 발언도 용서하겠다는 의미였다.

앞과 뒤의 말이 다른 태도에서 실수를 먼저 한 것은 어찌됐든 명백하게 자신이었으니.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이게 마지막이다.

‘살았다.’

······ 내심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아니, 매우 좋았다.

‘진짜 십년감수 했군.’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일단 성공이다.

사왕이 안 끼어들었으면, 끝을 봤을 것이다.

블러핑이 좀 심했던가.

그리고 끝을 봤다면 결과는 뻔했다.

기껏해야 신비 하나 파괴하고 내 몸은 두동강 나 있었겠지.

사왕이 끼어들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래서 사왕을 싫어할 수가 없다.

윙크까지 날린건 좀 그렇다만.

“좋다, 까악. 이제야 서로 ‘대화’할 자세가 갖춰졌구나, 까악.”

“······ 오주력.”

기껏 화해시켜놨더니 뭐하는 짓이냐는 투로 사왕이 다그쳤다.

다시 분위기가 안 좋아지길 바라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래도 된다.

동등한 자리에 있다는 건 동등함 이상의 거래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백왕이여, 까악. 내가 너의 잃어버린 ‘송곳니’를 찾아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것이냐, 까악?”

자세는 됐고, 이제 서로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를 해보자.

잃어버린 송곳니.

그걸 되찾아주면 너는 나한테 무엇을 줄 것이냐?

“······ 두 번은 없다 했음에도, 재밌는 말을 하는군.”

백왕의 두 눈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음해냐는 듯.

또 말실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해봤자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황금률 상점에 대놓고 전시되어 있으니까.

빌헬름의 전리품 중 하나로서.

물론 천 시간의 조각을 필요로 하지만, 백왕이 내미는 보상에 따라선 구매를 고민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온전한 황금률.’

내게는 온전한 황금률이 있었으므로.

부서진 조각과는 궤 자체가 다른 완전한 황금률이!

수련자의 산

란돌프가 백왕전을 나선 뒤.

백왕전은 여느 때보다 고요했다.

거센 폭풍이 지나간 뒤의 세계처럼.

엉망이지만 차분한 그런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묘하구나.’

백왕은 왕좌에 앉아 턱을 괴며 조금 전의 폭풍을 떠올렸다.

미친 까마귀, 오주력 란돌프.

놈이 지나간 뒤 백왕의 머릿속은 어그러졌다.

묘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묘하다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존재는 ‘그’ 말고는 처음이었다.

‘기사왕 빌헬름. 그놈도 그랬지.’

둘은 명백히 다르다.

빌헬름은 인간이고, 오주력은 시체 까마귀다.

다루는 능력이나 특성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허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예감’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점.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지닌 족속들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놈과도 다르다. 이런 기분은 처음일진대.’

빌헬름을 상대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지금 백왕은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 놈은 나를 읽고 있다. 그래서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게다.’

빌헬름은 자신을 몰랐다.

그런데 란돌프는 자신을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오주력, 그 미친 까마귀는 자신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 예의가 없군, 까악.

첫 만남에서 란돌프는 ‘스킬’을 읽었다. 자신이 관찰 류 스킬을 사용한다는 걸 깨닫고 ‘예의’를 운운하며 정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신비를 파괴할 수 있는 란돌프의 권능은 약간의 경계 대상일 뿐이었다.

허나 오늘 란돌프가 보여준 모습은, 첫인상에서의 관념을 모조리 깨트렸다.

스킬만이 아니다.

놈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가면 안의 모습조차도.

그보다 더 깊은 영역마저도 놈은 꿰뚫어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죽인다는 말.

그 허풍을 한 번은 봐준다고 했지만.

‘내가······ 긴장했다고?’

어쩌면, 단순한 허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바알의 기색과 빛의 옥좌.

그 두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놀라웠으나, 빙산의 일각이라면?

하여 본능적으로 긴장한 것이다.

놈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긴장감.

“하하하!”

그제야 이 기묘함의 정체를 깨달은 백왕은, 광소를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누군가를 향해 이런 긴장감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이던가.

그 빌헬름도 결국 자신의 ‘예감’의 범주 내였다.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그 기상천외한 무력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적이었으나 결국 빌헬름도 자신을 죽이진 못했다.

헌데, 란돌프는 ‘예감’의 밖에 있다.

불길한 듯 불길하지 않고, 강한듯하면서도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옆에 두었지만, 어쩌면 란돌프야말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

죽인다는 그 말에 유독 강하게 반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측 불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미친 까마귀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야 처음 느껴보는 기분일 수밖에.

자신을 꿰뚫고, 예감의 영역을 넘어서 직접 죽음을 암시했으니.

“백왕이시여······?”

갑자기 광소를 터트리자 백왕전에 남아있던 대토룡이 의아해했다.

백왕은 웃음기를 지운 채 일주력 대토룡에게 물었다.

“대토룡. 그대가 보기에 오주력은 어때 보이던가?”

“언젠가 크게 일을 치를 놈입니다. 그 전에 조처해야 합니다.”

“내 생각도 같다. 조치를 취해야지.”

대토룡은 오주력에게 강한 적의를 갖고 있었다.

주제 모르고 날뛰는 미친 까마귀.

한 입에 삼켜도 성에 차지 않을,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놈.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대토룡을 향해 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도시에 워프를 잇고, 그곳을 백왕의 이름으로 공식 천명하겠다. 그리고 오주력의 거래도 받아들이마.”

“배, 백왕이시여?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토룡이 기겁했다.

조치를 취한다는 게 이런 조치를 말하는 거였나?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백왕은 의연했다.

“가만히 놔두면 머지않아 적으로 돌아설 녀석이다. 그 전에 미리 ‘덕’을 입혀놔야지. 사왕의 말마따나.”

“적으로 돌아서면 제가 직접 놈을 죽이겠습니다.”

“아서라. 너를 잃고 싶지 않다.”

“······ 그 말씀은, 제가 패배라도 할 것이라는?”

“그래.”

백왕의 확신에 찬 말에, 대토룡이 표정을 잔뜩 구겼다.

대지의 용들 중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최강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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