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아예 다른 게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성녀가 아니라 ‘무언가’가 진짜로 침식을 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
모든 플레이어에게 이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내가 벌인 문제이니 해결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침식’이 종료되었습니다.》
성을 벗어나려는 순간 또 다른 글귀가 떠올랐다.
침식을 일으키는 주체가 돌아가서 종료되었다는 말.
‘··· 세아 성녀가 맞나 보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소란은 생기겠지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플레이어가 아닌 판게니아인은 지구로 넘어올 수 있다.’
괴물들이 지구를 침략하듯이 말이다.
다만 판게니아인도 ‘적’으로 규정되는 것 같다.
설마 시스템 메시지 자체가 제거를 종용할 줄이야.
아니면 침식과 관련된 워프로 넘어와서인지.
하지만 아흐람의 1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지구로 넘어올 수 있는 워프는 모두 침략과 관계되어있었다.
‘그럼 침식률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침식률이 높아지면 지구와 판게니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허물어지는 지, 허물어지고 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알 려진 바가 없었다.
판게니아와 지구 간에 전쟁이라도 나는 걸까?
“흠.”
턱을 쓸며 고민했지만, 당장 답이 나올 순 없는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단 세아 성녀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
올리버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워프를 통해 나타난 사람.
그게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성녀······ 세아님······.’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세아 성녀는 여신교의 간판이었다.
미리 이곳에서 대기하면 누군가가 넘어올 수도 있다는 언질은 들었지만, 그게 세아 성녀라는 말은 듣지 못했기에, 아직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뛰었다.
그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거세게.
너무나도 건강하게.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그 순간부터 말이다.
“멜슨. 심장이········· 아프지 않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심장이 고쳐졌습니다.”
“설마 방금 그분이?”
“예.”
주르륵.
절로 눈물이 맺히고 흘렀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심장이,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촛불 같던 그것이 마침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으니까.
직후 세아 성녀는 떠났지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한 사람 덕분이었다.
란돌프.
심연 미궁을 클리어한 그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런데 선물치곤 너무 대단한 것을 받아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하루하루를 죽음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세렝게티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까.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실과도 관계없는 독자적인 루트를 통했으니, 아무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럼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그런 건 제 주특기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돌아가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멜슨.”
“예.”
멜슨은 의문을 갖지 않았다.
지금 일어난 모든 일에.
때가 되면 도련님께서 말을 해주리라 믿고 있었으므로.
들어온 길 그대로 둘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한참을 돌고 돌아 증거를 완전하게 인멸한 끝에야 겨우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성에 도착하자마자 지하로 향한 올리버는, 누워있는 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갑작스러운 행동에 멜슨이 기겁했지만 올리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멜슨. 이분은 그저 게임친구가 아닙니다. 저의 심장이며, 제가 영원토록 따라야 할 로드(Lord)이십니다.”
“······!”
심장이다.
그 말인 즉, 오늘 일어난 모든 일에 저 한국인 남자가 관계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로드라니.
왕을 따르는 기사라도 된 것 같지 않나.
올리버의 혈기 없던 얼굴엔 어느새 혈기가 넘쳐났다.
누가 봐도 건강한 얼굴.
오랜시간 받들었지만 멜슨도 이런 올리버의 모습은 처음 볼 정도였다.
이어서 올리버가 결연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앞으로 저와 같이. 아니, 저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이분을 섬겨야 할 겁니다. 반드시.”
*
올리버의 심장이 치료됐음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미궁도시와 연결할 워프를 찾는 것.
최소 세 개의 땅과 연결해야 다시 가라앉지 않는다.
마침 적당한 후보지가 있었다.
“오! 친구여! 오랜만이군!”
바스락 숲.
하이 드라이어드가 나를 보자마자 반겼다.
“친구가 왔다! 오늘은 축제를 벌여야겠구나!”
“잠깐. 친구여, 그전에 이걸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이건?”
내가 내민 씨앗을 본 하이 드라이어드의 눈이 이윽고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신록의 씨앗 아닌가!”
“그대들의 숲에 선물로 주려 한다.”
“신록의 씨앗을 선물로 말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어드는 숲의 성장에 따라 강해진다.
바스락 숲에 신록이 들어서면 레벨과 규모가 동시에 늘어날 터.
미궁에서 황금 티켓을 자판기에 넣고 구매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신록의 씨앗이었다.
하이 드라이어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령을 선물로 준 것도 고마운데 신록까지 받을 순 없다네, 친구여.”
“당연히 공짜는 아니야.”
“그럼?”
“바스락 숲과 내 도시의 워프를 이었으면 싶군.”
“그건 씨앗을 받지 않아도 해줄 수 있는 일일세.”
역시 드라이어드.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혐오하는 인간의 도시일 수도 있는데 흔쾌히 허락하고 있었다.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뇌물이라 해두지.”
“아무리 그래도······.”
“더 거절하는 건 친구 간의 예의가 아니다, 친구여.”
“끙······ 알았네. 하지만 신록의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그만한 지력이 준비되어야······.”
“그것도 걱정 마라. 심을만한 곳이 있나?”
“있기는 하네만······.”
“우선 그곳으로 가지.”
“으음. 따라오게.”
하이 드라이어드가 석연찮은 얼굴로 앞장서며 안내했다.
곧 너른 공터가 나타났고, 나는 그 중심부에 신록의 씨앗을 심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이 드라이어드가 입을 열었다.
“이 땅의 지력으로는 부족할 게야. 신록이 자란 숲은 모두 하나같이 용맥과도 같은 지력을 품은 곳들일세. 친구여. 실망하게 해 미안하네만, 이 땅은 그 정도의 지력은 품고 있지 않아.”
신록이 자란 땅은 몇 곳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엘프들의 땅이었다.
신록을 중심으로 강성해진 그들은 인간들도 범접하지 못할 힘을 얻었다.
하지만 신록이 싹을 틔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땅에서 수많은 ‘용’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용의 시체가 쌓여 ‘용맥’이 된 땅이라 신록이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 정도 지력을 품은 땅이 아니었다.
바스락 숲의 규모만 보더라도 숲치곤 그리 크진 않았으니까.
‘급속성장.’
그러나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싹만 틔우면 되는 일.
《‘신록의 씨앗’이 급속성장합니다.》
《‘신록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스으으으으.
순식간에 씨앗이 발아하며 뿌리가 땅으로 뻗쳐나갔다.
“허억······!”
그 모습을 본 하이드라이어드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
순식간에 신록이 자라났다.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이 발현됩니다.》
《‘신록’의 1차 성장이 완료되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5가 되어 더 안전한 성장이 가능해졌습니다.》
《‘급속성장’의 스킬 레벨이 7에 도달하면 신록의 2차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신록의 축복으로 주변 ‘숲의 종족’의 최대레벨이 +1 상승합니다.》
《신록의 축복으로 ‘숲의 성장률’이 200% 빨라집니다.》
오.
신록의 효과가 어마어마하다.
드라이어드들의 최대 레벨 상승과 숲의 성장률 두 배.
바스락 숲이 더 번영할 것이라는 증명과도 같았다.
‘엄청나군.’
게다가 바알 투구와 손재주 덕분인지, 신록의 씨앗을 틔우자 레벨이 세 단계나 상승했다.
기껏해야 1이나 2쯤 오를 줄 알았건만.
“치, 친구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이 드라이어드의 놀라움을 뒤로한 채 오다가 주웠다는 느낌으로 짧게 답했다.
“선물이다, 친구여.”
*
《‘바스락 숲’과 ‘미궁 도시’의 워프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
남은 건 두 곳이었다.
하지만 고민할 틈이 없었다.
바스락 숲을 다녀온 직후.
까아악! 까아악!
내 위를 날아다니는 시체 까마귀들.
······ 나는 지금 크람델에 있었다.
다시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되어 크람델에 방문한 것이다.
‘긴급 호출이라.’
다름 아닌 백왕의 긴급한 호출 때문이었다.
오주력이 되었을 때 받은 ‘인장’이 미칠 듯이 울려대어, 어쩔 수가 없었다.
긴급 호출은 주력들 모두가 모여야 하는 안건이 있을 때만 발동되는데, 특별한 사유 없이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다.
“란돌프!”
크람델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건 사왕이다.
잠시 멈칫했다.
닭살돋게 왜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게다가 사왕이나 되는 작자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 있을 리는 없고.
······ 설마 입구에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한 번 해보자는 건가?
나는 이미 백왕의 앞에서 내 이름을 밝혔다.
사왕을 포함한 다른 사주력도 함께 들었으니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사왕은 사주력 중에서도 가장 나를 친근히 여겼던 존재.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한들 문제는 상황이다.
크람델의 주인이자 이주력이나 되는 작자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수많은 괴물이 지켜보는 곳.
저 많은 시선을 아랑곳않고 서로 이름을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도 괴물들은 나와 사왕을 번갈아보며 수근거렸다.
“저 까마귀는?”
“쉿. 이번에 새로 오주력으로 등극한 자다.”
“아무리 그래도. 사왕께서 직접 기다릴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고?”
“신비의 관에서 백왕을 뛰어넘는 성취를 달성했다는군.”
“백왕을······!”
“그럼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혼자서 아흐람을 죽였다던데.”
“그 망령왕 아흐람을?”
“별 수호자들도 저 오주력을 데려가려고 신경전을 벌였다던데?”
“미친.”
“겉보기와는 다르다 이건가.”
다 들린다 이놈들아.
오주력으로 등극할 땐 몰랐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나에 대한 소문이 크람델 전체에 제대로 퍼진 모양이다.
몇몇 잘못된 소문 같은 것도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원래 소문이라는 게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다만, 의연하게 걸어나갔다.
사왕 역시 전혀 개의치 않고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행동이 주변에 어떤 식으로 비치는지 아예 신경을 안 쓰고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란돌프! 가까이서 보니 더욱 반갑군.”
“오랜만이다, 까악.”
“그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허나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사왕은 명백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대체 뭐에 흥분하고 있는 거지?
백왕이 긴급 호출한 내용과 관련된 걸까?
“무엇이 궁금하다는 거냐, 까악.”
“심연 미궁! 검성 라일리를 죽인 게 정말 그대인가?”
아. 미궁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생각해보니 사막 여왕이 사왕을 언급했던 것 같기도하다.
사왕이 심연 미궁에 도전했다면 당연히 내 이름을 봤을 것이다.
뭐라고 답해야할까.
‘사실 내가 아니라 동명이인의 인간이라 답해야 되나?’
이름만 같은 인간이라고 답했다간 사왕은 실망할 테다.
하지만 내가 클리어했다고 답한다면 미궁 도시는 영락없는 오주력의 도시가 되고 만다.
백왕 산하, 괴물의 도시.
“그렇다, 까악.”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바스락 숲을 워프 연결지로 지정하지 않았나.
도시의 주인이 꼭 인간이어야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백왕의 그늘에 있는 게 안전할 것이다.
크람델도 연결할 수 있다면 그 누가 감히 미궁으로 공격을 들어오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백왕을 적으로 돌리며 그런 짓을 벌일 간 큰 놈은 어지간하면 없다.
크람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