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 투구다.”
“투구···요? 투구라기보단 검은 염소탈 아닙니까?”
“겉보기엔 그렇지.”
투구라 이름 붙었지만 탈에 가깝다.
그러나 생각보다 착용감이 좋다.
쓰고 있는 줄도 모를만큼 가벼운데다 통풍도 잘 됐다.
생존 정산에서 고른 두 개의 신화등급 무구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쓰고 있는 바알 투구였다.
【바알 투구(궁극신화)】
-먼 옛날,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사흉(四凶)’ 중 하나인 ‘바알’이 착용하던 투구
-‘저주 강화’ : 저주계열 스킬을 강화합니다.
-‘궁극의 저주’ : 저주계열 스킬 중 하나를 궁극 강화합니다.
-'저주의 상속자’ : 저주계열 스킬 사용 시 마력+10(중첩불가)
-‘저주의 이면’ : 모든 숙련도가 50% 빠르게 상승합니다.
-착용 시 영구적용
-귀속
-착용 제한(1) : ‘신화를 완성한 자’ 이상의 칭호 보유자
-착용 제한(2) : 모든 능력치 90 이상
-세트 무구(1/3)
-바알 갑옷과 함께 착용 시 성능이 강화됩니다.
-바알 탈리스만을 적용 시 성능이 강화됩니다.
이 설명을 보고도 고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한 줄, 한 줄이 가히 아름다움의 영역이다. 옵션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다.
그리고 내가 바알 투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저주의 이면’ 때문이다.
숙련도 50% 상승!
‘합이 아니라 곱이다. 손재주와 시너지가 있다.’
히든 특성 ‘손재주’는 숙련도 상승률을 두 배로 올려준다.
투구로 인한 50%의 상승률이 합쳐지면 3배의 효율을 지니게 되는 셈이다.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손재주와 환상의 시너지를 내는 미쳐버린 투구였다.
샤티로스의 저주는 중첩이 가능했지만 그 외엔 이렇다한 기능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격 자체가 다른 기물.
다음 메인 퀘스트의 압도적인 성적을 위해선 필수였다.
하물며 생긴 것도 ‘염소’이지 않나.
‘은여우 가면은 황금 염소 가면을 쓰고오라고 했지만, 괜찮겠지.’
황금 염소나 검은 염소나 다 같은 염소 아닌가.
사신교가 있는 제국으로 향하려거든 이게 제격이다.
그 외의 성능들도 훌륭했고.
저주계열 클래스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해야만 하는 세트.
조건부지만 마력도 10이나 올려준다. 단일 장비로도 놀라운 수치다.
또한, 저주계열 클래스는 특히나 스킬의 숙련작이 중요한데, 숙련도 상승률을 50%나 올려주는 장비는 유일급을 제외하면 없었다.
피스를 올리면 이 성능조차 강화된다는 뜻 아닌가.
영구적용이라 까마귀의 왕으로 변신해도 유지된다.
그리고 까마귀의 왕이 사용하는 스킬이 바로 저주계열이었다.
무엇보다.
‘바알 갑옷, 바알 탈리스만. 두 개 다 어디있는지 짐작은 간다. 수련자의 산과 제국!’
하나는 ‘수련자의 산’에 있다.
바알 투구가 숙련도를 올려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수련자의 산과 관계가 있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자의 산에서 바알 탈리스만이 잠들어있으리라 짐작 가는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바알 갑옷은 확실하게 제국에 있을 터.
공교롭게도 두 곳 다 어차피 들려야 할 곳이었다.
‘바알 세트 세 개를 모으면 유일급 이상의 성능을 내지.’
솔직히 순혈자 도안과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도안이 있다고 당장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료를 구하려고 돌고 돌기엔 시간이 없었다.
이번처럼 운이 좋으리란 보장도 없고, 아예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도박을 할바엔 당장 강해질 수 있는 무구 하나가 훨씬 나았다.
‘그냥 바알이라 이름 붙은 것들 자체가 사기적이다.’
물론 이런 저런 고민을 상쇄시킬 정도로 바알 투구 자체도 훌륭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남은 바알 피스도 구하는 족족 성능강화가 이뤄진다.
극악의 레벨링을 고려하면 내겐 한줄기 빛과 같은 세트였다.
게다가 세 피스를 다 모으면 유일급 이상의 성능을 내는데, 사흉이라 불린 바알의 전승된 기록을 읽어보면 완성했을 때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구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사흉.
멸망과 저 사흉의 합작으로 구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을만큼 그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옛 사흉은 지금의 백왕 같은 느낌이지.’
북쪽의 백왕과 남쪽의 흑왕.
그 둘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악명을 떨치던 게 사흉이다.
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바알 투구의 마력옵션 부분을 다시 읽었다.
‘조건부 마력상승. 10이면 마의 100을 넘어설 수 있다.’
단순히 숙련작 옵션만을 보고 고른 것도 아니다.
단일 장비로 무려 마력 10.
조건부지만 마력 10의 상승이면 마의 100이라 불리는 능력치 구간조차 넘어설 수 있으니!
‘바알 투구와 우로보로스의 낙인. 이 두 개를 고른 것에 후회는 없다.’
아주 만족스럽다.
유일급 도안은 포기해도, 네임드 별은 포기할 수 없다.
그것도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네임드 별이라면 더더욱.
우로보로스.
남자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이름이지 않은가.
콸콸콸!
“컥! 후, 후계자님?!”
아이작이 재차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난데없이 성배의 성수를 성녀의 머리에 콸콸 부어대고 있으니까.
“으음.”
곧 세아 성녀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성수를 부어도, 눈은 여전히 적안이었다.
그래도 알게모르게 자잘히 남아있던 저주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눈을 뜬 세아 성녀가 말했다.
“누구시죠?”
나를 몰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란돌프. 기사왕의 후계자다.”
하지만, 빌헬름은 어떨까.
그녀가 진짜 세아 성녀라면 반응하지 않을 수가.
“기사왕의 후계자······ 그게 뭐죠?”
······ 음?
예상한 반응과 거리가 멀다.
모른다도 아니고, 뭐냐니.
거짓된 반응은 아니다.
설마 빌헬름과 관련된 기억이 아예 지워진 건가?
걸리는 부분이 있어 되물었다.
“너는 누구인지 기억이 나나?”
“저요?”
세아 성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저는··· 누구죠? 아앗······! 목이랑 머리는 왜 이렇게 아픈 걸까요?”
스스로가 누구인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목이랑 머리가 아파?
나는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
동시에 이자벨라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
한참의 소란이 지나간 뒤.
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비록 기억은 상실했지만, 능력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녀를 얻었지 않나.
‘세뇌를 걱정할 바엔 차라리 기억상실이 낫다.’
마왕이 숨겨둔 신비와 저주를 제거했으나 마지막으로 걸리는 게 세뇌다.
내가 가진 신비와 성배로도 세뇌를 풀 순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적의의 신비와 저주의 잔재 따위만 남겨둔 채 마왕이 성녀를 미궁으로 보냈으리란 안일한 생각을 해선 안 된다.
특정 조건에서 특정 행동을 실행하게끔 세뇌를 걸어놨을 가능성이 컸다.
예컨대 여신교, 혹은 성기사를 만나면 그들과 합류해 사람들을 공격한다던가 하는.
‘내가 마왕이었으면 무조건 여신교와 관련된 밑밥을 깔아놨을 거다.’
내가 생각한 걸 마왕이 생각 안 했을 리가 없다.
“여길······ 넘어가면 되나요?”
세아 성녀가 눈앞에 놓인 붉은 워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워프는 대륙간 도시를 이동할 때 필요한······ 헉! 제 머릿속에 설명이 떠올라요.”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니까.”
“아, 그렇군요. 그런데··· 불길해요. 이 워프는 뭔가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 같아요.”
지금 우리 둘은 워프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침식을 위해 만든 워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침식은 중단되었으나, 헬이 정지시켜 둔 워프는 남아있었다.
바로, 지구와 연결되는 워프가 말이다.
성녀가 불길하다고 말할 정도의 강렬한 기운을 품은.
‘오직 침식을 위해 만들어진 워프다.‘
다른 워프와는 확실히 궤가 다르다.
아흐람이 1차 침공을 위해 배치했던 차원 워프에 가까운 느낌.
‘확률은 반반.‘
넘어갈 수 있거나, 넘어갈 수 없거나.
넘어갈 수 있다면 성녀가 올리버의 심장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
판게니아의 허드슨과 지구의 올리버는 양쪽 다 중요한 인재다.
‘나 혼자 미궁도시를 운영할 순 없다.‘
이자벨라도, 아이작도 도시 운영과는 거리가 좀 멀다.
앞으로 미궁도시를 운영하려거든 그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내가 미궁에 없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허드슨은 오로지 상재만으로 황금도시에서 자기 이름을 단 도박장을 일군 남자다. 레벨만 10이었으면 진즉에 시의원이 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적어도 돈을 굴리고 불리는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 가장 큰 도박장을 운영했던 실력도 어디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워프를 넘어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넘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더욱이 궁금한 건 이 몸, 란돌프가 지구로 향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지구로 직접 향한 바는 없었다.
그러나 이 특수한 워프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남겨둔 워프. 도전해볼 가치는 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완성될 때 단 한 번 ‘강제침식’을 일으키는 워프.
없어지기 전에 헬을 통해 일부로 정지시켜놓았다.
도전할 가치는 차고넘쳤다.
캬캬?
“헬. 워프를 정상적으로 가동시켜라.”
캬캬캬캬!
헬이 워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수아아아!
다시 파란 빛이 돌며 워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프는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사라졌으니, 그가 만든 워프 역시 사라져야 정상이었다.
유지시간은 길어야 30분.
이것도 헬이 아니었으면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가지.”
나는 성녀와 함께 심연의 워프를 넘어섰다.
작가의 말
++04:48 투구의 저주옵션이 삭제되고 세부묘사가 추가됐습니다.
+++ 05:05 글이 전체적으로 다듬어졌습니다.
백왕의 호출
영국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에딘버러.
에딘버러 도시 외곽의 워프 앞.
본래라면 군인들에게 통제되고 있어야 하는 그곳에, 단 두 명의 인원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멜슨이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그러나 올리버는 고집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체 누구와 언제 약속을 했다는 겁니까? 설마 이번에도 그분입니까?”
그분.
지금 성에 있는 남자, 박현명을 말하는 것이다.
멜슨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게임 친구인 줄로만 알았다.
허나 이제는 ‘단순한 게임 친구’가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생명유지장치에 들어간 그는 몇 날 며칠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그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문제는 표시된 ‘데이터’였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표시되는 모든 데이터가.’
압도적인 생명력과 재생능력.
근육은 끊임없이 소모되고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진다.
그 외의 모든 수치가 정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어떤 생명체에서도 볼 수 없는 데이터들.
‘마치 디맨션 워리어 같이.’
유일하게 그게 가능하다면, 강림하여 변신한 디맨션 워리어뿐이다.
그에 대한 데이터를 받아본 게 있는데 박현명과 매우 흡사했다.
해서 강림한 상태인 줄 알았으나, 멜슨이 알기로 강림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5일 이상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그럼 강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디맨션 워리어의 능력을 내는 건가?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지만 박현명은 올리버 도련님의 손님이었다.
‘올리버 도련님도 디맨션 워리어이시지.’
멜슨이 모르는 비밀은 없다.
성과 영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는 알고 있다.
주인을 존중하여 굳이 아는척하지 않는 것일 뿐.
이 워프로 찾아온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리라.
다만, 궁금할 따름이다.
대체 뭐가 이곳에서 나타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쩌어어억!
동시에.
워프가 일렁이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아······!”
그것을 본 올리버가 전신을 잘게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목도 한 사람 마냥.
기적을 눈앞에 두고 전율하는 것이다.
*
《로그아웃 되었습니다.》
눈을 뜨자, 성이었다.
생명유지장치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후 작게 혀를 찼다.
‘예상은 했다만.’
란돌프인 상태로 지구에 돌입하는 게 가능하다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해본 도전이었다.
그러나 넘어오지 못했다.
강제로 로그아웃되며 절단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성녀는? 세아 성녀도 못 넘어온 건가?’
일단 주변에 올리버와 멜슨이 없는 걸 보아, 미리 언질한 대로 해당 워프가 있는 곳에 발을 옮긴 듯싶었다.
그 찰나.
《해당 좌표에서 ‘침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30분간 ‘???’을 제거하지 않으면 ‘강제 침식’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눈앞에 해당 글귀와 함께 지도가 펼쳐졌다.
‘저 위치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지형.
······ 넘어오려던 워프가 있는 위치였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만든 워프와 연결된 곳.
해당 워프를 통해 넘어간 성녀를 ‘침식’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