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레벨 숙련도 제한 해제. 미쳤군.’
용검사는 검 숙련도를 무려 26레벨까지 해제해주는 개사기 클래스.
관련된 클래스 없이 보통의 무기 숙련도는 10Lv까지만 올릴 수 있다. 강화하여 극의 이름을 띄운 장비들을 착용해도 10레벨 이상으로 올릴 수 없다.
그동안 굳이 검 숙련도를 올리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극 철검 두 자루가 있기에, 어차피 10레벨 이상은 올릴 수 없으므로!
관련된 클래스를 가지면 보통 15레벨까지 해제된다.
20레벨까지 해제되는 클래스는 거의 없다.
있기는 한데 얻기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그 이상?
‘20레벨 이상은 말 그대로 계승하여 얻은 클래스들밖에 없다.’
고유의 무기, 초월한 인간, 혹은 어떤 위대한 존재로부터 계승하여 클래스의 격을 늘리면 가능하다.
숙련도 제한 26레벨이면 계승할 수 있는 클래스들 중에서도 최상급.
여기서 다시 26레벨을 넘으려거든, 관련된 별을 먹어 초월하면 된다.
“푸른 서광은 어디갔지?”
생각해보니 검성 라일리는 유일급의 검을 다룬다고 전해졌다.
바로 푸른 서광.
하지만 푸른 서광의 종적은 묘연했다.
「누군가에게 계승되었다.」
“검성의 계승이 완료되었다는 뜻인가?”
「그래. 내가 인간일 시절 불리었던 칭호와 격의 계승은 끝났다.」
검성.
떠오르는 건 딱 한 명뿐이다.
‘그라시아.’
공공연연하게 스스로를 검성이라 부르고 다니는 자는 그라시아밖에 없었다.
푸른 서광을 계승한 게 정말 그라시아라면.
검성으로서의 숙련도 제한 레벨이 몇인지 조금 궁금해진다.
「허나, 그것은 인간을 기준으로한 호칭. 용검사는 심연에 가라앉기 직전 마왕을 상대하며 각성한 클래스다. 아쉽게도 저 껍데기와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했지만······.」
과연.
용검사는 마왕을 상대하며 용의 피를 제어하기 시작했을 때 각성한 클래스라는 의미였다.
결국 실패하고 패배한 뒤 심연에 가라앉았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저 껍데기, 지고룡을 자신이 상대하고 싶어하는 거고.
‘어쩐지 생소하더라니.’
라일리는 검성으로 유명했지, 용검사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에 가서 각성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모를 만도 했다.
《20초 이후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양보할 순 없다.
용검사의 계승을 위해선 라일리의 인정이 필요하니까.
「지고룡을 너무 얕봐선 안 될 것이다. 저 용은 피에 의해 파괴본능만이 남은 악 그 자체. 오랜 시간 겪어온 내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
지고룡은 파괴본능만이 남은 껍데기였다.
그럼에도 결국 자기자신일텐데, 악 그 자체라.
「옥좌의 주인이여. 부디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결코 그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검의 길을 걷지 않던 자가 사용하기엔 버거운 그릇이기 때문이니.」
라일리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무시한 채 천천히 몸을 풀었다.
《5초 이후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몸이 떨린다.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기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별로 계승한 빌헬름의 기억.
과연 이 몸으로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구제국의 가장 위대한 6각의 영웅 중 한 명, 검성 라일리.
그의 능력을 빌려 닿을 수 있는 한계가 심히 궁금했다.
나는 검을 양손에 쥐어보였다.
이후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찬란한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빛을 걷으며 나아갔다.
*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구.
저 하나하나가 성벽을 허물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건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심연의 팔이었다.
발 디딜틈 없이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 공격들.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검기로 잘라낼 수는 있으나 비효율적이다.
「심연에 가라앉아 껍데기는 더욱 강해졌다. 저 심연의 팔들은······ 조심해라.」
라일리도 지고룡의 공격 패턴이 익숙하지 않은 듯보였다.
심연의 저 팔들은 본래는 없던 것.
없던 게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빛의 옥좌에 앉아 있으면서, 저 손들의 정체를 파악한 뒤였다.
《지고룡의 신비 ‘깊은 심연’을 파괴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심연의 수많은 팔들.
역시나.
이처럼 간혹 신비를 숨기고 능력처럼 구는 괴물들이 있다.
능력과 신비를 구분할 수 없게하는 이유는 당연히 숨겨야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궁의 벽에 놓인 것과 같은, 미궁 그 자체의 능력처럼 보이려한 것이다.
‘귀찮은 손은 제거됐다. 이제······.’
바닥을 뒹구는 손들만 없으면 움직임도 자유롭다.
쏟아지는 마력구를 검막으로 쳐내며 허공에 떠있는 지고룡을 바라봤다.
‘날아보자.’
*
「······.」
라일리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용검사의 능력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지고룡이 심연에서 얻은 신비를 파괴하고, 수많은 탄막을 하나도 빠짐없이 쳐내며, 틈을 찾아, 미궁의 벽을 밟고 날아올랐다.
키아아아!
······ 그리고 지고룡의 날개 한쪽에 긴 검상을 남겼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기에, 라일리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말로는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작해야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육체의 변화에 적응하고, 지고룡의 공격을 막으며, 반대로 공격할 루트를 그 시간 안에 짜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몸의 변화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폭사당해야 정상이었다.
만 명 중 만 명이, 십만 명 중 십만 명이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예외는 없다.
······없었어야 했다.
키아아아아!
지상으로 추락한 지고룡은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지고룡을 중심으로 원형의 화염이 공간 전체에 퍼져나갔다.
충격파와 함께 퍼져나가는 저 화염은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찢어발긴다.
단순히 검기로 잘라낸다 하여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란돌프는 다시 검을 양손에 쥐었다.
그리고.
“후웁-!”
다가오는 화염을 크게 내리쳤다.
그럼에도 충격파와 화염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저 란돌프를 통과해, 지나갔을 뿐이다.
그것을 본 라일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공명···?」
검과의 공명(共鳴)이라니!
검 그 자체가 되어 공격을 흘려냈다.
하지만 저 공명의 검은 검기를 피워낸 이상의 기술이다.
그걸 어찌 검의 길을 걷지 않았던 자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이어서 벌어지는 장면 또한 가히 압도적이었다.
란돌프는 검이 됐다.
그리고 용이 됐다.
그의 전신에 지고룡의 형상이 떠오른다.
잘못본 게 아니다.
검기의 형상이, 마치 지고룡과도 같은 모습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고룡과도······ 공명 한다고······?」
검을 넘어 용검사가 지닌 기질과도 공명하고 있었다.
마왕과 마주하며 라일리 역시 겨우 각성했던 용검사 클래스.
하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용검사란 용과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완벽하게 공명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허나,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신이 이룩하지 못했던 길을, 고작 이 짧은 시간 만에 개척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6각의 일원이며 검성이라 불렸던 자신조차도 넘어서는 재능이라니.
‘재능이 아니다. 저건, 재능이라 할 수 없다.’
허나 저것은 단순히 재능이라 설명하기도 부족한 영역이었다.
한 번 경험하고 걸어온 길을 다시 걷는 것과 같은.
창조도, 개척도 아닌, 마치 알고 있는 길을 더욱 빠르게 달리고 있을뿐인 것 같지 않나.
자신이 이제 막 만들기 시작했던 그 길을.
이미 알고 있으며, 완성해놨다는 게.
··················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끝
검성 라일리와 지고룡의 관계.
그 관계는 마치 나와 빌헬름 같았다.
내가 키운 캐릭터였다고는 하나, 내가 아닌.
나라고 할 수 없는 막연한 존재.
라일리가 지고룡을 껍데기라 부르며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는지.
‘그럼 나는 빌헬름인가?’
철학적인 물음은 아니다.
그저 내가 키우고 별의 기억으로 계승한 빌헬름을,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일 따름이었다.
현실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라일리 역시 같은 고민을 했으리라.
허나 라일리는 지고룡을 부정한 채 악으로 규정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고민을 접었다.
나는 빌헬름이 아니다.
하지만, 빌헬름이 될 수 있다.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에 도달할 것이다.
‘재밌군.’
지금은 그저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게 즐거울 따름이었다.
고민 따위 할 틈이 없다.
이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들.
보정된 육체는 상상만 해왔던 모든 걸 재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했던 플레이와 빌헬름의 기억이 합쳐지자, 나는 오롯이 빌헬름이 되었다.
《‘천지개벽’의 ‘지’를 재현합니다.》
공명한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공명했다.
천지개벽의 지(地).
공명하여 모든 공격을 흘려내는 검술.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지고룡의 공격을 상쇄했다.
‘더.’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이 환호를 질러댔다.
하지만 부족하다.
‘조금만 더.’
한계를 넘어선 한계를 원한다.
이 정도로는 지금 이 해후(邂逅)를 완전하게 풀어낼 수 없다.
그러니까, 더 강하게 나를 몰아 붙여봐라.
‘더 해보란 말이다.’
전력을 다해서 나를 밀어 붙여보란 말이다.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내 한계 역시 늘어날 테니까.
하다못해 지(地)를 넘어 개(開)까지.
그 영역에 닿을 수만 있다면, 머릿속의 안개가 걷힐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내 앞에 거대한 용이 있었다.
지고룡.
모든 걸 파괴하는 껍데기이자 악으로 규정했던 그것이 공격을 멈춘 것이다.
‘왜?’
왜 멈춘 걸까?
갈증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건만.
이윽고 지고룡과 두 눈을 마주했다.
지고룡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라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생명체마냥.
「그럴, 리가······.」
검성 라일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피에 굶주린 용이 공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용으로 화한 저 지고룡은 파괴행위를 멈춘 적이 없었으므로.
저렇게 지그시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이 현상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고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고룡은 검성 라일리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용검사로 라일리가 각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고룡의 피. 라일리의 저주받은 반쪽은 그에게 수없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검성 라일리는 지고룡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용의 피를 저주받았다 여겼으며, 마음대로 화하여 파괴행위를 일삼는 지고룡을 결코 자신의 일부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6각.
위대한 영웅이었으니.
“라일리여. 그대가 마지막 순간에 용검사로 각성한 것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는가?”
마왕을 상대로 모든 것을 쏟아내서 이뤄낸 각성?
그런건 만화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그저, 한순간 라일리는 받아들인 것이다.
지고룡을.
저주받은 피의 힘을 사용해서라도 마왕을 막고 싶었으니까.
「······ 내가 문제였다는 말인가?」
“그대가 외면했기에, 그대의 반쪽은 세상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문제가 아님에도.
라일리는 자신의 반쪽을 악으로 규정해왔다.
갈라진 피, 갈라진 자아.
극명하게 나뉘어버린 그것은 제대로된 학습을 할 수 없었다.
모든걸 라일리의 반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애당초 인간의 사회에서 용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용은 인간들의 두려움을 먹고 공포를 부르는 자가 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인 즉.
‘용검사도 반쪽이었군.’
용검사.
용의 피로 말미암아 검성의 기술을 사용하는 클래스.
지금 이것 또한 반쪽이라는 의미다.
결국 라일리는 제대로 용의 피를 사용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렇게 이룬 반쪽짜리 각성.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지고룡에게 닿았다.
수없이 공방을 오가며 어느덧 나는 지고룡과 공명하고 있었다.
용검사의 기질, 설령 반쪽짜리 각성이라 할지라도 지고룡과 공명하기엔 충분했으니.
「이건······?」
그러나 이번 공명의 대상에는 라일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육체를 매개체로 라일리와 지고룡 모두를 묶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