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유로 소환할 수 없는 건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니냐.’
아예 영혼이 없는 건지, 찬란한 광명으로는 소환할 수 없는 건지, 혹은 보유한 황금률의 조각이 부족한 것인지 등등 이유는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불친절함의 끝을 달리는 문구에 허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쿠아아아!
쿵! 쿵! 쿵!
바깥이 요란하다. 지고룡이 아직 포기는 안 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놈의 힘이 빠지길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작전이겠으나.
‘아직 쌩쌩하다.’
이미 하루를 넘게 싸운 놈치곤 쌩쌩했다.
가만히 시간만 흘러가면 침식률만 높아질 것이다.
빛의 옥좌에서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운율에 맞춰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중 하나.
가장 확실하게 지고룡을 사냥할 수 있는 자.
‘그라면, 가능하겠군.’
*
플레이어 톡은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 있었다.
-...내가 본 이름이 정말 맞나?
-미궁에서 란돌프 본 사람 있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냥 이름 도용 아님?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는 도전자의 이름은 직접 정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검성이라 불리는 건 그라시아 뿐이었고, 반대로 민트초코맛있어요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란돌프’라는 이름도 도전자가 정하기 나름이라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진짜 란돌프가 맞냐’로 불이 붙었다.
-그간의 행보를 보면 란돌프 아닐듯
-ㄴㄴ압도적인 성적으로 올라오고 있는데 처음부터 심연 미궁 도전 안하는 게 이상했긴함
-아니, 생각해봐. 메인퀘스트 6까지 란돌프 본 사람 있음? 그 이름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사람 있냐고?
-동의한다. 다 어디서 조용히 진행했지. 우리가 모르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심지어 1차 침공도 혼자 막았잖아
-그러니까. 그런데 모두가 들어가는 ‘심연 미궁’에 도전한다? 그간의 행보랑 너무 다르지 않냐?
-1차 침공을 혼자 막을 정도면 이미 빌헬름급 수준으로 성장한 거 아님? 그럼 당연히 심연 미궁 도전할거 같은데
-아오 답답아, 그게 말이 되냐. 빌헬름 급으로 성장하려면 별 다섯 개 먹고 유일급 장비도 여덟 개는 착용해야하는데 그 정도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음
-말이 별 다섯 개지, 빌헬름은 단순한 별 다섯 개가 아니지 않음?
-뭐... 그것도 소문뿐이고 본인만 알겠지. 어쨌든 빌헬름은 대원정 일으키면서 자기 스펙에 대해 대충 말해줬으니까, 그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란돌프는 아직 그 수준은 한참 멀었음. 위험한 모험을 할 것 같진 않아
-그런데 그 ‘스펙’도 좀 말이 안 되긴 한데. 어떻게 인간이 5성에 유일급 8개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여간 지금 도전한 란돌프는 가짜라고. 괜한 믿음 갖지 말고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나 준비해야함
정론이었다.
란돌프라는 이름은 단순히 혼란을 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자 사용하는 가명으로 란돌프를 택한 것이다.
왜 하필 란돌프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성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도만 하고 있을 바엔 앞으로 벌어질 ‘2차 침공’에 대비하는게 여러모로 현명한 판단일 터.
그때였다.
-갔다왔다. 사왕만나고 옴
-미친. 살아있었냐?
-이놈도 가짜네
-진짜 갔다옴. 생각보다 말이 통하던데? 내가 미궁 티켓도 갖다가 바치니까 기특하다고 팔 하나만 잘라갔어
-어케 살았누
-저새끼 사람인척하는 언데드다 내가 봤다
-잘린 팔 하나는 치료함?
-엘릭서로 치료함. 잘 안붙어서 죽는줄
-너도 한가닥 하는 놈인가보네
-그런데 란돌프가 내가 생각하는 그 란돌프냐? 사왕도 아는 눈치던데
-사왕이 란돌프를 알아?
-그게 무슨 소리냐?
-개소리 왈왈!
사왕을 만났다는 사람의 말에, 모두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사왕이 어떻게 란돌프를 안단 말인가?
혹시 여태껏 진행해온 압도적인 메인퀘스트의 점수들이 사왕과 관련되어 있는걸까?
허나, 말이 안 된다.
크람델의 사주력은 인간을 증오한다.
그들을 마주하고 산 사람은 없다.
그러니 지금 사왕을 만났다는 사람의 말도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사왕이 기특해서 팔 하나만 잘라갔다는 게 말이 안 되므로.
-란돌프 이름 뜨니까 엄청 좋아하던데? 음. 그래서 살려준 것 같기도...
-사왕이랑 란돌프가 관계가 있다고?
-나도 자세히는 몰라. 도전자 이름 뜨자마자 갑자기 껄껄 웃더라고. 그리고 팔 하나 잘라감
-그래도 팔 하나는 잘라가네...
-잔악무도한 새끼...
-기분이 엄청 좋아야 팔 하나 잘라가는구나
-대체 무슨 관계인거지?
-그럼 그동안 란돌프가 크람델에 있었다는 말인가?
-크람델에 있었으면 아무도 모를 만도 하네
-인간이 어떻게 크람델에 들어가냐ㅋㅋㅋ말이 되는 소릴
크람델은 인간이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도시다.
그곳에 란돌프가 들어가서 사왕과 관계를 맺는다?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들의 개념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란돌프라면, 그 팬텀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라?
-뭐냐 지금?
-너희들도 봄?
게시판 전체가 다시 물음표로 도배가 됐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공지 때문이다.
-누군가가 미궁 속에서 신화의 완성에 도전한다는데?
-뭔 신화가 완성된다는 거야?
-...??? 무슨 말이야 대체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임?
*
《‘검성 라일리’의 영혼을 소환했습니다.》
《‘찬란한 빛의 옥좌’에 어울리는 명예로운 자입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500배 빠르게 소모됩니다.》
《히든 퀘스트 : ‘실패한 신화의 완성’이 시작됩니다.》
옥좌로 소환한 건 다름아닌 검성 라일리였다.
심연에 가라앉았던 그의 영혼이, 황금률의 문에 의해 다시 나타났다는 문구.
그 문구를 떠올리곤 라일리를 소환한 것이다.
「지고룡······.」
목소리가 들린다.
검성 라일리, 그가 마치 내 머릿속에서 말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용이었다.
지고룡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존재.
하지만 인간이기도 하였다.
반인반룡.
용의 피를 이은 인간 말이다.
「나의 반쪽, 나의 저주여.」
그러나 용의 피는 항상 라일리를 괴롭혀왔다.
피는 막강한 힘과 재능을 주어 검성의 칭호까지 갖게 해주었으나, 용의 피에 눈을 뜰때마다 주변의 모든 게 초토화되었다.
용의 피는 라일리에게 있어서 저주였다.
분리하려 하였으나, 끝끝내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6각의 동료들이 힘을 합쳐 제압해주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용이 되어 파괴를 일삼았을 것이다.
저 저주의 형상은 그의 실패를 뜻한다.
‘다른 6각의 영웅들에 의해 만들어져 와전된 신화. 라일리는 그 신화를 완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실패한 신화의 완성’이었다.
「저 저주가 눈앞에 있다는 건 심연 그 자체가 되기 직전이라는 뜻이겠지.」
라일리는 심연에 가라앉았다.
이후 자신을 봉인했다.
마지막 봉인을 지키는 것으로 ‘지고룡’이 되는 걸 택했다.
그 정도로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될 수는 없다는 강한 의지.
“걱정하지 마라. 도시가 침식되는 일은 없을 테니.”
캬캬!
헬이 어깨에 앉았다.
처음 지고룡의 등장에 떨더니, 이제는 적응이 완료된 모습.
헬이 이곳에 있는 이상 침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헬이 ‘거부’한다면, 워프로 인한 침식은 일어날 수 없다.
「과연······ ‘천상인’과 ‘심연 그 자체인 자’가 함께 만든 작품중 하나로군. 거기에 ‘빛의 옥좌’라······ 너는 누구지? 처음 보는 자일진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말투다.
오랜시간 심연에 잠식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궁금한 건 많지만.
“잡담 나눌 시간 없다.”
시간이 없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녹고 있다.
그것도 500배로 빠르게.
소유한 조각이 1,500시간넘게 있으니 적어도 3시간 이상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내게 몸을 맡기거라. 나의 저주를 내 손으로 끊겠다.」
“내가 한다.”
「아서라. 너는 검사 클래스조차 아니지 않느냐? 설령 검사 클래스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나의 ‘용검사’의 격에는 미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능력을 다룰 수 있다는 말.
인정한다.
그보다 그의 능력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내게도 기회였다.
‘용검사. 한번도 등장한 적 없는 클래스다.’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클래스.
진정한 반인반용의 라일리만이 지닐 수 있었던, 격이 다른 이름.
그러나 이미 나는 ‘별의 계승자’라는 클래스를 지녔다.
한 사람은 한 개의 클래스만을 지닐 수 있다.
나중에 클래스를 초월시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골자가 되는 이름은 하나만 소유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게 맡겨라, 검성 라일리.”
「주도권은 너에게 있다. 허나 잘 생각······ 음?」
스으윽.
순간, 내 손 위로 비늘이 덮힌다.
지고룡의 것과도 같은 비늘이.
곧이어 피부 표면으로 피가 올라오며 붉은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히든 특성 ‘올마스터’에 의해 일시적으로 ‘용검사’ 클래스로 적응합니다.>
<‘검성 라일리’에게 인정받으면 ‘용검사’ 클래스를 계승할 수 있습니다.>
<스킬 ‘드래곤 소드(10Lv)’를 사용합니다.>
<‘용검사’ 클래스에 의해 검의 숙련도 제한이 26Lv까지 해제됩니다.>
<‘검성 라일리의 혼’에 의해 숙련도가 최대치까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보정됩니다.>
<‘검성의 위압’에 의해 능력치가 추가됩니다.>
······.
···.
끊임없이 떠오르는 글귀들.
적응을 완료한 뒤, 붉은기운을 띠는 드래곤 소드를 휘두르자.
잔상과도 같은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검의 숙련도 20레벨을 돌파하면 나오는 특유의 기운.
하지만 단순히 레벨에 도달했다고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검기를 피워내기 위해선 특별한 요령도 필요하다.
제대로 검과 일체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저 적응했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게 결코 아닌.
오롯이 스스로 도달한 자만이 가능한 강자의 증표!
「······ 어이가 없군.」
그것을 본 검성 라일리가 경악했다.
날아보자
검기(劍氣)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갈고닦아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검기를 피워내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검사가 대부분이었다.
10년, 20년을, 그 이상을 수련한 자조차도 깨달음 없이는 피워내는 것이 불가능한 게 검기이건만.
그것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피워내고 있었다.
‘저자는 검사조차 아니지 않은가. 헌데······.’
검사 클래스를 보유하지 않았다.
검의 숙련도 자체가 얄팍하고 낮다.
검기는커녕 자신의 스킬을 다루는 것도 불가능해야 정상이다.
‘검사만이 검기를 피워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나.’
물론 검이 아닌 창이나 활에서도 검기를 피워내는 자들은 있었다.
극의(極意)를 이루어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자들.
‘그조차도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눈앞의 남자는 그 어떤 무기의 대성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검성 라일리.
그는 상대의 실력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예컨대 숙련도의 레벨 따위를 말이다.
진정한 강자는 높은 숙련도와 함께 깨달음을 이룬 존재라 여기기에, 단순히 육신의 레벨만 높인 종자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왔다.
그리고 그런 라일리가 보기에 이 남자는.
‘······형편없다.’
형편없었다.
레벨 10에도 이르지 못한 검의 숙련도.
제대로 검을 익히지도 않은 자다.
아무리 자신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검의 숙련도를 최대치로 찍었던들,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할 기지와 깨달음이 있을 리 없다.
자신이 기존에 쥐던 검의 천 배가 넘는 무게의 검을 갑자기 들게 되었는데, 그 검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조리가 맞지 않는 게다.
본래부터 천 배 무거운 검을 들었던 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버거워하며 포기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검기를 피워냈다.
검기를 우연으로 피워내는 일 역시 있을 수 없다.
‘검술마저도 그럴까?’
빛의 옥좌와 천상의 정령을 가진 걸 보면 예사롭지 않은 자임은 이제 확실히 알겠다.
검기를 피워냈다면 과연 검술은 어떠할지.
검성.
그는 옛적 검의 정점을 찍었던 자.
하늘아래 검을 맞대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6각의 당당한 일원으로 들어가 영웅이 되었다.
구제국을 떠받든 6각 중에서도 특출나던 자가 바로 그였으니.
「버거우면 언제든지 몸을 넘기거라. 지고룡은 그저 검기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존재. 나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버겁다면 언제든지 고집부리지 말고 주도권을 넘겨라.
자신의 몸을 자신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지고룡의 상대법을 자신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흐음······.”
스킬을 사용해 검을 휘두르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본다.
보정되고 추가된 능력치와 라일리의 영혼에 새겨진 스킬.
용검사라는 클래스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다.
전신에 활기가 돋고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몸 상태가 달라졌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적응하는 데 한세월이 걸리겠으나.
“나쁘진 않군.”
《‘찬란한 빛의 옥좌’에 새겨진 접두사 스킬 ‘찬란한 광명’을 사용했습니다.》
《접두사가 소멸하여 60초 이후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기본유지 기능, 패시브 옵션을 말하는 것이다.
찬란한 빛의 옥좌에 앉아있으면 주변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종의 무적기.
아쉽긴 하지만, 공략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다.
‘찬란한 접두사는 또 띄우면 된다.’
······자주 띄우기엔 들어간 재료가 어마어마하긴 했다.
탐욕에게서 강탈한 재물 절반과 신화등급의 샤티로스의 활이 소모됐으니까.
그러나 용검사 클래스를 얻을 수 있다면 본전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