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은여우 가면은 ‘사명’에 의해 미궁의 망자를 제거해야한다고 말했다. 라일리를 뒤덮은 심연을 ‘망자’라고 칭한다면, 그걸 거둬내는 게 사명이었던 걸까.
머리를 털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
“라일리, 오롯이 위대한 검성이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라일리에게 말을 걸었다.
황금률의 문을 넘으며 나타난 문구 중 ‘영혼이 되돌아왔다’는 내용.
그 내용에 따라, 위대한 검성이라 불렸던 라일리가 정신을 되찾았을 수도 있으므로.
곧장 공격해오지 않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평화.
이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
평화로운 해결이야 말로 21세기의 화두였다.
캬아아아아-!
지고룡이 날개를 펼쳤다.
위압적힌 행태를 보이며 날개를 펼치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력구가 맺히기 시작했다.
평화 협정은 부결됐다.
“···해보자는 거로군.”
쾅!
콰콰콰쾅!
콰르르릉!
*
이상하다.
김하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 sns와 유튜브 등을 모조리 검색하여 나타난 결과는 더더욱 이상했다.
“모든 워리어들이 활동을 멈췄어······?”
“그게 무슨 소리야, 김원?”
옆자리에 앉은 서정아의 물음에 김하나가 엄지를 한차례 물어뜯곤 입을 열었다.
“워리어들 중에 지금 활동하는 사람이 없어요.”
“에이, 착각이겠지. 방금 전까지 카톡·········을 아무도 안받네?”
핸드폰을 열고 확인한 서정아가 이맛살을 구겼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상대들이 갑자기 답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서정아는 ‘김하나와 커피 한잔’을 조건으로 한국의 남자 워리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답장을 해오던 그들 모두가 한순간에 대화를 멈춘 것이다.
‘얘네들이 미쳤나?’
물론 김하나는 이 조건에 대해 모르지만, 알고 있는 서정아로선 정말로 의아한 일이었다.
실시간으로 답장해오던 놈들이 하나같이 빠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언가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거 같아요.”
“집중한다니? 뭐에?”
“워리어들은 특수한 상황에 대해 미리 알고 있잖아요. 마치 누군가가 고지를 해주는 듯이.”
“그런 썰이 있기는 했지.”
“모든 워리어들이 정신을 집중해야할만큼 커다란 일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일전의 침공처럼?”
김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모든 워리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활동을 멈췄다.
이 비슷한 적이 과거에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침공의 순간에.
하지만 그때는 라이브 방송을 켜놓는 워리어들이 꽤 있었다.
결과적으로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워리어들 모두가 침공에 대해서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는 게 정론이었다.
김하나가 의문 하나를 더 꺼냈다.
“그라시아가 한국을 왜 떠났을까요?”
“침략 끝났으니까 본토로 돌아간 거 아니야?”
“그라시아에게 가려졌지만 상당한 숫자의 워리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한국을 떠났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흠···.”
“떠나기만 한 거면 좋은데 하나같이 잠적했잖아요.”
떠난 자들.
그라시아를 포함한 영웅들.
그들 모두가 잠적했다.
이로 인해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람은 김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구글에 검색하자 관련된 기사들이 주루룩 떠올랐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갑자기 사라진 영웅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메이저 언론사에 실리지 않았을 뿐, 의문을 감추지 않고 기사화한 기자들은 해외에도 많았다.
뿐만이 아니다.
‘박현명씨를 분명히 공항에서 봤어.’
잘못봤을 리가 없다.
박현명. 그가 공항을 나서는 걸 분명히 봤다.
심지어 그라시아와 같이 SGBAC으로 들어갔다.
SGBAC은 전용기를 타는 VIP들을 위한 출항공간.
설마 박현명이 숨겨진 재벌가의 아들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현명씨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퇴사한 평범한 일반인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 갑자기 전용기에 탄다고?
어쩌면, 생각보다 엄청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라시아도, 박현명도, 그리고 수많은 워리어들도 해외로 향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다발적으로.
왜일까?
툭!
김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찾아보죠.”
“뭐를?”
“워리어요.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우리한테 제대로된 대답을 해줄 워리어가 있을까?”
“있어요. 분명히. 하지만 집단에 속한 워리어는 안 돼요. 개인. 철저한 개인을 찾아야만 해요.”
“그런 게 있어······?”
있다.
자신에게 영웅들이 가짜라는 걸 몰래 메모지에 적어서 알려준 누군가처럼.
말 하고 싶으나, 말할 수 없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아야한다.
은둔자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숨어있는 자들을.
*
마스터가 미궁에 다시 입장했다.
‘란돌프. 놈이 라일리에게 도전했다고?’
참을 수가 없었다.
란돌프란 이름을 가진 다른 누군가일 가능성도 있지만,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했다면 그건 분명히 팬텀일 터.
녀석에 의해 칼을 잃었다.
갈고 닦은 칼. 숨겨놓았던 수들이 심연에 매몰되어 몰살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판게니아.
“미궁 상인에게서 필요한 걸 모조리 쓸어와라.”
“예.”
“따르겠습니다, 마스터.”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미궁을 돌며 미궁상인에게서 특수한 물건을 구매했다.
바로 ‘조건 추가의 거울’이다.
‘상대의 이름을 알고, 미궁에 입장해있다면 거울을 쓸 수 있다.’
이미 미궁에 도전한 대다수의 도전자들이 로그아웃 한 상황.
미궁상인은 곳곳에 넘쳐흘렀다.
그들을 찾아 조건 추가의 거울을 모조리 매입했다.
이어 열 개가 모였을 때.
<‘조건 추가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조건 추가의 거울’을 사용할 상대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열 개의 거울을 사용해, 열 개의 조건을 추가한다.
한순간에 추가되면 놈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은 팬텀의 실책이다.
오만한 놈.
마스터가 웃으며 말했다.
“란돌프.”
<‘란돌프’가 미궁 내에 존재합니다.>
아!
역시. 놈이 있다.
아직도 있다면,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팬텀뿐일 터!
마스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조건’이 추가되지 않습니다.>
<‘저주 불가’ 상태입니다.>
“······.”
마스터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
주변이 폭사한다.
쉴 새 없이 폭발하며 지면이 뒤집혔다.
하지만, 지고룡의 공격은 내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찬란한 빛의 옥좌’가 발현합니다.>
찬란한 빛의 옥좌!
손가락에 낀 반지에서 찬란한 빛이 점멸하며 옥좌의 형태를 띄었다.
그곳에 앉아, 나는 가만히 지고룡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유일급 장비. 모든 것을 쏟아내어 만든 건 바로 이 반지였다.
이 반지는 붙은 접두사에 의해 능력을 달리한다.
【찬란한 빛의 옥좌(찬란한 유일급)】
-먼 옛날, 태양을 떠받든 신이 앉았다고 전해지는 빛의 옥좌입니다.
-빛의 옥좌에 재물을 바쳐 능력을 개방하십시오.
-붙은 접두사에 따라 빛의 옥좌가 가진 능력이 달라집니다.
-현재 붙은 접두사 : 찬란한
-찬란한 빛의 옥좌에 앉으면 빛이 점멸하는 모든 공간의 공격을 무효화시킵니다.
-‘찬란한 광명(20Lv)’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찬란한 광명’ 사용시 접두사가 소멸합니다.
모든 공격 무효화!
내가 옥좌에 앉아있는 동안은 아무리 지고룡이라 할지라도 내게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지름은 2m 정도에 불과하나, 위치고정의 무적기다.
하지만 무한정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시간에도 침식은 계속해서 진행중이었으니.
구오오오오-!
지고룡이 입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이어 브레스를 내뱉었지만 여전히 내게 닿지는 않았다.
“그게 전부냐? 고작 그 정도로 내게 닿을 수 있을 것 같나?”
지고룡을 도발했다.
놈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다.
하지만 브레스마저 통하지 않자, 지고룡이 멈춰섰다.
그리곤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아아아아.
스아아아아아아!
순간 모든 바닥에서 ‘손’이 나타났다.
심연의 손.
모든 것을 흡수하는 심연의 망령들!
억겹의 손들이 빠르게 옥좌에 도달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빛의 장막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였다.
‘앞이 안보이는군.’
문제는 시야다.
심연의 손에 둘러싸여 시야가 가려졌다.
저 공중에서 지고룡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선 패턴을 보겠다는 계획도 물거품이다.’
작게 혀를 찼다.
빛의 옥좌에 앉아 놈의 패턴을 모조리 확인한 뒤 재도전하려는 계획이었다.
활을 쏘고 싶지만, 샤티로스의 활도 모조리 재료로 바쳤다.
가장 좋은 접두사를 띄우기 위해서 말이다.
‘찬란한 광명.’
그리하여 얻어낸 찬란한 광명.
20레벨의 스킬이라는 것 외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빛의 옥좌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접두사에 따른 능력은 미정인 탓이었다.
사용하는 순간 찬란한 접두사가 소멸되는 1회성의 스킬.
이걸 사용해야할까?
이대로 시간만 버티는 건 비효율적이다.
지고룡은 내게 자신의 패턴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찬란한 광명(20Lv)’을 사용합니다.>
<오직 찬란했던, 영광스러운 자의 혼을 옥좌로 불러올 수 있습니다.>
<불러온 혼의 격에 따라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빠르게 소모됩니다.>
과연. 사용한 뒤에야 이게 무슨 스킬인지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웅들.
그들 중 한 명의 혼을 불러와 싸우는 스킬이다.
어떤 식으로 작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옥좌로 불러온다면, 아마도 앉아있는 내게로 강림되는 형식이겠지.
찬란했던, 가장 영광스러웠던 존재.
순간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지고하며 위대한,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이룩했던 최강의 존재들!
그중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누구를 불러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겠는가?
격이 다르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라일리와 관련된 옛 영웅들이었다.
검성 라일리와 함께 ‘6각’이라 불리며 세계를 오시했던 자들.
그들 중 한 명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었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오로지 입으로 전승되어왔을 따름. 정확한 무력 데이터를 갖추지 못한 채로는 도박과 다름없다.
‘가장 확실하게 데이터를 갖춘 존재라면.’
있기는 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승기를 점칠 수 있는 이가.
바로 나다.
······기사왕 빌헬름.
기사왕 빌헬름이라면, 가능하다.
지고룡과 그 너머마저도.
‘빌헬름의 영혼이라.’
그러나 기사왕 빌헬름에게 영혼이 있을까?
아이작과 이자벨라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내가 플레이한, 혹은 모든 플레이어가 플레이했던 캐릭터에게 영혼이 있는가?
그냥 인공지능 같은 건 아닐까?
만약에 있다면 이 몸, ‘란돌프’의 영혼은 어디에 있나?
‘해보면 그만인 것을.’
소환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찬란한 빛의 왕좌’가 죽은 자의 영혼을 소환해내는 메커니즘을 지녔다면 소환 여부에 따라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터.
‘어차피 아끼다가 똥 된다.’
내가 플레이한 판게니아는 쓸 수 있을 때 써야 하는 게임이다.
아끼다가 죽으면 초기화되어 날아가는 탓이다.
정말로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게임도 없으리라.
게다가 소환에 성공한다면 클리어할 수 있다.
심연 미궁.
그라시아도, 민트초코도, 제국도 실패한 이 미궁의 정복을!
“빌헬름.”
빛의 옥좌에 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환할 수 없습니다.>
곧이어 튀어나온 짧은 문장 하나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