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히 눈살을 찌푸렸다.
······ 그럴 리가 없는데.
“음.”
············ 세아 성녀다.
틀림없다.
별에게서 계승한 빌헬름의 기억.
그 기억속의 얼굴과 지금 눈앞의 얼굴이 일치했다.
뿐만아니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도 틀림없이 세아 성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예상하지 못한 때에 그녀와 재회한 것이다.
“감히 여왕님을!”
“죽어라!”
아이작과 이자벨라도 바바리안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만한 충격은 오랜만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 저주와 붕괴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그런데 왜 미궁에 혼자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살아있냐가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살아있는 거지?’
왜?
누가, 무슨 의도로?
내가 기억하는 대원정 막판의 그 상황에서 세아 성녀를 살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마왕.’
혹, 마왕이 개입한 건 아닐까.
무언가의 의도를 지닌 채 이곳 미궁에 집어넣은 건 아닐까?
“으음······.”
때마침 세아 성녀가 짧게 신음하며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툭!
세아 성녀가 그대로 다시 기절했다.
*
탐욕의 전투능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긴 하였다.
레벨은 높지만 겜블 쪽으로 몰려있다면 실제 무력 자체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탓이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을 뒤엎고 탐욕은 사막 여왕을 어렵지않게 제압해냈다.
‘제압’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지한 듯 죽이진 않았다.
날개와 같은 가죽을 뜯어내고, 목덜미를 쥔 채 무릎으로 사막 여왕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압이다.
‘훌륭하군.’
썩어도 준치라고.
탐욕 역시 심연의 지배자였으니, 전투능력을 의심한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고개를 돌려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이자벨라. 네가 죽여라.”
그녀에게 사막 여왕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주었다.
아까와 달리,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두려움으로 떨리지 않았다.
-사, 살려다오.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단다.
“······ 괜찮습니다. 더이상 여왕이 두렵지 않으니까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다된 밥에 숟가락만 얹지는 않겠다는 태도다.
허나 사막 여왕은 이자벨라의 영원한 트라우마였다.
그것을 직접 제거하게 할 셈이었지만, 이미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도리어 이자벨라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 강렬해졌다.
괜찮다는데 억지로 시킬 수도 없는 노릇.
어깨를 으쓱하며 샤티로스의 활을 꺼내들었다.
휘이익!
푹!
-악!
짧은 비명과 함께 공포 효과가 새겨졌다.
무작위 능력치도 10이나 깎여나갔으리라.
휘이익!
푹!
나는 계속해서 활을 쐈다.
화살에 맞을 때마다 무작위 능력치가 깎여나간다.
-머, 멈춰! 제발 멈추렴! 제발! 악!
그것은 실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약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며 죽어간다는 건.
피를 흘리고, 저항할 수 없는 죽음에 몸을 떤다는 건 말이다.
수십발을 쏘아내자, 더 이상 사막 여왕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모든 능력치가 0이 됐으니까.
축 늘어진 채 입하나 뻐끔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서야 사막 여왕은 명을 달리했다.
《‘사막 여왕’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업적 ‘격이 다른 적을 죽인 도전자’를 획득했습니다.》
《명예가 200 상승합니다.》
《‘마혈족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226h를 획득했습니다.》
《점수 1,000점이 추가됩니다.》
점수 천 점.
이로써 2,350점.
약간 부족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남은 바바리안들도 정리해야겠군.”
아직 정리할 놈들이 많이 남았으므로.
*
플레이어 톡의 이용자들은 참담한 심정을 게시판에 토로했다.
-거의 다 로그아웃 한 거 같네
-약한놈들이 낄 자리가 아니니까...
-그라시아는 뭐함? 누구 아는 사람 없음?
-재정비하고 재도전하지 않을까?
-미궁 클리어 못하면 어떻게 됨?
-침식 속도 빨라지는 거 같은데
-미친. 진짜네;; 벌써 13%야?
-하루 사이에 1%가 올랐어???
미궁의 클리어가 지체되자 판게니아의 침식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검성 라일리’가 4페이즈에 돌입한 이후 침식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12%였던 게 13%가 된 것이다.
이 속도면 7일 후 20%가 된다.
-라일리 봉인 해제랑 침식 속도랑 관계가 있나본데?
-20% 되면 2차 침공 시작 아님?
-일주일 뒤에 2차 침공? 너무 빠름
-1차 침공은 란돌프가 막았다지만, 이건 못 막지 않을까?
-마스터 뭐하냐. 매일 센척만 존나 하더니
-타차원 커뮤니티 관리로 바쁨ㅋㅋㅋㅋㅋ
-아니;; 침식 속도 빨라진다고 미리 알려줬어야지. 그럼 로그아웃 안했지;;
-네가 로그아웃 안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ㅂㅅ
차원 침식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플레이어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것을 기회라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 묻히고 있을뿐.
-누가 타차원 커뮤니티에 글좀 올려봐 침식 속도 빨라진다고
-광삭당함
-그걸 왜 삭제해?
-그라시아가 실패했으니까 도전하기 싫은가봄ㅋㅋㅋㅋㅋ
-다른 영웅들은?
-거의 다 미궁 나왔을걸
-다크스타는 사왕 보고 런침
-책임 없는 명예냐? 진짜 염병이네?
-다 같이 공략하면 되는 거 아님? 왜 따로 노냐 걔네는?
-내말이zzzz
-지하 미궁 가는법 대공개 미궁 상인한테 미궁 티켓사서 사방이 막힌 벽 뚫고 들어가면 지하로 향하는 계단 나옴
-그걸 지금 말하면 뭐하냐 이미 다 나왔는데
몇 번이나 재도전 한 플레이어는 있지만 이제는 그조차 멈췄다.
더 이상 미궁에 도전해봤자 조각만 낭비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더불어 남아있는 조각도 모두 형편없는 상태였다.
이제와서 지하 미궁으로 향하는 방법을 알려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누가 사왕한테 지하미궁 가는 법좀 알려줘라
-차라리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덤프트럭에 치이면 이세계로 갈 수 있는데 왜 사왕한테 가서 자살함
-지인이 말해주는데 그라시아 오피셜 떴다. 재도전 할거래
-ㄹㅇ? 와, 그래도 다행이다. 역시 마스터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클라스!
-저거 개구라임 여기서 저런 말을 믿냐ㅋㅋ
그때였다.
-어? 잠깐 이거 실화냐?
-어어? 민초 떴다!!!
느닷없이 모두의 앞에 떠오른 문구 하나.
‘민트초코맛있어요’가 검성에게 도전한다는 글이 떠오른 것이다.
게시판이 순식간에 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됐다.
-헐 민초단이 진짜 있었네
-영웅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가라 민초몬!
-솔직히 그라시아보다 민초가 더 강할 듯
-그건 아님
-제발 깼으면 좋겠다
-깨면 오늘부터 나도 민초단 한다
-난 이미 베라에서 민초시킴ㅋㅋ
-나도 민트초코 삼겹살 시켰다
-또 떴다!
-이번엔 또 뭐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어서 떠오른 문구가 하나 더 있었으니!
-유일급 제작?
-유일급 장비가 제작됐다는데?
-누가 제작한 거야?
-...‘찬란한 유일급 장비’?
검성 vs 란돌프
재접속한 그라시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미궁이 아닌 대륙.
워프의 앞이다.
강제 퇴장된 것이다.
‘거지 같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검성 라일리.
놈이 말도 안 됐으니까.
처음에는 쉬웠다.
세 개의 봉인구를 깨트릴 정도의 타격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문제는 페이즈 4.
족쇄 세 개가 풀린 직후의 일.
‘변했다.’
검성 라일리는 족쇄가 풀릴 때마다 변했다.
빨라지고, 강해졌으며, 맷집도 늘어나 조금씩 천검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페이즈 4에 이르러 나타난 변화였다.
극적인 변화. 이전까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그 모습은 분명······.’
손을 쥐었다가 편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된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으므로.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런 준비 없이 깰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준비가 필요하다.
너무 쉽게 봤다.
당연히 이기리라 생각했건만.
물론 그러한 확신은 이미 검성 라일리에 대한 사전조사를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백 명이 넘는 전문가가 달려들어 대도서관에서 라일리의 전설과 신화를 심도 있게 파고들었다. 라일리가 등장하는 모든 내용을 샅샅이 뒤졌다.
이후 조사한 내용을 재현하고 라일리의 검술과 그의 평소 습관까지 모두 파악해냈다.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마련해놓은 뒤 도전한 것이다.
거기에 ‘푸른 서광’까지 갖췄으니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로그아웃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변수가.
‘제국이 끼어든 건 예상 밖이지만, 그들로서도 페이즈 4의 모습은 의외였을 터.’
제국 삼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제국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게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리고 제국이라면 검성 라일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도전한 제국 삼검도 입장하자마자 후퇴하였다.
왜겠나.
검성 라일리의 그 극적인 변화는, 제국으로서도 상정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검성 라일리’에게 ‘민트초코맛있어요’가 도전합니다.》
《페이즈 4가 진행 중입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른 글자들.
······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는 도전자의 이름을 보고, 그라시아는 표정을 굳혔다.
‘어디 숨어있나 했더니··· 미궁에 도전 중이었군.’
민트초코맛있어요.
숨겨진 하이랭커다.
절대로 공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하여 심연 미궁에는 도전하지 않을 줄 알았다.
심연 미궁은 정체가 들통나기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으니.
그런데 나타났다.
나타나서, 자신이 진행해놓은 페이즈 4에 숟가락을 얹었다.
‘내가 못 깬 걸 네놈이 깰 수 있을 성싶은가?’
어이가 없었다.
가소로웠다.
그라시아는 민트초코맛있어요를 알고 있다.
시체를 다루는 최상위계의 시체술사라는 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놈은 ‘강시’를 다룬다.
그렇게 시체에 부적을 붙여서 움직이는 자들을 ‘영환술사’라고 부른다지.
솔직히 그라시아는 강시술이나 언데드나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검성 라일리의 페이즈 4는 그깟 강시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놈도 제국 삼검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로그아웃하겠지.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유일급 장비’가 제작되었습니다!》
이건 또 뭐냐.
“······ 유일급 제작?”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월드 공지.
월드 공지는 세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사건, 혹은 무언가의 등장에만 사용된다.
새로운 유일급 제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은.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유일급 장비를 제작했다.’
저 제작을 완료한 존재가 플레이어라는 것이다.
판게니아인이 유일급의 제작을 하면 월드 공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유일급의 장비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유일급이라 이름 붙은 장비는 개인이 사용하지만 군단과 같은 힘을 발휘하는 탓이다.
또한.
‘새로운 유일급. 기존 빌헬름이 떨어트린 재료를 사용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빌헬름이 대원정에서 죽은 뒤 떨어트린 재료들.
그것을 황금률 상점에서 구입하고 사용해, 몇몇 플레이어들이 유일급 장비를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