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연 흔적은 없다.
최초의 도전자.
비록 지하 미궁에 도달한 것은 여덟 번째였으나,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가장 빨랐다는 의미.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미궁 상인에게서 히드라곤의 혼을 구하진 못했지만, 라일리는 반드시 공략한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지하 미궁에 뜨는 미궁 상인도 샅샅이 찾아봤지만 히드라곤의 혼은 없었다.
그러나 라일리의 공략만큼은 반드시 자신이 해내리라.
그라시아가 문에 손을 대었다.
순간.
《‘검성 라일리’의 방으로 입장합니다.》
《도전자의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도전자의 이름은 모든 입장자에게 안내될 것입니다.》
이름. 이름이라.
그라시아는 지체없이 입력할 이름을 정했다.
*
플레이어 톡이 다시 한 번 시끄러워졌다.
입장했던 자들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검성 vs 검성? 이거 뭐냐?
-그라시아가 도전 중인 거 아님?
-가슴이 웅장해진다.
-누가 이길까?
-검성 라일리는 옛날 영웅이고, 그라시아는 현재의 영웅인데.
-그라시아가 이기겠지.
사람들은 그라시아의 승리를 점쳤다.
그라시아가 도전해서 실패한 적은 없으므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이길 확신이 없다면 덤벼들지 않는다.
헌데 도전했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아, 결국 이렇게 미궁이 7영웅 손에 넘어가나
-그나마 그라시아면 다행인 거 아니냐
-ㅋㅋㅋㅋ가재는 게편이란 말 모름? 세상 너무 쉽게 보네
-그라시아가 제일 깨끗한 이미지이긴 해도 팔은 안으로 굽게 돼있음
-여태까지 잠잠한 거 보면 란돌프는 이번에 도전 안하는 거 맞는 듯
-도전했으면 누군가가 발견하고 글 올렸겠지
-미궁까지 넘어가면 그라시아가 지닌 도시가 몇 개냐?
-공식적으로는 4개? 7영웅들 다 합치면 왕국 하나 건국할 수 있겠네ㅋㅋ
-이거 진짜 나라 세우는 빌드업 아니냐?
-하, 그래. 너네가 다 해먹어라!
판게니아엔 아직 플레이어로만 이루어진 왕국이 없었다.
각자가 몇 개의 도시를 지배하긴 했으나 왕국 건국을 위해선 10개의 도시가 필요했고, 오직 한 명의 왕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심연 미궁이 그라시아에게 넘어가면 공식적으로 그가 지배한 도시는 4개가 된다.
다른 영웅들과 합치면 정말로 왕국 건국이 가능한 수준.
그게 아니더라도, 착실하게 그라시아는 왕이 될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오? 벌써 2페이즈?
-쩌네...
-그라시아 개쩌네
-이 공략속도면 이변은 없겠는데?
-와
*
<2,000,000>
탐욕이 허리에 손을 얹고 크게 웃었다.
200만!
탐욕의 가치가 무려 200만으로 표시되었다.
여태껏 겜블로 치루었던 23만의 여덟 배가 넘는 수치였다.
-하하하!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혹시 모르지 않느냐?
혹시 모르지 않다.
이변은 없다.
200만의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이변 따위가 생길 리가 없었다.
이곳에 도전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걸고 게임을 진행한 자는 많았다. 탐욕이 자신을 걸어본 적은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들 중 10만을 넘긴 자가 없었다.
그런데 200만을 넘겠다고?
자신의 승리는 이미 확정적이었다.
기세등등한 채 탐욕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차례가 끝났으니, 이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할 차례였다.
‘10만? 아니지. 20만쯤 나오려나?’
그래도 이 정도로 몰아붙였으니 여태까지의 도전자들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래봤자 20만 정도겠지만.
<1,000,000>
백만!
솔직히 놀라웠다. 백만의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니!
하지만, 자신의 가치인 200만에 이르진 못한다.
-아쉽구나. 조금만 분발했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앞자리 숫자가 변했다.
<2,000,000>
······자신과 같다고?
아니, 이건 아직 판정 중인 것이다.
고려할 사항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권능이 그것을 모두 한 번에 헤아리지 못해서.
가끔 한번씩 이럴 때가 있다.
숫자는 더 낮아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확정은 아니다.
확정은.
<4,000,000>
왜 계속 올라가는 거지?
<8,000,000>
······?
<16,000,000>
······ 고장났나?
왜 계속 두배씩 올라가는 거지?
<32,000,000>
뭐냐?
이제 슬슬 끝내라.
하지만, 끝나지 않는다.
<64,000,000>
······································· 설마?
여기서 더 간다고?
*
탐욕이 넙죽 엎드렸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겁을 먹은 것이다.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고 경험하는 ‘가치’에.
눈앞의 압도적인 존재에게!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티, 티티, 티켓을 천 장 모으면 됩니다.
“티켓? 이벤트 몬스터한테 나오는 티켓 말이냐?”
-예. 하, 하지만, 그 방법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간 최악의 ‘검성 라일리’를 만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온갖 ‘위압’과 함께 말이죠.
“그럼? 무슨 방법을 추천하지?”
-이 티켓을 미궁상인에게 넣으십시오!
쩌엉!
탐욕이 자신의 왕관을 부쉈다.
그러자 그 속에 황금 티켓이 나타났다.
이 황금 티켓을 미궁상인······ 그러니까 자판기에 넣으라는 것이다.
탐욕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인간에게 티켓을 넘겼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런 수치가······.’
잘못된 게 아니다.
자신의 권능은 정상적으로 작동됐다.
그리하여 나온 인간의 가치.
그건, 너무나도 천문학적이었다.
설령 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만한 수치가 나올지가 의문일 정도의 숫자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탐욕은 전율하며 공포에 떨수밖에 없었다.
황금 티켓
검성 라일리.
그는 흰머리가 무성한 근육질의 노인이었다.
반쯤 부서진 철검을 늘어트린 채 바닥을 끌며 나타난 그는 손목과 발목 총 4개의 사슬에 묶여있었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눈앞에 무수히 많은 문구가 떠올랐다.
《‘검성의 위압’ 효과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검성의 위압(2)’ 효과로 인해 시야가 좁아집니다.》
《‘검성의 위압(3)’ 효과로 인해 치료 불가 상태가 됩니다.》
《‘검성의 위압(4)’ 효과로 인해 고열 상태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디버프의 향연.
그라시아가 미소지었다.
“검성 라일리. 구제국의 ‘위대한 검’이었던 자여.”
위대한 검. 구제국의 역사에서 라일리를 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위대한 검은 스러졌다. 이곳 심연에 산 채로 묻혔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기사와 함께.
“같은 ‘검성의 계보’를 잇는 자로서 그대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대의 검과 함께.”
휘이익!
허공에서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검 한 자루가 떠오른다.
푸른 서광을 내며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검.
유일급 무기이자 검성 라일리의 검이었던 ‘푸른 서광’이다.
같은 검성의 계보를 잇는 자. 그라시아가 검성의 칭호를 계승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푸른 서광 때문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옛적 자신의 애검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가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검을 본 검성 라일리가 우뚝 멈춰섰다.
자신의 검을 알아봤기 때문일까?
-너는······ 아니다.
라일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뭐가 아니라는 거지?
반응이 이상하다. 라일리의 전신이 오한이 든 듯 떨려대고 있었다.
-너는 아니다······!
푸화아아악!
곧이어 라일리의 전신에서 검은 불꽃이 솟아났다.
마치 날개처럼.
두 동공은 붉게 물들었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광인이다.
“대화를 나눌 정신은 아닌가 보군.”
쯧. 작게 혀를 찬 그라시아가 모든 검의 공간을 열었다.
천 자루의 검이 허공에 떠올랐고.
콰콰콰콰콰콰쾅!!
마치 기관총처럼 쏘아져 나갔다.
한 자루, 한 자루가 닿을 때마다 폭사하며 굉음을 낳았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결코 버틸 수 없는 공격들.
대략 300자루의 검이 라일리에게 도달했을 때 그라시아가 한쪽 손을 올렸다.
뚝!
검의 비가 끝난 뒤.
안개가 걷히고 나타난 라일리의 전신은 멀쩡했다.
철그럭!
대신 왼쪽 발의 족쇄가 풀렸다.
‘페이즈 2라.’
그럼 페이즈 5까지 있는 건가?
족쇄가 풀릴 정도의 데미지를 흡수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모양이다.
아무리 큰 데미지를 줘도 단계별로 진행해야 하는 패턴들.
이런 패턴은 생각보다 흔했다.
“재밌구나.”
그렇다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천 자루의 검은 뒤로 갈수록 강해진다.
저 족쇄를 모두 풀 때까지 자신의 공세를 과연 라일리가 버틸 수 있을지.
그라시아가 다시 손을 뻗었다.
*
-거, 검성 라일리에게 도전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보물들을 싹 다 수거하고 떠나려는 찰나.
탐욕이 물었다.
“생각중이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검성 라일리와 1:1은 말이 안된다.
황금 티켓으로 말미암아 디버프를 지운 뒤 더 나은 상황에서 싸울 수 있다 해도, 정상적인 대결에서 승리를 점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탐욕을 곁들이면 조금 더 수월하긴 할 테다.
12레벨에다가 탐욕 역시 심연의 지배자였으니까.
여기에 다른 파티원들과 함께 공략을 시도하면······.
‘이길 확률이 10%쯤 되겠지.’
그래서 고민중이었다.
탐욕에게 얻은 것이 라일리를 공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탓이다.
지금 얻은 보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낮은 확률에 베팅하는 것보단 한 발 물러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탐욕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이곳 심연에 파고들어 검성 라일리를 오랜시간 지켜봤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강력한 탓에 4개의 봉인으로 스스로를 봉인했습니다.
“스스로를 봉인했다? 심연에 가라앉은 뒤에 말이냐?”
-심연의 구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잘은 알지 못한다.”
심연은 미지다.
심연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기회는 한정적이었고, 그곳의 지배자들은 항상 공격적이었기에 제대로 탐구할 시간이 부족했다.
-심연에는 네가지 종류의 지배자들이 있습니다. 원래부터 심연에서 살아왔던 자, 심연에 가라앉은 자, 심연을 파고든 자, 심연 그 자체인 자.
탐욕은 세 번째 경우였다.
심연에 파고든 자.
중첩심연, 하위심연이라 말하는 곳의 지배자!
-검성 라일리는 ‘심연에 가라앉은 자’입니다. 문제는 간혹 ‘가라앉은 자’들 중에 ‘심연 그 자체가 되는 자’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뭐가 다르지?”
-심연 그 자체가 되어버리면, 그 순간 천공의 도시 중 하나를 강제로 침식합니다.
“······끔찍하군.”
‘강제 침식’이 벌어지는 경우를 나는 딱 한 번 보았다.
멀쩡했던 도시가 심연에 가라앉은 일.
처음에는 워프의 문제인 줄 알았다.
후에 조사에서 워프가 살아있음에도 침식이 벌어졌음이 밝혀져, 난리가 났던 사건이다.
그게 ‘심연 그 자체인 자’의 탄생과 관계되어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봉인이 풀리면 라일리는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됩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스스로를 봉인한 겁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인간 따위를 걱정하는 건 탐욕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인간이었다.
정말 인간인지조차 의심될 수준의 ‘격이 다른’ 존재 말이다.
만약 그가 검성 라일리의 공략을 시작하면, 4개의 봉인구가 벗겨지게 될 터. 그리하면 다른 천공의 도시, 인간의 도시가 강제 침식을 당하게 된다.
강제 침식 당한 도시의 인간은 몰살이다.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니 괜찮느냐고 묻는 것이다.
“‘강제 침식’이 무엇을 기준으로 일어나는지 아나?”
-이곳 ‘미궁’과 연결된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전부로군.”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러다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잠깐. 미궁과 연결된 도시?’
판게니아와 미궁은 모든 도시가 워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도 미궁과 연결된 워프가 수없이 많았다.
왜 지구에 미궁으로 연결된 워프가 떠오른 것인지 솔직히 이해가 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