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곳에도 스피커들이 침투시킨 ‘첩자’가 항시 주둔하고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상이 유추될 수 있는 모든 걸 절대로 말해선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어? 24시간 넘어서 로그아웃하니까 생존 보너스 준다.
-구라ㄴㄴ 보너스? 판게니아가 좆으로 보이냐?
-우리 여신께선 보너스의 개념을 모르신다.
-아니, 진짜 준다니까. 백성전 성좌도 한 명 붙었는데. 이거 미궁 오래 생존하는 거 자체가 목표인 게 아닐까?
-나도 생존 보너스 얻음.
-뭐야, 진짜냐? 뭐 주는데?
-안알려줌.
갑자기 분위기가 급물결을 탔다.
생존 보너스라니.
24시간을 생존만 해도 보상을 준다는 말이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꽤나 괜찮은 보상인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재도전 해볼까’하는 생각을 가진 찰나.
-아, 씨, 다 나와라. 나 방금 사왕봤다.
-사왕? 무슨 사왕? 설마 북쪽의 사왕?
-크람델 주인 중 한 명 말하는 거임?
-그래.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나오라고. 이거 어중이 떠중이들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최소 초월자들만 도전하는 곳이야.
-사왕을 봤는데 어떻게 살아서 나왔냐? 너야말로 구라치는 거 아님?
-사왕이랑 뇌제랑 싸우는 거 보고 튀었다.
-뇌제 다크스타랑 사왕이?
뇌제 다크스타.
7영웅 중 일인이며 ‘가장 빠른 인간’으로 알려진 플레이어다.
마스터와 그라시아를 제외하면 적수가 거의 없다고 알려진 하이랭커.
그런 그가 사왕과 전투를 벌이다니.
사왕 역시 악명 높은 괴물이다.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
시체의 왕.
죽어있는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
-누가 이김?
-사왕이 그냥 가지고 놀던데.
-이제 6영웅 되냐?
-대박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
미궁에 사왕이 나타났다면 이건 보통 사안이 아니다.
사왕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으니까.
뇌제 다크스타가 놀잇감으로 전락했다면 그 이하의 플레이어들은 도전조차 해서는 안 된다.
재도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7영웅 거품 맞다니까. 솔직히 뇌제보단 민트초코가 더 셀 듯.
-민초단 또 나왔네, 꺼져라.
-란돌프는 이번에도 도전할까?
-여기 끼긴 좀 빡셀 듯.
-앞서서 말도 안 되는 성적들을 내긴 했지만, 직접 맞붙는 건 피하지 않겠냐?
-여태껏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걸 보면 직접 맞붙는 건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게 맞는 듯.
-하긴······ 참전하면 공개되는 건 순식간일 텐데.
-우리가 힘을 보태주면 가능하지 않을까?
-미친소리 하지마라. 여기에 네 이름 입력하는 순간 12시간 내로 너 암살당한다.
-6시간 본다.
-난 3시간.
-솔직히 1시간 내로도 가능.
-어쨌든 아쉽긴 하네. 마스터 같은 놈이 먹을 바엔 차라리 란돌프가 먹는 게 더 좋은데.
모두 란돌프가 심연 미궁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궁에 도전했다간 정체가 들통나는 건 순식간이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있는 곳.
이 각축장에서 정체를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
《황금 고블린을 제거했습니다.》
《이벤트 몬스터를 제거하여 미궁 점수 30점을 획득합니다.》
《황금 고블린을 제거했습니다.》
《이벤트 몬스터를 제거하여 미궁 점수 30점을 획득합니다.》
《황금 고블린을 제거했습니다.》
《이벤트 몬스터를 제거하여 미궁 점수 30점을 획득합니다.》
······.
나는 지금, 지하 미궁의 황금 고블린을 독식하고 있었다.
장장 열 마리.
그리하여 얻은 점수는 300점.
구제국 주화만 4,400만 골드에 달했다.
여기에 황금 동상이나 보물을 합치면 족히 6천만 골드가 넘어가는 액수!
간간히 쓸만한 탈리스만이나 장비도 나왔다.
《업적 ‘황금 고블린 학살자’가 부여됩니다.》
《명예가 100 상승합니다.》
《혼자서 황금 고블린 10마리를 제거하여 ‘황금 심연’으로 연결됩니다.》
순간 바로 앞에 지하로 향하는 황금색의 워프가 떠올랐다.
저 아래로 뛰어내리면 ‘황금 심연’으로 향할 수 있다는 뜻.
‘황금 심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애초에 황금 고블린을 혼자서 10마리나 사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소위 노른자 땅에서만 황금 고블린이 나오는 데다가, 그마저도 열 마리 이상 나오는 곳은 드물다.
하물며 그걸 전부 찾아서 혼자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헬과 심연기사의 영혼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황금 심연’에 입장했습니다.》
당연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지체없이 뛰어들었다.
이윽고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황금의 산을 보았을 때.
‘······ 심봤다.’
산삼무더기를 찾은 심마니의 기분이 이러할까.
눈앞에 놓인 보물에 절로 억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저 보물들 사이로 보이는 것들 중에는 단순히 금화로 재단할 수 없는 값어치의 것들도 있었다.
‘황금의 정수, 탐욕의 항아리······!’
저 두 개는 특히 눈에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황금의 정수, 탐욕의 항아리는 모두 유일급 장비의 재료였으니까.
모두가 미궁에서 아등바등 경쟁하고 있을 때, 나는 혼자 이곳에서 보물을 찾고 있었다.
쿠릉!
그때 황금의 산에 묻혀있던 무언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 심연의 지배자 ‘탐욕’이 깨어났습니다!》
······ 거인처럼 거대한 황금 고블린이.
보상, 보상, 끝없는 보상
심연 속의 심연
중첩 심연, 혹은 하위 심연이라 부르는 곳.
간혹 나오는 패턴이긴 하지만 이곳 ‘황금 심연’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심연이기에 나가려거든 마찬가지로 ‘지배자’를 죽여야만 한다. 아니면 ‘심연의 지배자’가 나가는 것을 허락해주거나.
후자의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니 결국 맞서야 한다는 의미다.
【Lv.12】
문제는 고블린의 레벨이었다.
아예 ‘탐욕’이라 이름 붙은 녀석.
그 이름만큼이나 레벨도 높다.
정면에서 1:1로 맞서싸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의 보물창고에 들어온 간 큰 침입자는 오랜만이로군.
거구의 황금 고블린, 탐욕이 말했다.
다른 황금 고블린들과 달리 말을 할 정도로 고지능이라는 뜻이다.
어지간한 심연 지배자들은 문답무용으로 침입자를 공격하는 데에 비하면 성격도 양반이었다.
-전투냐, 겜블이냐. 선택해라.
게다가 선택지까지 준다.
코앞까지 다가온 탐욕이 턱을 쓸며 흥미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고르든, 둘 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겜블.”
-하하! 좋다. 이제부터 너와 내가 지닌 모든 것에 가치가 매겨진다. 그 ‘가치’를 걸고 게임을 할 것이다.
출렁!
순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탐욕이 공간을 재배치한 것이다.
곧이어 눈앞에 놓였던 모든 보물에 숫자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대략 1만의 골드 뭉치가 1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황금의 정수, 탐욕의 항아리만 해도 각각 30,000의 가치였다.
저기 있는 모든 금화와 보물을 합치면, 족히 이십만은 되지 않을는지.
반면 내가 지닌 모든 보물을 합쳐도 7,000의 가치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가치로 압살하겠다?’
탐욕이 자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니고 있는 가치의 양 자체가 다르다.
몇 번을 올인해도 탐욕에겐 발톱의 떼를 지출하는 것과 같을 테니.
처음부터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싸움이든, 겜블이든.
황금 고블린 열 마리를 잡아서 기세등등한 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게 바로 여기였다.
-크하하! 어디, 게임을 해보자. 첫 게임은 홀, 짝이다.
쿠르르릉!
엄청난 양의 금화가 해일처럼 솟구친다.
양쪽으로 나뉘며 수만, 수십만 개의 금화가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압권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장면이었다.
탐욕이 황금빛의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자. 홀이냐, 짝이냐?
*
그라시아가 작게 혀를 찾았다.
‘드디어 길을 찾았다.’
처음부터 지상미궁은 미끼였다니.
미궁 티켓으로 벽을 뚫고 지하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게 진짜 미궁의 단서였던 모양이다.
《현존하는 입장자들 중 여덟 번째로 지하 미궁에 발을 들였습니다.》
《업적 ‘여덟번째로 지하 미궁을 발견한 도전자’를 획득합니다.》
······ 여덟 번째라고?
그라시아가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보다 빠르게 이 트릭을 깨우친 사람들이 있었던 듯싶다.
하지만 의문이다.
미궁상인은 다른 영웅들이 독점하고 있을 텐데, 언제 미궁 티켓을 얻은 걸까?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앞서 지하미궁에 들어온 사람이 일곱이나 된다.
‘사왕만 아니었어도 더 빨리 들어왔을 것을.’
뇌제 다크스타.
놈이 SOS를 쳤다.
북방 요새 도시 크람델의 사주력 중 하나, 사왕을 마주했다며.
사왕의 언데드 군단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는 것이다.
하여 그라시아가 길을 뚫어줬다.
내키지는 않지만 빚을 지어두는 의미로.
게다가 사왕이나 되는 존재가 이곳 심연 미궁에 들어온 까닭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북방의 괴물들이 영역을 확장하려는 건가?’
결국 그 까닭에 대해서 묻지는 못했다.
직접 만나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유추는 할 수 있었다.
최근들어 크람델의 세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강력한 괴물들이 크람델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크람델과 사주력이 보유한 도시만으로는 감당되지 않을 정도의 숫자가.
그리하여 이곳 심연 미궁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사왕이 눈독들일 정도의 땅이라.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이유가 늘었군.’
대체 어떤 땅이기에 사왕을 비롯한 수많은 판게니아의 강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일까.
확실한 건 평범한 땅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지하 미궁이 본게임이라면 이곳 어딘가에 검성 라일리가 있을 터.’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검성 라일리는 자신의 사냥감이었다.
그라시아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넌······?”
순간 눈앞을 지나가는 한 여인을 보며 그라시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줄, 유령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방금 자신의 앞을 휑하니 지나간 여인은 분명히.
“세아 성녀?”
뚝!
멈춰선 여인이 고개를 돌리곤 해맑게 웃었다.
“어머, 저를 아시나요?”
*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서로 크로스하며 뛰어올랐다.
상대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어 혼란시키는 전술.
황금 눈을 지닌 토끼가 허무하게 목숨을 내주었다.
“우리 꽤 합이 잘 맞는데?”
아이작이 손을 펼치자, 이자벨라는 그 손을 무시하며 토끼의 시체를 회수했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아이작이 들었던 손을 내렸다.
‘까칠한 녀석.’
함께 수련하고 전투를 벌이다보니 합은 꽤 잘 맞았지만 여전히 이자벨라가 어려운 아이작이었다.
황금 워프로 사라진 란돌프를 가만히 기다리기보단 그 사이에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둘은 움직이는 중이었다.
잠시 후 토끼의 시체에서 티켓을 회수한 이자벨라를 보며 아이작이 말했다.
“이벤트성 몬스터들을 잡으면 티켓이 떨어지는군.”
“이 티켓들을 모으면 검성 라일리에게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
“씁, 설명대로면 천 장은 모야아하는 거 아니야?”
이벤트성 몬스터는 찾기도 어렵다.
하물며 티켓이 나오는 확률도 랜덤이다.
천 장을 모으기 전에 보유한 황금률의 조각이 바닥나는 게 훨씬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래도 당장은 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하미궁을 돌며 이벤트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을 때.
한 지역에 들어선 아이작과 이자벨라는 동시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도 난 거냐?”
“······!”
한 공간이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 황폐화되어 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증명하듯 지형이 바뀌어 있었고 곳곳엔 불과 함께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한 여인이 쓰러져있었다.
스릉.
이자벨라가 단검을 꺼내들었다.
여태껏 미궁에서 마주한 모든 사람들은 적이었기에.
살아있다면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다.
“잠깐. 죽이지 마라. 이 여자······!”
“······?”
가까이 다가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작이 경악했다.
이자벨라는 사막에서만 살았기에 모르는 게 당연하다곤 하나.
“세아 성녀잖아! 죽은 거 아니었어?”
혹시 몰라서 심장소리를 들어보았다.
다행히 숨도 쉬고, 심장도 뛰는 중이었다.
살아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세아 성녀는 분명히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을 텐데.
아무리 크람델에 있었더라도 그 정도로 중요한 정보는 아이작 역시 알고 있었다. 대원정은 괴물들 사이에서도 꽤 이슈가 됐으니까.
그런데 왜 세아 성녀가 혼자 지하미궁에,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쓰러져있는 걸까?
대체 누구와 싸운 거지?
“일단 벗어나지. 여기도 안전한 장소는 아닌 것 같으니.”
아이작이 세아 성녀를 들쳐맸다.
그녀와 전투를 벌인 누군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