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벽으로 막혀있는 공간.’
또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장소.
오직 특수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미궁은 모두 이어져있지만 유독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공간이 있었다.
저런 빈공간을 왜 만들어놨을까?
극한의 효율로 배치된 미궁이다. 길 하나는 기가막히게 만들어놨다.
그런데 간혹가다가 사방이 벽으로 막힌 빈공간이 나온다.
저 안에 아무 것도 없다면 왜 저런 공간을 만들어놨을까.
벽을 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벽을 뚫을 수는 있다.
‘미궁티켓.’
처음엔 길을 잃거나 도망갈 때 쓰라고 만들어놓은 티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티켓이야말로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저 빈공간에 무언가가 있지 않을는지.
《미궁티켓을 사용했습니다.》
《30초간 벽이 뚫립니다.》
순간 벽에 제법 큰 구멍이 뚫렸다.
망령의 손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공간.
나는 지체없이 벽을 넘었고.
‘빙고.’
길을 찾았다.
*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그 계단을 따라 한참 발을 옮기자 또 다른 미궁이 나타났다.
《현존하는 입장자들 중 최초로 지하 미궁에 발을 들였습니다.》
《업적 ‘최초로 지하 미궁을 발견한 도전자’를 획득합니다.》
《명예가 50 상승합니다.》
《‘심연 기사’가 최초의 입장자를 맞이합니다.》
검은 심연으로 뒤덮인 기사가 눈앞에 있었다.
【Lv.10】
레벨 10.
하지만 평범한 10레벨이 아니다.
표기된 레벨이 주황색이다.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
최소 9인의 10레벨 캐릭터가 연합해서 사냥해야하는 괴물이 지하미궁으로 내려오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이다.
‘저 문양은?’
심연 기사가 입은 갑옷에는, 분명히 제국의 상징 ‘황금 오망성’이 희미하게 남은 상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여우 가면에게서 받은 황금패를 꺼냈다.
그것을 본 심연 기사는.
-저주받을, 제국, 이여!
······ 더 분노하기 시작했다.
*
분노한 심연기사는 파멸적이었다.
광전사가 따로 없었다.
순식간에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쳐놓은 견고한 방어를 뚫어버렸다.
이어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기겁할 장면.
쫘아악.
최대한 침착하게 활시위를 당긴다.
심연기사는 황금패를 보고 분노한 덕분에 이성을 잃었다.
오직 패의 주인인 나를 죽이고자 방어를 도외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휘이익!
푹!
순간 화살에 맞은 심연기사가 멈칫했다.
샤티로스의 공포.
맞는 순간 부여되는 절대적인 ‘공포’의 효과는, 설령 심연의 괴물이라 할지라도 통할 수밖에 없을 테니.
시야를 잃고 무작위 능력치가 무려 10이나 하향된다.
‘느려졌다.’
민첩이 빠진 것 같다.
도리어 황금패를 보여 흥분시킨 게 득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휘이익!
빠르게 한 발 더 장전해 날렸지만 심연기사가 피했다.
화살에 맞으면 위험해진다는 걸 알아차리고 육감으로 피해낸 게다.
시야를 잃는 저주는 심연기사에게 큰 효과를 주지 못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민첩이 10 낮아진 건 크다.
나는 품에서 빠르게 거울을 꺼냈다.
<‘조건추가의 거울’을 사용합니다.>
<‘심연기사’에게 무작위 ‘행동조건’이 추가됐습니다.>
도전자에게 무작위 행동조건을 추가하는 거울.
쓸 수 있는 건 모두 써야했다.
조건추가의 거울은 심연미궁에 입장한 도전자에게만 쓸 수 있다고 했으나, 심연기사에게도 통했다.
‘제국의 인장. 역시 도전자였군.’
심연기사 역시 과거 이곳에 도전한 도전자였다.
갑옷에 희미하게 남은 황금 오망성을 보고 유추했으나 확신은 못했는데.
도전하여 실패하고 심연에 가라앉은 기사임이 분명했다.
-귀찮은, 짓을······!
이만하면 됐다.
능력치 저하와 시야 상실, 여기에 행동 조건까지.
상대가 강하다면, 내 수준에 맞게 끌어내리는 것도 훌륭한 전략이었다.
스릉.
달려드는 심연기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극 철검 두 자루를 꺼내들었다.
*
《‘심연기사’를 제거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20h를 획득합니다.》
《미궁점수 50점을 획득했습니다.》
《‘망자의 왕’ 스킬로 ‘심연기사’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심연기사’를 지배해 힘이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심연기사를 제거하자 얻은 조각의 2.5배에 달하는 점수가 부여됐다.
뿐만 아니라 심연기사를 망자로 취급하여 지배할 수도 있었다.
다만, 심연기사의 육체는 심연에 가라앉아 없어졌다.
희미하게 부유령처럼 떠오른 심연기사의 영혼만이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킬 뿐이었다.
‘안내자가 생겼군.’
그런데 어디로 안내하는 거지?
지배에 성공한 이상 내게 해가 되는 짓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심연기사의 영혼이 가리키는 길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나가자.
《‘황금 고블린’을 발견했습니다.》
끼긱?
황금 왕관과 보따리를 맨, 황금색의 고블린과 두 눈이 마주쳤다.
심봤다!
황금 고블린.
혹은 보물 고블린이라고 불리는 걸어다니는 보물창고.
간혹 심연 속에서 등장하는 이 고블린은, 심연에 가라앉은 땅 중에서도 ‘노른자 땅’이라 불리는 곳에서만 서식한다고 알려져있다.
고블린은 원래부터 빛나는 보물에 탐욕을 느끼는 종.
그 탐욕이 심연 속에서 심화되어 몸 전체가 황금빛을 띄는 순간, 심연에 가라앉은 온갖 보물들을 수거하며 모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심연 미궁은 ‘황금 고블린’이 생성될 정도의 노른자 땅이라는 뜻.
쫘아악!
눈이 마주친 즉시, 내 손은 활시위를 걸고 있었다.
‘반드시 잡는다.’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끼긱!
황금 고블린은 당황하며 워프를 열었다.
보물을 쓸어담고자 황금 고블린은 심연 속을 이동할 수 있다.
워낙에 재빠르고 워프로 이동을 해대서 굉장히 잡기 까다로운 놈이었다.
하지만.
캬캬!
헬의 전신이 붉게 빛났다.
황금 고블린의 워프조차도 불허한 것이다.
끼기긱!!
워프로 몸이 넘어가지 않자 순간 당황한 황금 고블린.
푹!
그 찰나, 미간에 화살이 박혔다.
워프가 생성된 벽에 머리를 박고 몸을 부르르 떨던 황금 고블린이 이내 축 늘어졌다.
이어 심연의 손이 황금 고블린의 시체를 끌고갔다.
《황금 고블린을 제거했습니다.》
《이벤트 몬스터를 제거하여 미궁 점수 30점을 획득합니다.》
미궁 점수도 쏠쏠히 줬다.
처음 미궁 점수를 얻을 때 보였던 ‘여러 이벤트를 통해 점수를 얻거나 사용할 수 있다’는게 이 뜻인 듯싶었다.
이벤트성 몬스터를 사냥해도 마찬가지로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 남은 것은 왕관과 보따리뿐.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되는군.’
나는 헬을 바라봤다.
이 녀석,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된다.
은여우 가면에게서 살아남고, 그에게서 황금패를 받지 않았다면 심연 기사를 흥분시켜 화살을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인가.
황금 고블린의 워프까지 차단시켰다.
나 혼자선 생존력 하나는 발군인 황금 고블린을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캬캬!
“오늘은 먹이를 두 배로 주마.”
캬캬캬캬캬!
헬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매일 30씩 명예를 먹이로 바쳤음에도 부족했던 모양.
천천히 왕관과 보따리를 회수했다.
【황금 고블린의 왕관】
-황금 고블린이 직접 황금으로 제작한 왕관이다.
-순수황금으로 만들어져 가치가 높다.
왕관은 현재의 시세에 따라 대략 이십만골드의 가치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하지만, 진짜 보물은 이게 아니다.
보따리.
황금 고블린이 심연을 돌며 평생을 모아온 모든 보물은 이 안에 있었다.
【황금 고블린의 보따리】
-구제국 주화 1,873,100골드
-구제국 황금 독수리상 5개
-구제국 황금검 2개
내용물을 확인하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엄청나군요.”
보물의 가치를 알아본 아이작이 말을 더듬었다.
‘허.’
이만하면 대어다.
구제국 주화는 통상 2배의 가치로 취급되니까.
고작 한 마리를 잡아서 대략 400만 골드를 획득한 셈이다.
‘황금 고블린마다 주로 모으는 물품이 다르지.’
다만, 종류가 적은 건 고블린마다 주력으로 모으는 종류의 보물이 따로 있어서다.
방금 잡은 황금 고블린은 골드와 황금상 관련된 물건들만을 모아온 것이었다.
하물며 죄다 구제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
‘이 심연 미궁은 먼 과거 구제국의 땅이었다.’
이제야 퍼즐이 조금 맞춰지는 기분이다.
사명이라 말하며 검성 라일리를 죽이려는 은여우 가면.
황금패를 보며 질색했던 심연기사.
검성 라일리는 판게니아의 촉망받는 검성이자, 구제국의 영웅이었다.
이곳 미궁이 구제국의 땅이었다면 이들의 연관 관계가 더욱 명확해진다.
가장 많은 황금과 보물을 보유했던 구제국의 땅이라······.
‘황금 고블린이 더 있을 수도 있겠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다만, 황금 고블린은 언제나 피를 불러오는 존재였다.
‘황금 고블린 한 마리를 잡으면 그 뒤는 아비규환이었지.’
오직 심연탐사를 통해서만 잡을 수 있는 게 황금 고블린이기 때문이다.
막강한 지도력을 갖춘 자가 대규모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와서 ‘심연 지배자’를 사냥하는 게 아닌 이상, 황금 고블린은 항상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심연 공략은 대부분 내분으로 망한다.’
병사인 척 하는 게이머,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트레져 헌터, 빨대 한 번 어떻게든 꼽아보려는 수많은 모기들.
그들로 인해 이탈과 내분이 일어나면 심연 공략은 죄다 실패하고 전멸하기 마련이었다.
황금 고블린이 나오는 땅에선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러니 이 사실이 알려지는 즉시 난리가 날 건 분명했다.
미궁에서 황금 고블린이 나온다!
심연 미궁은 과거 구제국의 땅이다!
약간이라도 소문이 새어나가는 순간.
‘······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군.’
미궁 바깥에 소문이 도는 순간 엄청난 물량이 이곳 미궁에 투입될 것이다.
심연 미궁으로 향하는 워프는 모든 워프와 연겨되어 있으니까.
오직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만 있다면, 별다른 입장제한조차 없다.
‘지하 미궁에서만 황금 고블린이 나오는 건가?’
윗층의 미궁에서 황금 고블린이 나오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오직 지하 미궁에서만 황금 고블린이 나온다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최대한 독식할 수 있는 기회!
문제는 황금 고블린을 찾는 게 여간 쉽지 않다는 건데.
“후계자님. 영혼이 다른 곳을 가리키는데요. 이거 설마······.”
“그 설마가 맞다.”
아이작의 말마따나 심연 기사가 불현 듯 다른 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다른 황금 고블린이 있는 장소를.
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대박이다.’
대박도 그냥 대박이 아니다.
그냥, 미쳐버린 대박이었다.
*
일반 사람들과 디맨션 워리어가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타차원 커뮤니티’가 크게 유행이라면, 반대로 디맨션 워리어들만을 모아놓은 ‘플레이어 톡(Player Talk)’도 그들 사이에선 유행이었다.
오직 판게니아를 플레이한 사람만 맞출 수 있는 문제의 정답을 기입하면 가입이 되는 방식인데, 익명으로 자잘한 정보를 공유하는 다크웹사이트였다.
가입자만 3천명.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최대의 커뮤니티로 지칭되는 곳이지만 지금 이곳은 미궁의 이야기로 한창 떠들썩했다.
-미궁 이거 클리어하라고 만들어놓은 곳 맞냐?
-부서진 황금률 조각 몇 시간이 필요한 거야 대체?
-미궁에 세아 성녀 닮은 웬 미친년 하나 돌아다님. 조심.
-은여우 가면도 조심해라. 다 죽고 나만 살았다.
-로그아웃하니까 진짜 위치 초기화 됐네. 염병.
-여기 바바리안이 왜 이렇게 많냐? 다 누가 고용함?
-미궁상인 7영웅들이 독식하는 거 실화냐?
미궁에 대한 불만이 주 내용이었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보유한 황금률의 시간은 현저히 부족한데, 막상 소모한 것에 비해 소득이 없다.
위험하기만 하고 정작 미궁상인조차 7영웅들이 독점하는 상황.
-와, 진짜 이새끼들 해도해도 너무하네.
-판게니아에선 이미지 메이킹 할 필요 없다 이거지ㅋㅋㅋ
-팬텀님! 아니, 란돌프님! 저 우매한 가짜 영웅 새끼들을 이번에도 제발 참교육 해주시옵소서!
그들은 주로 7영웅들에게 불만이 많은 플레이어들이었다.
하지만 이곳 ‘플레이어 톡’이 아니면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오직 이곳 ‘플에이어 톡’만이 마스터를 비롯한 강력한 스피커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톡의 주인은 신원미상.
플레이어들의 신원은 절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기로 유명하다.
주기적으로 로그 등을 삭제하고 서버를 옮겨가며 3년째 운영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