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전쟁을 주름잡고자 미리 준비를 했다.
“아이작, 포자가 터져서 연기가 자욱해지면 연기를 해라.”
“무슨 연기를 말씀입니까?”
“최대한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지르도록.”
“아.”
아이작이 자신의 할 일을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라가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혼란을 가중시켜라. 연기가 전부 걷히기 전에 빠르게 치고 빠진다.”
오랫동안 머물 생각은 없다.
필요한 점수만 얻고 구매한 뒤 빠질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체류할수록 대적불가의 적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지니까.
머지않아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열 명이 넘는 도전자를 학살했습니다!》
《업적 ‘전장의 학살자’를 달성했습니다.》
《40점을 획득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40h 17m을 획득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1,000h를 돌파했습니다!》
필요한만큼의 점수를 획득했다.
도합 50점.
이후 자판기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들였다.
《‘탐지기(10)’를 구매했습니다.》
《중복구매가 불가능합니다.》
《‘미궁티켓(1)’을 구매했습니다.》
《‘미궁티켓’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조건추가의 거울(1)’을 구매했습니다.》
《‘조건추가의 거울’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괄호 안의 숫자는 판매하고 있는 물건의 잔여수량이었다.
탐지기를 제외하고 한정적으로 하나씩만 팔고 있는 걸 모두 사들인 것이다.
그 외에도 목록은 꽤 있었지만 아주 특별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미궁상인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감이 잡혔다.
아마도, 나타나는 상인에 따라 목록 역시 다를 것이다.
지금 나타난 상인이 판매하는 물건은 대부분 초반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빠르게 자리를 이탈한 후 나는 구매한 것들을 확인했다.
【탐지기】
-주변 반경 10km 내의 도전자들을 탐지해냅니다.
-보유한 점수가 높을수록 탐지기에 크게 표시됩니다.
-5회 사용가능.
【미궁티켓】
-티켓을 사용하면 한 차례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1회 사용가능.
【조건추가의 거울】
-‘심연 미궁’에 입장한 도전자 중 한 명의 ‘행동 조건’을 추가시킵니다.
-1회 사용가능.
-사용하기 위해선 거울에 상대를 비추거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만약 입장한 도전자의 이름이 아닐시 그대로 거울은 사라집니다.
모두 사용횟수가 있지만 그 효과는 가히 절대적이다.
이곳 미궁을 뚫고 지나가는데 필수적인 도구들이었다.
‘지도가 없는 건 조금 아쉽군.’
지도를 팔기는 했다.
1,000점에.
물론, 당장 그걸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보유한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은 형편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처럼 천 시간 넘게 모은 플레이어?
손에 꼽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천점이나 보유하면 필시적으로 탐지기에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많은 점수를 보유한 사람은 노려진다.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게 먼저다.’
주변으로 아직도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확실하게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탐지기’를 사용합니다.>
<남은 사용횟수 4회.>
주먹만한 탐지기 위로 작은 점들이 우수수 솟아났다.
나를 중심으로 반경 10km를 표현해놓은 것이었다.
“주변으로 엄청나게 모여들고 있군요.”
아이작의 말마따나 표현된 점만 400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지금 미궁상인에 모여있는 게 50명 가량.
미궁이 얼마나 큰진 모르겠지만 반경 10km내에 400명이라니.
입장자가 총 몇 명일지는 감도 안 잡혔다.
“······ 바로 앞에 큰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자벨라가 긴장한 듯 말했다.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400개가량의 점들 중 큰 점이 두 개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앞에 있다.
누군지는 모른다.
다만, 압도적으로 도전자들을 살해한 강자라는 건 분명했다.
좁혀오는 속도 역시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뒤에는 미궁상인을 노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진퇴양난.
티켓을 써서 벽을 뚫고 도망쳐야 되나?
띠링!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띠리링!
거칠게 흔들리며 순식간에 방울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진 않을 것 같군.”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무기를 쥐었다.
나 역시 샤티로스의 공포에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 찰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은여우 가면?’
나타난 자는 은여우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상대의 머리 위로 보이는 레벨.
【★★】
미친.
절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2성의 초월자가 지금 눈앞에 있다.
여태껏 보아왔던 인간 중에선 가장 강한 존재였다.
‘검은 종.’
그리고 허리춤에 검은색의 종을 달고 있다.
문득 세렝게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조심하십시오. 그들의 ‘죄인’을 찾아내려는 집착과 끈질김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품에 울리지 않는 ‘검은 종’을 숨긴 자들이라고.
검은색의 종은 사신교의 상징이다.
하지만, 울리지 않는 종이라고 하지 않았나?
띠링! 띠링! 띠리리리리리링!
······미친 듯이 울리는데?
제국
은여우 가면을 포착한 찰나, 이미 놈은 내 앞에 있었다.
단순히 빠르다는 수준을 넘어선 속도.
나는 활을 내렸다.
그러자 아이작과 이자벨라 역시 무기를 다시 품으로 집어넣었다.
레벨을 확인한 순간, 정면에서 맞붙으면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탓이다.
은여우 가면은 살아있은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우리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리는 게 그나마 최선의 선택일 터.
“······.”
그런데, 은여우 가면은 내 앞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뭐 하는 거지?’
검은 종은 아직도 미친 듯이 울려대는 중이다.
내가 플레이어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놈은 반경 10km 내에서도 가장 점수를 많이 취득한 강자였다. 걸리는 게 있으면 모조리 베어버리며 이곳까지 왔다는 뜻이다.
말인즉, 적이라고 규정했다면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그냥 베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도 내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방향으로 보아 ‘미궁 상인’으로 향하는 게 분명한데도.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굳이 내 앞에 서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를 보는 게 아니로군.’
그제야 은여우 가면의 ‘흥미’가 내게로 향한 게 아님을 깨달았다.
새하얀 눈. 초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헤맸다.
‘나를 보는 게 아니라, 헬을 보고 있다.’
캬캬?
헬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깨닫곤 낫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캬캬캬?
“······.”
캬캬컄컄!
“······!!”
······ 설마 지금 둘이서 대화라도 하는 건가?
헬의 날 선 반응에 은여우 가면의 어깨가 한차례 들썩였다.
“정통의 후견자를 뵙습니다.”
그리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순간 감정이 냉철해지며 관련된 지식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떠올랐다.
‘정통한 후계자.’
헬을 칭하는 말이었다.
천상의 정령과 함께 적혀있던 문구.
무언가의 후계자라는 뜻이었으나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했다.
한데 지금, 은여우 가면의 검사가 정확히 헬을 ‘정통’이라 칭하며 나를 정통의 후견인이라 말한 것이다.
은여우 가면은 헬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럼 은여우 가면은 누구란 말인가?
“사명에 의해 저는 미궁의 망자를 제거해야 하는바, 직접 함께하지 못함에 사죄드립니다.”
“······.”
사명.
미궁의 망자.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설마 검성 라일리를 제거하러 들어왔다고?
어쨌든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을 땐 침묵이 답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괜히 존재하겠나.
“우선 이것을 받으십시오.”
이윽고 은여우 가면이 품에서 황금색의 패 하나를 내게 건넸다.
원형의 마패와 같이 생긴 패.
‘이건······.’
패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내심 놀랐다.
큰 오망성이 그려져 있고, 그 큰 오망성의 중심부에 작은 오망성이 자리하는 형태.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황금 오망성. 아르혼 제국의 상징이다.’
아르혼 제국!
대도시 50개 이상을 보유한 대륙의 최강국이다.
하지만 게이머로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장소가 제국이었다.
그들 황실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빌헬름으로 활동할 때조차도 거의 접촉이 없었으니까.
‘황제의 인장이 찍힌 패를 들고 다니는 검사라니.’
게다가 더욱이 놀라운 건 패에 찍혀있는 황제의 인장이다.
이 패만 있으면 제국의 도시 어디든 프리패스로 출입할 수 있다.
황족이 주거하는 가장 은밀한 성조차도 말이다.
뿐만인가.
······ 플레이어들에게 갖다 팔면,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소도시 하나의 가격 정도는 붙으리라.
심지어 그것을 내게 줬다.
“지금으로부터 87일 후 ‘사신교’의 본교에서 ‘사신의 만찬회’가 열립니다. 이 패와 함께 황금 염소의 가면을 쓰고 찾아오십시오.”
이어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여우 가면이 한차례 고개를 숙이곤 떠나갔다.
확실히 바빠보인다.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진 은여우 가면은, 어느덧 미궁 상인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탐지기로 확인하자 그가 도착한 이후 순식간에 50여개의 점들이 사라졌다.
상인을 노리던 자들을 전부 학살한 것이다.
나는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사신교가 어디있는데?
*
아이작과 이자벨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은여우 가면을 마주하자마자 자신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격의 차이.
무공의 차이가 너무나도 현격했기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아이작, 이자벨라.
둘 다 내가 키운 캐릭터다.
성장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초월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특히 이자벨라는, 10레벨이 되면 자동으로 ‘별’의 위치를 알게되는 신비를 지녔다.
아직 한번도 발견되지 않은 극소수의 별 중 하나, 초월성 요르문간드.
아이작 역시 능력치만 조금 더 채워주면 ‘별’의 인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성각자가 나타나거나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마.”
걱정하지 마라.
싫어도 도달하게 해줄 테니까.
내가 호언장담하자 그제야 둘의 표정이 풀렸다.
그 외에도 묻고 싶은 게 있어보이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와 사신교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판게니아에서도 최근 ‘사신교’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8영웅 막심, 놈이 ‘죄인’이며 그래서 자신을 따르던 공작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신교의 이름이 급부상한 건 당연지사.
8영웅들은 공식적으로 막심을 축출했다. 이제는 7영웅이 된 것이다.
이만한 스피커를 다루는 자가 역시 그들 중에 있다.
‘높은 확률로 마스터겠지.’
마스터는 지구에서도 ‘타차원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었다.
스피커를 다루고 활용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놈이었다.
빌헬름과 같이 나머지를 영웅화 시킨 것도 그의 역할이었으리라.
어쨌거나.
‘이 미궁은 너무 크다.’
나는 지금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미궁은 너무 크다.
심연의 지배자가 있는 위치도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걸어서 미궁을 전부 돌려면 1년은 더 걸릴 것만 같다.
자칫 중간에 길을 잃어서 로그아웃하면 최악의 초기화되어버린다.
하지만, 입장 조건이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1년치의 조각을 지닌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아예 이 미궁을 깨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것이거나.
‘틀림없이 지름길이 있다.’
지름길.
숨겨진 공간.
혹은 또 다른 워프.
확실히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 미궁은, 절대로 걸어서 도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있을까?
잘 보이지 않는 곳, 혹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