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총점 36점이 기여도에 따라 분배됩니다.》
《란돌프 10점, 아이작 10점, 이자벨라 16점》
《점수는 여러 이벤트에서 획득, 사용 가능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10h 11m을 획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바리안을 쓰러트리자 점수가 정산됐다.
“헉, 헉, 훅.”
전신에서 땀을 흘리며 이자벨라가 숨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죽은 바바리안의 시체에서 황금빛의 물결이 떠오르며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이자벨라. 황금률이 몇 시간 늘어났지?”
“후웁··· 16시간 27분 늘었습니다.”
대략 16시간 가량이라.
점수와 지닌 황금률의 조각간에 관계가 있는 듯했다.
이건 나를 죽이면 순식간에 900점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스아아아!
시체를 향해 벽에서 손이 뻗어왔다.
이윽고 모든 시체가 벽에 흡수되는 것을 보며, 나는 살짝 이맛살을 구긴 채 물었다.
“사막 여왕도 참전한 건가?”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바리안이 있는 걸 보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사막의 대전사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바바리안’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사막여왕을 호위하는 가장 명예로운 전사들이다.
여왕을 호위해야할 놈들이 미궁에 있다.
그것도 돈을 받고 고용된 것 같았다.
사막도시 파이살메르가 재정난에 휩싸인 게 아니고서야.
‘고용된 건 단순한 구실일 수도 있겠군.’
한꺼번에 미궁에 들어갔다간 도리어 혼란만 커진다.
그룹을 나눠서 침투하는 게 여로모로 유리하다.
그래서 다른 입장자들에게 고용된 형태로 각자가 공략을 진행하고 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왜 그들이 심연 미궁의 공략을 시작한 걸까?
‘여왕이 참전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사막여왕은 반인반마다. 외견은 인간이지만 그 속엔 괴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정체는 나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누구도 몰랐다.
다만, 저주를 걸고 피를 먹는 걸 보면 고위의 흡혈종 중 하나가 아닐는지 예측할뿐.
세렝게티가 있다면 몰라도 지금으로선 피하는 게 상책이다.
여왕과 다수의 바바리안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으므로.
“고개 흔들지 마라.”
“아······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이자벨라가 퇴장당할 뻔했다.
이거 생각보다 귀찮은 제약이다.
특히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이나 그 뒤에는 더더욱 신경쓸 겨를이 없다.
‘플레이어, 사막도시, 여신교와 대지신교, 또 어디가 참전했을까?’
그리고 생각보다 더욱 많은 곳에서 이번 미궁전에 참전한 것 같다.
한시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그때였다.
《미궁상인이 등장했습니다.》
《미궁상인은 특별한 물건을 한정적인 수량으로 판매합니다.》
《특정 시간마다 미궁상인은 무작위로 텔레포트 되며, 모든 입장자에게 위치가 공유됩니다.》
《현재 미궁상인은 114.447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당신의 좌표는 114.331 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미궁상인이 등장했다.
*
젠장할!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함께온 길드원들이 모조리 몰살당한 탓이다.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뭐냐고. 그놈은 대체, 뭐냐고!’
은여우의 가면을 쓴 검사.
10레벨의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도 사냥했던 길드원들이 그놈 하나에게 전멸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어찌할 틈도 없이.
‘분명히, 검은 종을 달고 있었지.’
허리춤에 있는 검은종이 떠오른다.
검은종은 사신교의 상징 아니던가?
그럼 그 은여우 가면의 검사는 사신교와 관계가 있는 걸까?
“이, 이봐!”
그때였다.
그의 앞을 지나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별 생각없이 지나가던 여인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를 부르는 건가요?”
“그래, 너! 혹시 물약 같은 거 가지고 있냐?”
“물약이요?”
“아니, 잠깐. 넌 여신교의 사제구나. 그럼 나를 좀 치료해다오. 사례는 확실하게 하겠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빌어먹을 은여우 가면.
놈을 죽여버릴 테다.
마침, 운이 좋았다.
여자는 여신교의 상징 중 하나인 황금 문양의 반지를 차고 있었다.
저 반지는 여신교에서도 상위의 사제 이상만이 수여받을 수 있는 반지가 분명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아 성녀는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여신교의 사제라면, 다친 자신을 그냥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치료해드릴게요.”
“고, 고맙다.”
여인이 남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꽈득!
그대로 머리를 돌려버렸다.
즉사한 남자를 보며, 여인이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치료해드렸어요~”
경합의 장(3)
114.447
미궁상인이 등장한 좌표다.
114.331
현재 내가 있는 장소의 좌표였다.
가로와 세로를 기준으로 하고, 1의 단위가 대략 10m 정도임을 고려하면 적어도 수km 내외에 미궁상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입장자 모두에게 고지된다.’
문제는 나 혼자만 이 문구를 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입장자가 봤다.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이들 중 몇 명이 상인을 노리고 달려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몇이 모여도 상관없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강자들이다.
그라시아, 마스터를 비롯한 플레이어 초월자들.
사막여왕과 같은 판게니아의 강자도 분명히 더 있을 터.
그들과 마주치게 되어 경쟁을 벌이면 사상자가 필히 나오게 되겠지.
그쪽이 죽든, 우리가 죽든 어느 한쪽은 반드시 전멸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후자의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더 크기는 하지만.
‘상식적인 선에선 피하는 게 맞다.’
점수가 얼마나 필요한지도 알 수 없고, 강자들 외에도 수많은 피라냐가 몰려들 건 자명하다.
게다가 가깝다고 해도 이곳은 미궁이다.
헤매기 시작하면 저 좌표에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무슨 물건을 팔지도 모른다. 만약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이면 허탕만 치는 셈이다.
차라리 그사이에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저들이 상인을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일 때.
유유히 그 옆을 지나가면 선두를 잡을 수 있으리라.
“어쩌시겠습니까?”
“달려라.”
허나, 인생은 못 먹어도 고였다.
*
······ 그라시아는 핏물이 묻은 검을 털어내며 자신의 앞에 뜬 메시지를 바라봤다.
‘미궁상인.’
설마 이게 벌써 뜰 줄이야.
미궁상인에게서 히드라곤의 혼을 비롯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한다.’
반드시 가장 먼저 선점해야만 한다.
당연히 자신을 막는 놈들은 모두 제거할 것이다.
이곳은 경합의 장, 심연 미궁이다.
입장한 모두가 각오하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구룩, 구루룩······!
수많은 시체들 중 아직도 살아있는 게 있었다.
모습이 기괴한 키메라.
“귀찮게 하는군.”
그대로 검을 던져 키메라의 미간에 꽂아넣었다.
즉사시켰으나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심연미궁에 있는 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키메라와 언데드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괴물들이 있다.
물론, 누군가가 스킬로 만들어낸 존재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수준이 높다.
최소 8레벨.
높은 건 10레벨에 다다른다.
이정도로 완성도 높은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자는 그라시아가 알기로 두 손가락에 꼽는다.
히드라곤을 만들어낸 미치광이 생명공학자와 플레이어 민트초코맛있어요······.
‘그 둘은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철저하게 숨어서 행동하는 자들이다.
이 둘이 아니라면, 괴물이라는 소리인데.
이만한 언데드를 부리는 괴물은 꽤 있었다.
예컨대 엘드리치, 다크로드, 심연 누더기 고울, 사주력 중 하나인 사왕 등.
그 하나하나가 마주치면 귀찮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다.
그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막아서면, 벨 뿐.’
고민하지 않는다.
적이 누구라도 관심없었다.
그의 최종목표는 검성 라일라.
미궁의 지배자이자 심연의 지배자인, 자신과 같은 검성의 칭호를 단 존재!
‘놈을 죽여 나를 증명하고, 이 구역의 주인이 되겠다.’
이곳은 심연이다.
라일리는 심연의 주인이다.
그리고 심연은, 과거 수복하지 못한 판게니아 지상의 옛 땅이다.
라일리가 갇혀 있는 죽어버린 땅 말이다.
즉, 라일리가 죽으면 이 땅은 천공으로 떠오르며 대륙에 편입되고 도시가 된다.
죽인 자가 이곳 ‘미궁 도시’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다.
여타 다른 심연의 지배자를 죽이고 도시가 되었던 곳들처럼.
그 과정에 걸친 것이라면 전부 베어버리면 그만.
수웅.
수웅.
수아아악.
그라시아의 등 뒤에서 천 자루에 이르는 검들이 떠올랐다.
“찾아라.”
슉슉!
쉬이익!
천 자루의 검들이 미궁 전역에 퍼지며 길을 밝히고 미궁상인을 찾기 시작했다.
*
수많은 입장자가 미궁 상인에게로 모여들었다.
최대한 빨리 닿아야만 ‘특별한 물건’을 살 수 있으니!
펑!
그 소리가 시작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연기가?”
“버섯 포자?”
“독이다!”
무언가를 밟자 포자가 터지며 시야를 어둡게했다.
동시에 포함된 독이 신경을 마비시켰다.
쉬익!
퍽!
“악!”
그 사이로 날아오는 화살.
대부분이 맞는 순간 즉사했으나, 겨우 살아도 문제였다.
“아, 앞이 안 보여!”
“살려줘!”
“내, 내 몸이!”
“아악!!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여줘 제발!!”
비명이 난무했다.
게다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는 비명도 섞여있다.
차라리 죽여달라니.
살기 싫을 정도로 아프다는 말 아닌가.
그 비명은 다른 입장자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대체 누가 어디서 활을 쏘는 거야?’
‘평범한 활이 아니다. 분명히 고통을 추가하는 특수효과가 붙어있는 활이야.’
‘함정을 설치해뒀다.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야!’
함정을 설치해두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한 발 늦은 것이다.
사방에서 한꺼번에 노리면 몰라도, 모두가 경쟁자인 상황에서 단합이 될 리가.
‘젠장. 어떡하지?’
‘다음을 기약해야 되나?’
사람들은 경계에 서서 고민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연기가 걷혔을 때.
“뭐야. 아무도 없어?”
연기 안에서 활을 쏘던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미궁 상인.
“자판기······?”
자판기 하나만 덩그러이 놓여있을 따름이었다.
이후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죽여!”
“아무도 닿게 하지 마라!”
서로가 죽고 죽이며 자판기에 닿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 사이, 은신하여 몰래 자판기에 닿은 사람은 환희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멍청한 놈들. 미련하게 싸우다가 털리는 것도 모르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자판기에 손을 대자 곧이어 목록이 떠올랐다.
그리고 판매하는 목록을 본 남자는 표정을 굳힌 채 이내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남은 목록이 왜 이따구야?”
*
신이 주신 기회였다.
지근거리에 미궁상인이 떴는데 이걸 무시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나가, 상인을 차지하고 씨앗을 뿌렸다.
‘점수가 부족해.’
상인이 자판기의 모습을 한 건 의외였지만,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점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몇 명도 자판기를 확인하고 그냥 가버렸다.’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아니다.
다만, 점수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미리 빠진 것뿐이다.
머지않아 이곳이 전쟁터가 될 건 물보듯 뻔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