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전용기를 타고자 들어섰을 때였다.
그라시아의 눈에 한 남자가 밟혔다.
영국의 노신사.
늙었지만, 착각할 리는 없었다.
‘멜슨! 그가 왜 한국에?’
멜슨.
특정분야에서 정점을 찍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은퇴한 뒤 영국 왕실의 관계자로 내정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마치 지워진 것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왔다.
그것도 한 남자와 함께.
‘······왕실의 손님인가?’
아무리 그래도.
멜슨 정도나 되는 사람이 저 남자를 데리러 직접 한국에 왔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누구기에?
멜슨은 한국의 대통령도 직접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멜슨은 그라시아라 불리는 자신을 거들떠도 안 봤다.
세계의 스타, 지구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 자신을 모를 리는 없건만.
반면에 저 남자에겐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누구지?’
알 수가 없었다.
*
“올리버 도련님. 오늘 여자친구라도 만나러 가시나? 아주 꽃단장을 하시네~”
화장대 앞.
노파의 말에 올리버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후 앞에 놓인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보다······ 건강해 보입니까?”
“그럼요~ 아주 건강해 보여요. 밖에 나가도 아무도 아프다고 생각 못하겠는데?”
잘 빼입은 양복.
노파가 넥타이를 매어주며 다시금 올리버의 얼굴을 확인했다.
창백한 얼굴을 화장기로 가린 것이다.
핏기가 도는 것처럼, 건강해보이는 것처럼 보이게끔.
‘늙어서 주책이지. 눈물이 왜 나려고 하는지.’
노파는 조심스럽게 눈물을 훔쳤다.
올리버가 누군가를 만나는 건 근 5년만이다.
5년 동안 올리버는 이곳 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간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올리버가, 누군가를 만나려고 이렇게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올리버를 돌봐왔던 노파였기에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고 걱정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심장이 약한 올리버는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였다.
삶에 대한 의지도 없었다.
이곳 현실에 아예 눈길을 두지 않았다.
그랬던 올리버가, 의욕적으로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것도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도 이 정도로 준비를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정말 건강해 보입니까?”
이 물음도 벌써 수십번 째다.
노파는 그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내가 했지만 정말 감쪽같아요.”
“그럼··· 됐습니다. 이제 올라가죠.”
올리버는 잔뜩 긴장한 채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향하자 주변의 거친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도착예정 시간까지 아직 한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예. 괜찮습니다. 바깥 공기가 좋네요.”
“추운데 걸칠 거라도 가져올까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올리버는 하늘만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로 바다를 건너, 헬기를 타고 이곳까지 도착하는 게 모든 예정이었기에.
올리버의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할까, 경건해보이기까지 했다.
태양을 마주하며 올리버는 무언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세월 올리버를 지켜본 노파는, 이런 올리버의 태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드디어 올리버가 알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올리버는 그 아픈 몸으로 꿈쩍도 하지 않고 헬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노을 진 하늘의 지평선에서 헬기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
올리버가 있는 힘껏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뭐라고 말하면서 맞이해야······.
반갑습니다, 저는 허드슨입니다.
아니, 올리버입니다.
이름은 뭐로 불러야하지?
팬텀님? 란돌프님? 아니면 박현명씨?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심연미궁] 최상의 시작
가만히 헬기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 하나.
‘만화 같군.’
섬 가운데에 덩그러니 솟은 성이라니.
마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성 같다.
영국을 온 것도 처음이지만 이런 성을 직접 보는 것도 처음이다.
아. 25시간 동안 공중에 떠 있던 것도 처음인가?
여러모로 처음 하는 경험이 많은 하루였다.
‘여기에 허드슨이 있다고?’
이만한 섬과 성, 헬기와 전용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신분은 아닌 듯싶다.
단순히 황금도시 아르카나의 수완 좋은 도박쟁이라고 생각했건만.
“도착했습니다.”
헬기를 조종하던 멜슨이 입을 열었다.
성의 꼭대기에 선 헬기가 조용하게 착륙했다.
잠시 후 헬기의 문이 열리자 나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반갑습니다.”
눈앞에서 맞이해주는 건장한 남자 한 명.
유심히 남자를 살폈다.
키는 185cm쯤 되어 보인다.
구불거리는 황금빛 머리칼에 푸른 눈.
호리호리한 몸이긴 하지만 제법 인상적이었다.
이 남자가 올리버다. 허드슨의 진짜 모습.
“저는 허드······ 올리버입니다.”
“박현명이다.”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긴장한 듯 손에서는 땀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입가의 미소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판게니아에서 보였던 당당한 태도의 허드슨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나름 의연해 보이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글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돌연 올리버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끝에 희미하게 황금빛이 깃들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다.
황금빛을 내 머리에 대자, 정신이 살짝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말 알아들으시겠습니까?”
“······ 통역 기능도 있었나?”
살짝 놀랐다.
황금률의 조각에 이런 기능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있으면 있다고 알려주면 좋겠지만 뭘 더 바라겠나.
원래부터 이런 게임이었는 것을.
올리버가 작게 웃었다.
“예. 황금률의 조각에는 자동통역 기능이 있습니다.”
자동통역이라.
어쩌면 그 외에도 다른 기능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노파에게 시선을 두자, 올리버가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이분들은 모두 믿으셔도 됩니다. 제 심장과도 같은 분들이니.”
“그래 보이는군.”
“이 성에는 저희 넷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보안 역시 철저하고, 지도에도 이 섬은 존재하지 않는 데다 위성으로도 확인할 수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섬?
위성으로도 확인이 안 되는 곳?
불현듯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식자재 같은 건 어떻게 구하지?”
“일주일에 한 번 멜슨이 보급해옵니다. 아무튼······ 긴 여행에 피로하셨을 텐데, 숙소로 먼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헬기를 타고 보급해오는 모양이다.
이후 올리버가 앞장섰다.
그 모습을 노파와 멜슨이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새장을 나온 아이를 바라보는 느낌이 이럴까.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군.’
어깨를 으쓱했다.
사연은 있어 보이지만, 묻는 것도 오지랖이다.
게다가 남의 가정사에는 깊이 개입하는 게 아니다.
저쪽에서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굳이 내가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짐을 정리하고,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칠면조 요리로 시작해 채소 구이와 스테이크, 라자냐와 곁들일 와인까지.
올리버가 정숙하게 앉아서 절도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귀족인가?’
단순히 태도만이 아니다.
성 곳곳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사진, 물건들도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게 없었다.
“외람되지만, 두 분은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집사복을 입은 채 옆에 서 있던 멜슨이 물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느꼈지만 그는 나와 올리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올리버의 두 눈에 당혹이 들어찼다.
어디서 만났는지 정확히 정의하기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도박장에서 만났다고 할까?
요정여왕의 눈물을 가지려고 서로 딜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재밌기는 하겠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게임에서 만났습니다.”
“아! 게임 친구시군요!”
이렇게 들으니 뭔가 하찮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멜슨이 너털 웃었다.
“요즘 시대에는 게임으로 친구를 사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 멜슨. 식사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예, 도련님.”
기꺼워하며 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행동에 의연했던 걸 보면 올리버가 ‘디맨션 워리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스테이크를 썰며 천천히 올리버에게 시선을 던졌다.
‘역시 보이는군.’
허드슨의 상태창을 볼 수 있던 것처럼, 올리버의 상태창 역시 두 눈에 들어왔으니까.
<<올리버(허드슨) / 남 / 29세 / 중립 선>>
특이사항 : 서자
특이사항 : 심장병(악화), 간과 췌장에 이상, 당뇨, 기타 합병증 18종.
능력치는 없지만, 특이사항은 똑바로 보였다.
서자라니.
영국은 계급제도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귀족의 핏줄이라도 된단 말인가?
게다가 당장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몸 상태인 것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허드슨과 올리버의 괴리감에 대해서도.
‘판게니아에 집착하는 이유가 현실의 몸 때문이었나.’
단순히 세렝게티와 사랑에 빠져서만은 아닌 듯했다.
현실의 몸이 이래서야, 현실 외의 것에 집착할 수밖에.
올리버에게 판게니아는 훌륭한 도피처였을 것이다.
제2의 신분인 허드슨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이상향 같았으리라.
‘저 상태면 엘릭서도 듣지 않겠어.’
최상급 엘릭서를 사용해도 내부 장기가 회복되진 않는다.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저런 몸 상태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다.
물론, 고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성녀라면······.’
성녀가 직접 축복하면 회생할 기회는 있다.
허나 지구로 성녀를 데려올 수도 없고, 그만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는 이미 대원정에서 죽었다.
···세아 성녀.
그녀라면, 고칠 수 있을 텐데.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다. 맛있군.”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픈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이미 모든 상태를 파악해버렸다.
보기 싫어도 보이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축복 관련 스킬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별의 축복’은 저주를 지우는 스킬이지 몸을 회복시키는 스킬이 아닌 탓이다.
지금 내가 올리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티 내지 말자.’
평범하게 그를 대해주는 것일 터였다.
*
식사가 끝나고, 올리버는 성의 지하로 나를 안내했다.
성의 지하에는 거대한 원형의 문이 있었고, 몇 번의 인증을 거치자 무균의 실험실 같은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원형의 관을 보며 물었다.
“저건?”
“최첨단의 생명 유지장치입니다. 보조전력이 달려있어서 성의 전원이 나가도 반년은 족히 유지됩니다.”
올리버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성이 아니라 요새였다.
방공호 시설화된 최첨단의 요새.
그리고 이 모든 건 오직 한 명, 올리버를 위해 만들어졌다.
“대단하군. 그런데 왜 두 개지?”
“하나는 제 것, 하나는 박현명님의 것입니다.”
과연. 하나만 있었다면 껄끄러웠을 것이었다. 생명 유지장치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올리버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일 테니.
어쨌든, 방비는 완벽하다.
이만한 시설이라면 미궁을 완전하게 공략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이 정도로 준비해서 미궁에 돌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미궁이 진행되는 동안 잘 부탁한다.”
“예! 저만 믿으십시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린 듯 올리버가 힘차게 미소지었다.
*
올리버는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팬텀.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으니까.
비록 판게니아에서의 인상과는 전혀 다르지만, 분위기 자체는 닮아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팬텀이 한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
그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문 외에 팬텀을 직접 만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은 물론 있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내가 최초다.’
최초로 팬텀을 마주한 자.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팬텀은 전설이자 신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