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별의 계승자 클래스를 얻고 마력이 성력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그런 변수도 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훌륭하다.’
자연히 엄지가 치켜세워졌다.
판게니아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야말로 변수를 극복해나가는 게임이었다.
당연히 변수 하나가 차단된 것이니 훌륭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
히든 특성,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이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이 됐다.
진화는 했지만 아직 실감이 안 난다.
마찬가지로 정령에 특화된 특성인지, 아니면 ‘영원군주의 심장’이 던전의 조건을 삭제시킨 것처럼 다른 기능이 추가된 것인지.
‘이건 겪어봐야 알겠군.’
그래도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이건 무슨 스킬이지?’
스킬 하나가 생성됐다.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나타난 스킬의 이름은 다름아닌.
<급속성장(1Lv)>
······ 급속성장이라니.
마땅한 설명도 없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 몸에 사용하자.
<스킬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신체를 대상으로 쓰는 스킬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화분의 꽃은 어떨까?
<‘미라지아’가 ‘급속성장’을 시작합니다.>
미라지아. 판게니아에서 귀족들이 관상용으로 많이 키우는 꽃이 이곳 방의 창가에 있었다.
거기에 급속성장 스킬을 쓰자 먹혀들었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빠르게 성장하고 죽는 건 아닐까?
“음······?”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쩌적!
째에엥!
꽃의 뿌리가 미친 듯이 성장하더니, 이내 화분을 깨고 스믈스믈 창가와 방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무, 무슨일이십······ 헉?!”
“······!!”
소란에 들어온 아이작과 이자벨라가 방안의 광경을 보곤 경악했다.
촉수처럼 뻗은 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
삑-
삐익-
무균의 환자실에서 한 남자가 눈을 떴다.
크게 눈동자를 확대한 남자가, 재빨리 입을 가린 호흡기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 도련님! 갑자기 일어나시면······!”
남자를 체크하던 상황실.
그곳에서 나온 노인이 급히 남자를 말려세웠다.
“올리버 도련님. 안정을 취해야합니다. 그렇게 흥분하시면 심장에 해롭습니다.”
하지만 올리버라고 불린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대하신 분께서 찾아오실 겁니다. 제가 흥분하지 않게 생겼습니까?”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멜슨. 한국으로가서 그분을 수행해주십시오. 그분께서 편안히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한 치의 오점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멜슨이 가야합니다.”
멜슨의 두 눈이 요동쳤다.
올리버가 이토록 흥분한 모습은 난생 처음본 탓이다.
태생적으로 몸이 약해 다른 사람의 일에 일절 관심없던 올리버 아닌가.
세상사에 달관한, 사는 것을 괴로워했던 올리버였다.
그런데 위대하신 분이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할 말은 아닌 듯한데.’
······ 마치 신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팬텀. 아니, 박현명씨?
휘둥그렇게 눈을 뜬 채 모두가 기겁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고개를 갸웃하자.
“어어······!”
아이작이 입을 더 크게 벌린다.
그제야 내가 아니라 내 등 뒤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오호라.’
뿌리 하나가 나의 움직임을 흉내 내고 있었다.
손을 왼쪽으로 움직이자 뿌리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오른쪽 역시 마찬가지.
대략 30초가량을 그러다가 빠르게 시들었다.
“바, 방금 그건 뭡니까?”
“새로 얻은 스킬이다.”
“스킬이요······?”
무슨 스킬이 저토록 괴이하단 말인가.
뿌리를 키우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스킬이라니.
숲의 수호자 하이 드루이드도 하지 못할 기행이다.
나는 턱을 쓸다가 시들어버린 뿌리를 보곤 결론을 내렸다.
“실험을 좀 해봐야겠군.”
*
급속성장은 이미 성장한 식물보다 씨앗에 사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빠르게 발아하여 뿌리를 내린 뒤 2분 정도 움직이다가 말라비틀어졌다.
‘함정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겠군.’
이 스킬의 쓰임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성장시켜 열매를 맺고 팔면 가계에 도움은 되겠지만 거기까지 성장력이 유지되지는 않았다.
뿌리를 키워서 움직이는 정도인데, 함정이나 발목을 잡는 용도로는 나름 적합한 것 같았다.
‘스킬 레벨이 높아지면 범용성도 커지겠지.’
아직 스킬 레벨이 1에 불과하다.
10레벨에 다다르면 세계수와 같이 나무를 성장시킬 수 있을지 누가 알겠나.
‘목법사 인탱글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하거나, 장애물을 만들거나······.’
작은 뿌리가 솟게 하여 발목을 잡는 스킬, 인탱글.
크기야 적당히 조절하면 되고, 미리 씨앗을 뿌려둬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대신 씨앗만 충분하면 사용횟수에 제한이 없다.
그 외에도 장애물을 만들거나 벽을 쌓거나 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을 터.
앞으로 닥쳐올 ‘심연 미궁’을 대비하는데 여러모로 유용할 듯싶었다.
‘성장한 식물보단 씨앗이 더 효율적이었지. 그럼 씨앗 중에서도 더 효율적으로 작용하는 게 있을 거다.’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건 한국인의 종족특성 아니던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영주성의 창고에 있는 식물의 씨앗을 싹 쓸어와 하나씩 실험해보기 시작했다.
*
김포공항에 도착한 멜슨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국. 많이 발전했군.’
먼 과거에 멜슨은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한창 한국이 개발도상국일 시절 말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한국은 너무나도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냉전체제가 계속되어 항시 긴장 상태에 놓여있던 나라가 맞나 싶었다.
비행기 하나 제대로 띄우기 어려웠던 곳에 이만한 공항이라니.
사람들의 얼굴엔 나름의 여유가 넘쳐난다.
‘이곳에 올리버 도련님이 말한 그분이 있다.’
솔직히, 아직도 반신반의였다.
외부의 사람을 극도로 꺼리는 올리버다.
가족과의 왕래도 없다시피 한 올리버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려고 하고 있었다.
멜슨의 입장에선 기꺼운 일이지만, 만나려는 대상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멜슨이 아는 건 그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이름뿐이었다.
-Mr. 박현명.
그의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멜슨을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경악을 머금었을 일이다.
하지만 멜슨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비공개로 온데다 그를 아는 사람은 한국에 없을 테므로.
무엇보다 올리버 도련님의 간절한 부탁이다. 장소가 어디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해내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라시아다!”
“그라시아! 한 마디만 해주세요!”
“한국을 떠나는 건가요?”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수많은 기자에게 둘러싸여 누군가가 공항 내부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라시아.
한국에 체류하던 가장 강한 디맨션 워리어!
그가 한국을 떠나고자 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플레시가 터지며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그라시아.’
소란의 원인.
그 중심에 선 남자를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워낙에 많은 매체에서 다루기도 했지만, 그보단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그라시아의 출국날과 겹칠 줄이야.
게다가 기자들 사이에서 김하나의 모습도 얼핏 보인 것 같다.
최대한 모자를 눌러쓴 채 조용히 옆을 지나갔다.
내가 놈을 알아본 것처럼, 놈이 나를 알아볼 수도 있는 일.
한참을 들어가자 내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선 노인을 발견했다.
흰 머리칼에 영국신사 같은 느낌을 주는 얌전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제가 박현명입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노신사는 한국말도 곧잘했다.
“올리버.”
대답을 들은 노신사가 환하게 웃었다.
“저는 올리버 도련님의 집사 멜슨입니다. 편하게 따라오십시오.”
푯말을 접은 채 멜슨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런데 줄도 안 서고, 수속도 없이 어딘가로 곧장 향했다.
이어 ‘SGBAC’이라 적힌 건물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멜슨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응대했다.
하지만 뒤에 선 나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분은······?”
“저와 함께 갈 분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빠르게 수속절차 도와드리겠습니다.”
멜슨의 말 한 마디에 나를 보는 눈빛과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출입국수속과 검역, 세관통과가 하이패스로 이루어졌다. 대기가 없으니 이 과정이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이곳이 ‘전용기’를 타고온 VIP전용 항공관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국내와 해외의 VIP들이 소리없이 은밀하게 오고가는 장소.
‘허드슨한테 이런 설명은 못 들었는데.’
그냥 ‘부유한 집안’이라고 했지, 전용기를 탈 정도의 재벌이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차라리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으면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라시아······.’
놈이 있었으니까.
수속대를 넘어서자, 그라시아가 다시 보였다.
그라시아 역시 미국에서 전용기를 타고 날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라시아의 시선이었다.
놈이 나와 멜슨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알아봤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그라시아와 나는 접점이 없다. 그를 한눈에 알아본 건 그라시아가 워낙에 관심종자의 짓을 많이 하고다녀서다.
지금 한국에서 그라시아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조차 100%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판게니아에는 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천, 수만 가지의 방식이 있다.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란돌프라는 걸 알아볼 수도 있는 노릇.
하물며 그라시아는 나보다 플레이어로 지낸 시간이 훨씬 길었다.
나는 모르는 걸 놈이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만에 하나 전투가 벌어진다면.’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다.
놈이 나를 알아보고, 싸우게 되었을 때.
적어도 그라시아가 ‘강림’하거든 이길 수 없다.
하지만 허드슨의 말마따나 플레이어도 현실의 몸은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면, 지금 이 상태에서의 기습은 통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기습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여신의 이권.
녀석도 나와 똑같이 ‘수호벽’을 지니고 있을 터.
메인 퀘스트 3의 순위권에 오르면 수호벽을 주는데, 그라시아는 그곳에서 1위를 하고 있었다.
나로 인해 2위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9레벨의 수호벽을 지니고 있다.
‘수호벽은 로그아웃한 곳의 몸을 지켜주는 용도다.’
물론 지금 이곳은 로그인한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수호벽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조차 기각시켰다.
‘나보다 훨씬 많은 이권을 지니고 있겠지.’
분명히 수호벽과 비슷한 이권이 또 있을 것이었다.
없을 리가 없다.
그 이권으로 인해 시간을 벌고 강림한다면······.
뒤에 벌어질 일은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시선이 따갑군.’
전용기에 탑승하기 직전까지 그라시아는 나와 멜슨을 유심히 쳐다봤다.
공교롭게도 그라시아의 전용기도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용기의 출입구가 닫힐 때까지 놈의 시선은 계속되었다.
*
한국에서 더 이상 건질 것은 없다.
그라시아는 그렇게 최종판단을 내렸다.
유일급 검을 만드는데 재료가 되는 히드라곤의 혼을 지닌 주인도 찾지 못했고, ‘차원 균열’이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당시 그라시아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었기에 미국의 여론도 좋지 않았다.
‘심연 미궁에 대비해야한다.’
미련을 버렸다.
그보단 심연 미궁이 중요했으니.
심연 미궁을 돌파하려면 본국으로 돌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몸을 맡겨야만 한다.
로그아웃하면 초기화된다는 미궁의 미친 조건 때문이었다.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는 장소.’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은닉할 수 있는 장소와 사람이 필요했다.
다른 8영웅들?
그들도 못믿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해를 위해, 혹은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올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어지간한 공격은 이권들에 의해 막히겠지만 그것도 무한하진 않다.
결국 외부의 공격에 의해 로그아웃하게 되면, 미궁이 초기화되는 불상사를 겪게될 것이다.
‘심연 미궁에서 히드라곤의 혼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미궁상인.
나타나면 모든 입장자에게 그 위치가 고지된다는 상인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
온갖 혼을 비롯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들을 ‘미궁 상인’이 한정적으로 판매한다는 소문이.
게다가.
‘검성 라일리.’
자신과 같은, 검성의 계보를 잇는자.
‘라일리는 내가 죽인다.’
검성은 한 시대에 한 명만 존재할 수 있다.
두 명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설령 미궁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검성’의 이름을 쓰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라일리를 죽여, 자신이 진정한 검성임을 세상에 널리 알리리라.
먼 옛적의 검성을 완전히 심연 속에 가라앉혀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