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제국에서 이 사실을 알고 미궁에 참전한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까.
하여간에.
‘준비를 해야겠군.’
입장시간을 10일이나 준 것은 만반의 준비를 끝마치고 입장하라는 소리다.
미궁의 탐사에 필요한 황금률의 조각 역시 채워넣으라는 의미였다.
‘조각은 충분하다.’
나야 천 시간 가까이 사용할 수 있는 조각이 있으니, 이 부분은 걱정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파티의 유무다.
아이작과 이자벨라.
둘은 모두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시련을 깨나가며 얻은 것이다.
그래봤자 수십 시간에 불과하나, 초반의 진행에 도움이 될 건 자명했다.
이 둘을 남은 시간 동안 제대로 능력치 작을 시키고, 나 또한 숙련도작을 하며 대비를 해야할 것 같았다.
‘보상을 지체할 여유가 없군.’
가진바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하는 심연 미궁.
나는 즉시 품에서 황금색 열매를 꺼냈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보상이라며 내게 선물한 것.
일종의 영약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영약은 약빨이 받지 않는 몸이었다. 원체 많은 재능과 특성 탓에 영약을 먹는다고 더 좋아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열매는 다르지.’
허나, 이 열매는 다르다.
너무 달라서 큰일일 정도였다.
솔직히 위험해보여서 망설였던 게 사실이지만, 이제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주저없이 열매를 입에 털어넣었다.
그 순간.
<‘세계수의 열매’를 섭취했습니다.>
꾸룩! 꾸루룩!
위장이 미친 듯이 꾸룩대며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휘몰아쳤다.
“······!”
입술을 깨물며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벌리면 그 순간 열매를 토해낼 것 같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반응.
이런 격통은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도 처음이었다.
양손으로 목을 쥔다. 열매가 계속해서 튀어나올 것처럼 목구멍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정신은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미친······!’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으나 한 번 시작한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정신이 멀어지기 직전.
<‘세계수의 열매’가 소화되기 시작합니다.>
<업적 ‘금단을 깬 자’를 달성했습니다.>
<열매의 효능이 전신을 돌기 시작합니다.>
<흡수하지 못한 기운은 배출됩니다.>
<‘대식가’에 의해 모든 기운이 흡수됩니다.>
<흡수율 110%!>
<열매의 씨앗에 깃든 ‘거룩한 계보’를 흡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히든 특성 ‘드루이드의 자연친화력’이 ‘하이 드루이드의 대자연’으로 진화합니다.>
<자연계열 재능이 특화됩니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
*
마계.
그 끝의 왕좌에 앉아있던 마왕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몸은······ 완벽하군.’
마왕은 빌헬름의 몸을 차지하여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배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극한으로 단련된 몸.
비록 생명과 함께 이 몸에 부여됐던 별은 빼앗겼으나, 한계를 초월하여 넘어섰던 경험은 아직 육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마왕은 오랜세월을 살아가며 이 정도로 완성된 육체를 본 적이 없다.
여신의 장난질에 의해 육체가 죽어 이 이상으로 성장할 수는 없지만, 충분하다.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예전보다도 몇 배는 더 강해지리라.
“‘심연 미궁’이 열렸습니다, 왕이시여.”
되살아난 계층의 일곱 지배자들이 마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마왕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마침내 심연의 망령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나보구나.”
“이대로 지켜만 보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마왕은 작게 웃으며 탁, 손뼉을 쳤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여인을 본 계층의 지배자들은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신교의 간악한 앞잡이가 아닙니까?”
그 말에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해야할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아 성녀.”
“예.”
대원정에서 동료들을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했던 세아 성녀.
그녀는, 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이지 않았다.
대신 모든 의지를 말살시켜 인형으로 만들었을뿐.
마왕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희망이라 여겼던 모든 것에 절망하거라, 인간들이여.’
신을 대하는 태도
고통에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로그아웃하고 싶은 유혹을 백여 번 가까이 뿌리치고 나서야 고통이 사그라졌다.
여기서 로그아웃하여 도망쳤다간 흡수율에 지대한 영향이 갈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드십니까?”
“··· 허드슨.”
눈을 뜨자, 침실이었다.
내 옆에는 허드슨이 앉아있었다.
그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이내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로그아웃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드슨은 내가 플레이어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최상급 엘릭서를 가져다준 순간부터.
그 역시 플레이어였기에, 알 수 있던 것이다.
더불어 란돌프라는 이름 역시 알게 되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다.
나는 머리를 털고 상반신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이틀 지났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로그아웃을 안 하시더군요. 혹시, 특수한 영약 같은 걸 드신 겁니까?”
“그렇다.”
세계수의 열매.
그것의 흡수율을 최대치로 올리고자 나는 이틀을 내리 로그아웃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를 악물었을 따름이다.
허드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때 플레이어 대부분은 로그아웃합니다. 이틀 동안 미련하게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으니까요.”
이건 처음 알았다.
영약.
영험한 효험을 지닌 약을 일컫는다.
그러한 것들은 섭취 시 대부분 고통을 동반하는데, 대개의 플레이어는 그 고통을 못 참고 로그아웃해버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견뎌보니 로그아웃하는 게 마냥 좋은 수는 아닌 것 같았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서 우선 저만 곁에 있었습니다. 물론 바깥에서 앤드류 사제가 항시 대기하고 있긴 합니다만······ 다시는 그런 미련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장담은 못 하겠군.”
“또 그러시겠다고요?”
“영약을 먹고 로그아웃하면 흡수율이 떨어진다.”
확신했다. 로그아웃하면 흡수율이 떨어진다. 온전히 고통을 감내하며 흡수해야만 제대로 된 효과를 받는 것이다.
“그래 봤자 1% 정도 차이입니다.”
“1%도 크다.”
“······.”
허드슨이 할 말을 잃은 채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고작 1%의 차이를 더 내려고 이틀간 생고생을 하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없겠지.’
하지만 그 1%가 쌓여서 빌헬름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허드슨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강하게 말했다.
“란돌프님. 현실의 몸은 잘 챙기고 계신 겁니까?”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는······.”
“······ 이틀간 로그아웃을 안 했는데 그게 적당한 거라고요?”
“플레이어가 된 뒤로 현실의 몸도 이상하리만큼 튼튼해졌더군.”
“플라세보(Placebo)입니다. 플레이어들도 현실의 몸은 일반인과 똑같습니다.”
플라세보 효과.
가짜를 진짜처럼 믿게 하여 진짜와 같은 효력을 갖게 만드는 것.
플레이어가 되어 강인한 전사의 몸을 지닌 사람들은, 현실의 몸도 마찬가지로 강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허드슨은 누구보다도 이곳 판게니아와 현실 간의 괴리감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인데.’
그러나 플라세보 효과라고 하기엔 내 현실의 몸은 확실히 강인해졌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생기고, 근력은 사람을 번쩍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이삼일 정도는 물을 안 마셔도 견딜 만했다.
란돌프의 수준은 아니지만 평범한 인간의 기준은 훌쩍 뛰어넘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안 그런 건가?
“앞으로 7일 후에 ‘심연 미궁’이 열리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플레이어들도 난리가 났습니다. 타차원 커뮤니티를 비롯해서······ 제 개인적인 정보통에 의하면 아무래도 플레이어만이 참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지라.”
“플레이어만이 아니라면 어디가 참전한다는 거지?”
“여신교와 대지신교가 공지사항이 떠오른 직후부터 심연 미궁에 대해 떠들고 있습니다.”
“흠.”
정신이 번쩍 든다.
여신교와 대지신교. 대륙에서 가장 큰 집단 두 곳이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되는 건 순식간이리라.
아니,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판게니아의 강자들이 대거 참전한다면?
‘지옥도가 펼쳐지겠지.’
쉽지 않을 것 같다.
입장 조건인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에 대해선 굳이 묻지 않았다.
크람델의 괴물들도 가진 게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었으니까.
게다가 판게니아인과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제약이 있다.
그것에 대해 허드슨도 정확히 짚었다.
“아무래도 장기전으로 갈 것 같은데, 로그아웃하면 위치가 초기화되기 때문에 현실의 몸을 따로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렇겠군.”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미궁을 공략해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각축전이 벌어진다면 시간의 소모는 더 커질 터.
쉽게 생각하고 입장했다간 큰코다칠 듯싶었다.
무엇보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천 시간 가까이 있다고 해도, 현실의 몸을 생각해서 로그아웃하면 미궁의 위치가 초기화되어버린다.
아무리 현실의 몸이 강인해졌다지만 수십 일을 내버려 둘 만큼 초인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혹시, 따로 관리해줄 사람이 없다면, 영국으로 오십시오.”
“영국?”
“물론, 팬텀이란 이름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걸로 알지만······ 영국으로 오시면, 제가 확실하고 은밀하게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허드슨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란돌프가 팬텀이라는 걸 알지만, 그뿐이었다.
현실에서의 팬텀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철저한 비밀주의.
그 신비함을 자신 따위에게 깰 리가.
“그러지.”
“역시 힘드신······ 예?! 커헉! 콜록!”
상상도 못한 대답에 허드슨이 콜록대며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가 않는 모양.
‘허드슨이라면 믿을만하다.’
그 세렝게티가 선택한 남자다.
사람보는 눈에 있어선 세렝게티가 나보단 나았다.
게다가 허드슨의 ‘상태창’이 내게는 보였다.
다른 사람의 상태창이 보이는 건 플레이어가 된 뒤로도 처음있는 일.
그러니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영국 어디로 가면 되나?”
“제가 가는 건······ 아니, 그러면 안되겠군요. 혹시 국적과 이름이?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놓겠습니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표가 얼마더라?
허드슨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긴 했지만, 일반석도 수백만원을 호가할 텐데. 괜히 부담만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알아서 가마.”
“아,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래.”
저렇게까지 자기가 하겠다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국적과 이름을 말하자 허드슨이 부리나케 방밖으로 나갔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태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허드슨이 방을 나서고나서야 나는 차분히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상태창>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별의 계승자
<능력치>
레벨 : 6
힘 : 83(73+10) 체력 : 83(73+10) 민첩 : 89(74+15)
지능 : 83(73+10) 성력 : 86(76+10)
특이사항 : ‘별의 계승자 - 별 2개(모든 능력치+10)’와 마지막으로 착용한 ‘샤티로스의 공포(민첩+5)’로 인해 능력치가 추가된 상태.
우선 모든 순수능력치가 1씩 상승했다.
세계수의 열매에는 적혀있지 않았던 변화다.
‘흡수율이 높아서 능력치도 올랐나보군.’
맥스치까지 찍혀있는 상태에서 능력치가 올랐다. 웬만한 영약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민첩이 거의 90이라.’
일전 막심을 지배해 민첩도 1이 올라갔고, 샤티로스의 공포까지 있어서 민첩 수치가 가장 높았다.
민첩 89.
감각과 순발력 따위가 미친 듯이 높다는 의미다.
민첩은 100이 넘어가면 ‘육감’이 생기는데, 기습적인 공격에서 반격을 하게 해준다.
하지만 능력치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건 재능과 히든 특성의 진화였다.
‘사원소가 바뀌었군.’
【근원의 불】【근원의 물】【근원의 땅】【근원의 바람】
단순한 불, 물, 땅 바람에 근원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근원.
사물이 비롯되는 시작.
뭐가 달라진 거지?
나는 옆에 놓인 초를 바라봤다.
아직 불타고 있는 초의 위로 손을 가져가자.
‘오.’
불이 내 손을 타고 올라오더니 이내 휘감는다.
마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기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뜨겁지 않았다.
그제야 근원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속성방어력이 대폭 올랐나보군.’
거인의 항마력은 오직 마력으로 인한 타격만을 막아준다. 그러나 뜨거운 불길 속을 걸을 수 있게 해주진 않았다.
이제는 그게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속성 공격은 죄다 버틸 수 있을 듯싶었다.
간혹 속성 특화 클래스는 마력이 아예 ‘속성력’으로 이름이 바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