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이 누군가의 적격한 후계자라는 뜻일 터.
‘차원베기는 또 뭐지?’
의아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원베기라니.
설마 진짜로 차원을 베는 건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스킬명이 거창한 것은 많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거창한 이름은 잘 없지만, 차원베기라······.
“차원베기.”
백문이 불여일견이랬다.
캬캬!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이 낫을 휘둘렀다.
그러자.
싹둑!
······ ‘의지’가 만들어놓은 워프가 잘려나갔다.
캬캬캬캬!
한 번 자르는 맛을 보자, 신이 난 녀석이 마구잡이로 낫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르릉!
《연결을 유지하는 던전마스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던전을 지탱하는 모든 ‘차원연결’이 끊겼습니다.》
《던전이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던전 자체가 매몰되어간다.
끝에서부터 마치 압축하는 것처럼 검은 공간에게 먹혀가고 있었다.
심연이다.
세렝게티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워프가 잘려서 못 나가는 거 아닙니까?”
“으음, 텔레포트 북으로 나가야겠군.”
설마 차원베기라는 게 워프의 연결을 잘라내는 능력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던전까지 아예 소멸시키다니.
생전 처음 보는 스킬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멍하니 있다간 심연에 잡아먹힌다.
하는 수 없이 정령을 멈춰세우고 텔레포트 북을 열었다.
화아악!
텔레포트 북을 펼쳐 워프를 열자, 녀석의 전신을 일렁거리는 검은 불꽃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갑작스러운 변화.
이 녀석, 워프와 관련해서 뭔가가 있는 건가?
“이건 자르면 안 된다.”
캬캬.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림자들은 던전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데미갓 특성 던전.
만약 놈이 던전을 나온다면, 그 즉시 습격할 심산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쿠릉!
‘던전이 무너집니다.’
‘갑자기?’
던전은 클리어 되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특히 이런 특성 던전 같은 경우엔 계속해서 도전자를 받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던전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풍지박살이 나는 형태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심연’에 의해 잡아먹히고 있었다.
‘심연입니다!’
‘물러나야합니다. 경계가 침식당하고 있습니다.’
심연이 들이닥친다.
도시붕괴 현상과 같았다.
도시를 연결하는 모든 워프가 고장나면, 심연이 들이닥치며 도시 자체를 없애버린다.
그림자들은 결단을 내렸다.
심연이 시작됐다면 던전을 포함한 이곳 영역 전체가 삼켜질 것이기에.
하지만 워프에 도착한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워프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다른 워프는?!”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잘 작동하던 게 왜 갑자기······!”
모든 워프가 고장났다.
하지만, 갑자기 왜?
방금 전에 도착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잘 작동하던 워프 아닌가.
“텔레포트 북! 텔레포트 북도 챙겨오지 않았나!”
“테, 텔레포트 북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림자의 수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텔레포트 북마저 작동하지 않는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워프가 고장나 심연에 가라앉혀지면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심연의 지배자를 죽이는 것.’
해당 지역을 삼킨 심연과 그 지배자를 죽여야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심연지배자들은 하나같이 괴랄할 정도로 강했다.
‘그나마 약한 심연지배자라면 살 수 있다.’
그림자들도 약하지 않다.
어지간한 심연지배자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사냥할만 하다.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 떠오른 글귀.
<<10분 초과시 : 심연의 강자 ‘검은 살갗 혼종’이 등장합니다.>>
<<20분 초과시 : 심연의 초강자 ‘용의 살갗 혼종’이 등장합니다.>>
<<30분 초과시 : 심연의 지배자 ‘신의 살갗 혼종’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본 그림자들의 두 눈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심연의 지배자들 중에서도 악명 높은 신의 살갗 혼종이라니!
‘좆됐다······!!!’
[공지사항]
툭, 툭.
마스터는 의자에 앉아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그림자들.
하루를 샜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매일 보고를 하게 했음에도 조용하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림자들을 처리한 건가?”
그럴 리가.
란돌프가 계속해서 기이할 정도로 높은 업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메인 퀘스트 6을 달성한 시점에서 아무리 강해봤자 레벨 8수준일 터.
성좌들에 의해 보상의 목록이 업그레이드된다고 한들 현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은 기껏해야 고대 등급 수준일 것이었다.
‘그 이상일 수가 있나?’
최대치로 잡은 게 그 정도.
이것도 상식을 웃도는 수준으로 계산한 결과다.
마스터도 메인 퀘스트 6을 깰 때는 레벨 7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이조차 소위 말하는 ‘쩔’과 온갖 보물을 두루 장착하여 얻어낸 속도였다.
그라시아처럼 특정 퀘스트의 도달을 위해 레벨을 올리고자 ‘노가다’를 하려거든, 그만한 시간이 들어가는 법이었고.
하지만 란돌프가 플레이어가 된 건 이제 고작 석 달이다.
솔직히 석 달 만에 레벨 8을 달성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또한 그렇게 레벨링만 했다면 능력치는 떨어져야 정상. 맥스치까지 능력치를 채우면서 레벨을 올리기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고로, 불가능하다.
“협력자가 있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생각을 바꾼다.
팬텀에게 협력자가 있다면.
그림자들을 지워낼 정도의 강자가 팬텀을 돕는다면, 가능하다.
마스터는 적어도 2성 이상의 초월자가 놈을 돕는다고 가정했다.
2성 이상의 초월자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극소수.
하지만 2성 이상인 자들은 마스터가 모두 꿰고 있다.
남은 건 판게니아의 NPC들인데.
‘제국과 얀 왕국에 있다고 알려져는 있지. 본 적은 없지만.’
둘 다 플레이어가 접근하기 매우 까다로운 장소다.
소문일 뿐이고 실체를 접해본 사람은 없다.
그들이 팬텀을 돕는다?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림자들이 고전하고 있을 뿐,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마, 마스터님! 모든 그림자가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
문을 열며 알려오는 소식에 마스터는 입을 꾹 닫았다.
확인사살.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그림자들이 모인 지부로 사람을 보내 확인한 것이다. 란돌프를 습격하던 도중 죽었다면 현실의 신체 역시 죽었을 테니까.
그런데 죽었다.
그것도 모두 죽었다.
그림자의 전멸. 몇 년간 키워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현실 전력의 20%가 증발한 셈.
이게 알려지면 다른 세력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빌어먹을!”
콰앙!
마스터가 그대로 책상을 내리쳐 두 동강을 냈다.
“이런 개같은!!!”
그럼에도 도저히 화가 풀리질 않았다.
풀릴 리가 없었다.
자신이 만든 제국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
기사의 정원.
와이저 후작이 주인으로 있는 도시로 돌아온 이후 나는 ‘휴식중’이었다.
‘마음이 아주 편안하군.’
의지와의 싸움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져갔다고는 하나, 놈과 대결하는 건 여간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휴식이다.
정서적인 안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저것 해야할 것도 많았으니까.
캬캬!
나는 주변 곳곳을 호기심 가득한 동물처럼 돌아다니는 녀석을 바라봤다.
작은 사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천상의 정령.
데미갓 특성 던전의 모든 워프를 잘라낸 이후 녀석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Lv.2】
【천상의 정령】
【정통한 후계자】
【차원베기(2Lv)】
레벨이 올라갔다.
딱히 사냥을 하거나 한 건 아닐진대.
경험치가 오르는 메커니즘이 평범한 정령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워프를 잘라내어 도시를 가라앉히는 존재라.’
워프를 마음대로 잘라내고, 도시를 심연에 가라앉힌다?
설명만 들으면 뭐 그딴 비정상적인 존재가 다 있느냐며 설레발을 칠 것 같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워프란 무엇인가.
대륙을 잇는 유일한 통로다.
하늘 위에 떠있는 대륙들은 모두 천공의 여신 피나의 작품이었다.
대륙을 만든 대지의 여신 레아는 멸망에게 죽었고 32개의 별로 나뉘었다.
이어 대륙 전부가 멸망하려는 찰나 피나가 남은 대륙을 천공으로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천공의 대륙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잇기 위해서 필요한 게 바로 ‘워프’였다.
‘워프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간은 심연에 잡아먹힌다.’
단순히 대륙을 띄워놓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워프 없이는 대륙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럼 이 녀석은 심연에서 태어난 종인가?’
워프에 대항하고자 태어난 종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심연의 입장에서 워프는 자신들의 침식을 막는 귀찮은 보호막일 테니.
그 보호막을 없애는 종이 태어나는 것도 가능은 할 테다.
심연 속에는 뭐가 있을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온갖 게 존재하니까.
캬캬?
한참 고양이처럼 돌아다니던 녀석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배고프냐?”
캬캬!
배가 많이 고프신 모양이다.
그런데 해골이 뭘 먹을 수가 있나?
정령은 계약자의 마력을 먹는다.
나는 마력이 성력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하지만 녀석이 성력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 명예를 원합니다.》
아. 명예를 먹는 건가.
하기야 녀석이 태어날 때 ‘오염된 명예’를 모두 섭취해버렸다.
만약 그게 악업이었다면 어땠을까.
‘악업을 먹이로 줘야했다면, 끔찍했겠군.’
주기적으로 악업을 쌓아서 줘야한다니.
머지않아 대륙 전체에 공적이 되어 현상수배가 될 것 같다.
그나마 명예라서 다행이다.
“알아서 먹어라.”
캬캬!
녀석이 좋아죽겠다는 듯 웃으며 내 머리 위로 낫을 휘둘렀다.
그러자 머리 위에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느낌과 함께, 그 잘려나간 아지랑이를 녀석이 꿀꺽 섭취해버렸다.
《‘???’가 명예 30을 섭취합니다.》
《남은 명예 746》
······ 30이나 먹는다고?
30이면 웬만한 명예 퀘스트를 두 번은 해야 얻을 수 있는 수치다.
설마 이걸 매일 먹는 건 아니겠지?
캬캬캬캬캬!
녀석이 내 뺨에 얼굴을 비비곤 또 실컷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재밌는 녀석이었다.
‘이름을 지어줘야 할텐데.’
계속 ‘녀석’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는 노릇.
정령과의 유대를 위해서라도 이름을 지어주는 건 필수다.
잠시 고민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헬.”
캬?
“네 이름은 ‘헬’이다.”
지옥이라는 의미보단 빌헬름의 ‘헬’을 따서 헬로 지었다.
캬캬캬캬!
···좋은가보다.
참 긍정적인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의 이름이 ‘헬’로 확정됐습니다.》
《‘헬’과의 유대감이 상승합니다.》
《Tip : 정령과의 유대감이 높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정령이 소환자의 의도를 눈치채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름도 지어줬겠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언박싱.’
보상을 받을 때가 왔다.
메인 퀘스트 6을 클리어하며 떠오른 11개의 보상목록.
《극진(極眞) 세이버》, 《찬란한 명예의 로브》, 《절대적인 허무》, 《오염된 왕의 갑옷》, 《오염된 왕의 왕관》, 《오염된 기사단의 원탁》, 《별걸음쟁이》, 《원죄의 지팡이》, 《샤티로스의 공포》, 《불결함의 마창》, 《미궁의 끝자락》
그것을 일일이 뜯어보며 살폈다.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 없다.
극진 세이버. 두 단계나 끝을 본 무기부터 시작해 나머지 것들도 모두 아이템 레벨이 최상위의 수준이었다.
‘활이 하나 필요했는데, 잘됐군.’
다음 메인 퀘스트의 클리어를 위해선 원거리 무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