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벨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어린아이의 모습.
소노라.
여왕의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던 그 소녀를 이자벨라가 죽인 건.
“사실입니다. 그 아이를 제가 죽였습니다. 여왕은 소녀의 피로 영생하는 괴물이었고 저는 저주로 인해 여왕을 죽일 수가 없었기에, 그 아이의 고통을 제가 대신 끊어주었습니다.”
사막여왕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다.
강력한 마력을 띠는 피를 가진 소녀를 납치해 피를 뽑아먹고 죽인다.
소노라 다음은 이자벨라, 그녀의 차례였다.
자신의 차례가 빨리 오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이자벨라는 소노라의 고통을 끊어냈다.
여태껏,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었던 진실.
아이작도 란돌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광산도시의 워프를 모두 고장내 그곳을 심연으로 가라앉혔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매몰되었습니다. 염치 없지만, 그래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어쩌라고요? 제가 우는 게 잘못입니까?”
세렝게티 역시 무덤덤하게 답했다.
“솔직히 허드슨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자유로움이 부러웠습니다. 끝나지 않는 수련의 도피처로 이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시작은 모두가 다르다고 믿습니다. 또한, 빌헬름님은 저를 가르친 스승님이자, 따라야할 대장이자, 본받아야할 아버지같은 분이지 허드슨에게서 느끼는 감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진실을 말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질문들에 마저 대답해도 마찬가지.
하지만, 동시에 셋은 생각했다.
이자벨라, 아이작, 세렝게티.
그들 모두가 확신하며 입을 열었다.
“······이 공간과 사람들은 모두 가짜군요.”
“생각해보니 성각자님이 이 따위 질문을 할 리가 없지. 왜 마음대로 질문을 던지는 거냐, 이 가짜놈들아.”
“이쯤하면 대답이 됐나, 멍청한 던전 자식!”
그 순간.
쩌적-
던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의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재현해낸 공간과 사람이었다.
기억을 토대로 만들었으니 그들이 가짜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들은 대답과 함께 확신하며 그곳을 가짜라고 규정지었다.
진실의 방.
질문에 진실을 답하는 방.
하지만 그건 진짜 시련이 아니었다.
세 개의 질문이 끝나기 전에, 그곳이 가짜라는 걸 세 명 전원이 알아차리는 게 바로 시련의 내용이었다.
‘어떻게······!’
인간은 한 번 의심을 갖으면 불신하게 되는 종족이다.
그들이 모두 연대하는 건 있을 수 없으며, 빈틈에 의해 분열되기 마련이었다.
단 한 번도 이 틀이 빗나간 적이 없건만.
‘뭐냐. 왜 다 확신하는 거지?’
의심을 해야 정상이다.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폭로당했으니!
비밀을 폭로하고, 그 폭로한 대상을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란돌프를 가리키게 되어있었다.
의심은 분노로, 분노는 파멸로 치닫는 완벽한 그림.
그 그림이 깨졌다.
한 순간에.
고작 첫 질문에서 들통났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저만한 믿음이라니. 신뢰라니.
대체 저들에게 무엇을 보여줬기에?
무엇을 보고 믿게 만들었기에 이토록 단단하게 확신한단 말인가!
아무리 전설적인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 속은 검은 법이었다.
고결한 인간?
없었다.
그렇게 믿는 자들만이 있을뿐.
그리고 그런 믿음은 손쉽게 깨지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확신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위대한 창조자의 쓰레기 같은 의지여.”
······ 확신 했었는데.
‘의지’는 당황한 눈초리로 자신의 눈앞에 선 종말을 바라봤다.
천상의 정령
‘마스터 플로어.’
내 예상대로였다.
시련을 멋대로 조정하고 시련에 도전 중인 나를 빼 올 장소는 이곳, 마스터 플로어뿐이었다.
던전의 주인이 위치하며 절대적인 권한을 발휘하는 곳 말이다.
시련이 깨어지자 자연스럽게 마스터 플로어가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의지’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넌······ 누구냐······? 너와 같은 ‘이레귤러’는 본 적이 없거늘······!
데미갓. 위대한 반신(半神)의 의지는 당황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의지의 모습은 검은색 그림자였다.
왕관을 쓰고, 둥그런 탁자에 앉아 던전을 관조하며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게임을 하듯.
하지만 자신의 패배가 다가오자 졸렬하기 그지없는 본성이 드러났다.
“말하지 않았느냐. 너의 종말이라고.”
내가 너의 종말이다.
이 긴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
이 말도 안 되는 던전은 사라지는 게 나았다.
특성 던전. 이름만 들어보면 가지고 있는 재능과 특성을 파티원과 대조하여 구색을 갖춘 뒤 공략해야 할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도전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도전했다.
하지만, 아니다.
데미갓 특성 던전은, ‘데미갓의 특성’을 알아야 깰 수 있는 던전이었다.
즉, 이놈.
의지의 특성, 이놈의 쓰레기 같은 성향을 파악한 뒤 모든 규칙을 깨야만 도달할 수 있다.
‘빌어먹을 말장난.’
빌어먹을 의지.
게다가 이곳은 시련의 장소가 아니다.
나를 억압하던 제한 역시 사라진 상태.
극 철검 두 자루를 꺼내 쥐었다.
그 순간.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당신과 ‘의지’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마침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주목하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나만이 아니라 ‘의지’에도 시선을 주고 있는 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깡! 까앙-!
빠르게 두 차례 검을 휘둘러 목을 쳐내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나갔다.
‘물리무효.’
물리 공격 자체가 아예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치직! 치지직!
동시에, 마치 고장 난 TV 화면처럼, ‘의지’의 전신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의지’가 말했다.
-그래, 네놈은 멸망이 보낸 하수인이렷다. 위대한 의지인 나를 말살하고자 보낸 ‘절대악’!
멸망과 함께 나를 절대악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이전과는 분명하게 상태가 다르다.
페이즈 2.
역시 이놈이 최종 던전 보스다.
-절대악이여, 마지막 게임을 해보자. 정당한 영광의 게임을!
······ 진짜 미친 건가?
정당한 영광이 어디에 있다고 두 단어를 언급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단어와 가장 멀어보이는 게 의지일텐데.
곧이어 놈이 쓴 왕관이 사라지며 원탁 옆으로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이작, 이자벨라, 세렝게티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의 파티원과 나의 파티원이 대결을 펼친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못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오직 너와 나!
노이즈가 잔뜩 낀 ‘의지’가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너와 너의 파티원 모두 서약하라! 그리하면 너희들은 완벽한 ‘일체’가 될 터인즉! 두렵고 무섭다면 도망쳐도 좋다, 절대악이여!
웃기는 놈이었다.
자신이 극도로 유리한 게임을 꺼내들었으면서 ‘정당’하다?
서약서를 보아하니 내가 파티원의 몸을 내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문제는 고통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고통이 심해지면 내 말을 거역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남의 몸을 움직이는 게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쉬울 리가 없었다.
“재밌군.”
그러나, 달리말하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게임’이었다.
게이머가 게임 속 아바타를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물론, 마우스와 키보드로 조작하는 감각과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이곳은 판게니아고 아이작과 이자벨라는 심지어 내가 키우던 캐릭터였다.
의지는 내가 ‘게이머’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조작이 얼마나 다를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더 세세한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서약 완료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어디 한 번 너의 발악을 보자꾸나, 절대악이여!
의지가 미치광이처럼 웃었다.
*
스윽.
왕관을 쓴 남자가,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그러자.
화르르륵!
어두운 공간에 촛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의 것을 포함한 100개의 촛불.
“그대들도 어지간히 궁금했나보군, 스러진 자들이여.”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는 촛불 위로 떠오른 다른 성좌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과거 나의 일부였던 것과 현재의 촉망받는 영웅이 대결한다. 누구에게 걸텐가?”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다른 성좌들의 선택을 부추겼다.
허나 쉽사리 선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웅을 다루고, 만들며, 따르게하는 그의 능력은 실로 경이로웠기에.
그리하여 ‘찬란한 영웅’이라 이름 붙여진 그를 어찌 넘어설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과거의 잔여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휘이이이이!
그때였다.
거대한 황금률의 파도가 물결치며 헤일처럼 사방에 들이닥쳤다. 이윽고 합쳐지며 황금새처럼 변한 황금률이 차분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본 찬란한 영웅의 성좌가 미소를 더욱 짙게했다.
“모험의 성좌. 그대는 여전히 고난과 역경을 좋아하는구나.”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자.
결코 포기하지 않기에 불굴의 모험자라고도 불리는 존재.
그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휘이이이이!
휘이이!
모험의 성좌를 시작으로 성좌들이 선택을 해나갔다.
선택의 결과를 본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흥미로운 결과에 턱을 쓸었다.
50대 49.
아무리 그의 옛 일부라고는 하나, 그럼에도 저 마지막 능력은 ‘진짜’다.
그것을 알면서도 반반의 결과가 나올 줄이야.
그가 보여준 신비의 기적 때문일까?
허나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럼 나 역시 걸겠다.”
찬란한 영웅의 성좌의 등 뒤로 황금률이 물결쳤다.
*
‘이런 느낌이군.’
시야가 허공에 뜬 채 관조자가 된 기분이다.
한 마디로 모니터로 캐릭터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감각에 셋을 움직여보았다.
“······!”
아이작, 이자벨라, 세렝게티.
그들은 멋대로 몸이 움직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내가 그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감각은 그대로지만 문제는 멀티플레이였다.
세 캐릭터를 동시에 움직여본 적은 없었으니.
“어디 마음껏 준비해보도록. 익숙해질 시간 정도는 주마.”
반대편에 있는 세 명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의지가 움직이는 복제품들.
능력치와 특성이 완벽하게 복제된 그들을 의지는 자유자재로 다루는 중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배려라는 듯 행동하는 게 역겹기까지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신감이 있다는 방증이겠지.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
몇 번 손을 털고, 다리를 움직여보다가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의지’가 비웃었다.
“벌써 준비가 끝났다? 오만한 녀석. 내가 기껏 자비를 베풀었거늘······.”
감히 정만한 자비를 베풀었음에도 저 오만한 녀석은 콧대를 치켜세운다.
의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비명을 내지르며 절망하거라.’
이 시련은 자신이 질 수가 없었으니까.
*
‘뭐지?’
의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련을 시작하고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렸건만.
그 생각처럼 처음에는 우세하게 시작했다.
상처를 낼 때마다 저들은 신음을 흘렸다.
실질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다보면 제어도 통하지 않기 마련.
제어가 되지 않으면 의식이 섞이며 자멸하게 된다.
그런데 처음 세 번의 공격을 제외하면 놈은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무언가를 관조하며 조종해본 경험이 있는 게다.
‘언데드를 다루면서 조작능력이 상승한 건가?’
그러고 보니 처음 시련에 들어왔을 때, 놈은 시체 까마귀가 되어 워 울프의 우두머리를 조종하지 않았나.
언데드를 다룰 줄 알면 비슷하게 조작하는 방식도 터득할 수 있기는 하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까앙-!
아이작이 검을 튕겨낸 즉시 몸을 숙이자 이자벨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질러온다. 그 뒤에선 세렝게티가 피할 공간 자체를 없애고 있었다.
완벽한 합동동작.
촤악!
결국 아이작의 복사본의 팔 하나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급히 남은 둘을 투입해 전열을 흐트려 살려냈지만 의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뭐지?’
관조하며 움직이면 부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저건 그 이상이다.
‘한계 너머를 뽑아내고 있다.’
능력치와 육체의 특성을 한계까지 끌어내고, 그 이상으로 발현시킨다.
자신의 능력과도 같다.
의지 자신도 다른 이의 몸을 다루며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놈은 셋을 동시에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애당초에.
‘수천, 수만번 이상 해온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놈은 그걸 억겁의 시간 동안 반복이라도 한 듯이 해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데드를 다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게다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부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완벽하게 일체화하고 있다고?’
이 단기간에 그게 가능하다니, 말이 안 된다.
분명히 놈은 초보였다.
다른 사람의 몸을 관조하며 움직이는 일 자체가 처음인 것처럼 보였다.
하물며 세 명을 동시에 다루는 일?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