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그 순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뭐지?
‘꿈이라도 꾼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툭.
툭.
툭.
툭. 툭. 툭. 투투투툭.
어지럽다. 토할 것 같다. 쉴 새 없이 배경이 바뀌며 위치 또한 바뀌어간다. 정신없이 하늘과 땅을 반복하더니 거리가 점차 좁혀져갔다.
어느덧 학살은 마차 밖에 있었다.
저 멀리, 자신이 숨어있던 위치에서 나타난 갑주를 입은 자와 계속 위치가 뒤바뀌며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척까지 도달했을 때.
“우웨에에에엑-!”
속이 미친 듯이 뒤틀리며 토를 게워냈다.
그게 끝이었다.
학살은 방금 게워낸 뜨끈한 토 위로 털썩 몸을 눕혔다.
세상이 돈다. 저항할 수조차 없다.
“풉!”
그게 학살이 살아있을 때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
《카오 상태의 학살자를 처단했습니다.》
《명예가 30 상승합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49h)’을 획득했습니다.》
‘플레이어였나?’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턱을 쓸었다.
PK를 일삼아 카오 상태가 된 학살자.
황금률의 조각을 49시간이나 준 걸 보면, 상대는 플레이어가 확실했다.
누군가가 10레벨의 암살자를 내 동선에 위치시켜놓은 걸까?
아니면 우연히?
‘학살.’
명예의 전당을 뒤져보다가 학살의 이름이 사라진 걸 확인했다.
상단에 위치해있던 자들 중 지금 사라진 건 학살이 유일하다.
‘그 정신나간 놈이 나를 노리려다가 세렝게티에게 죽었군.’
학살은 저레벨 구간 PK범으로 유명했다.
일명 ‘초보자 학살자’가 학살이다.
플레이어가 된 나를 빠르게 죽이려고 했던 모양인데, 상대가 안 좋았다.
세렝게티는 1성의 초월자였다.
그것도 말이 1성이지, 2성의 초월자들과도 충분히 맞붙을 수 있는 괴물이 세렝게티다.
그러니까 최측근으로 두었던 것이고.
‘학살이 있다면 다른 세력은 없다는 뜻이다.’
놀랍진 않다.
이쯤해서 누군가가 나를 노려올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으니.
학살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면, 도리어 다행이다.
다른 플레이어 세력은 이곳에 없다는 뜻이니까.
“몸 풀기도 안 되는군요.”
산책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말하는 세렝게티.
10레벨이면 엄청난 강자이지만, 그럼에도 진짜 초월자와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확실히 상태는 좋아보이는구나.”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빠르게 끝내버리겠습니다.”
퉁퉁!
갑옷을 치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저 자신감이 비명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숲을 지나, 한참을 달리자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용의 둥지······?”
세렝게티가 동굴을 보곤 경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만한 크기의 동굴은 흔치 않다.
있다면, 대부분 용이 터를 잡은 둥지다.
“죽은 고룡의 둥지다.”
이름 모를 죽은 고룡의 둥지.
이곳이 바로 데미갓 던전으로 향하는 장소였다.
마차에서 내려 동굴의 입구에 다가가자.
지이이잉!
입구가 일렁거렸다.
자격이 없는 자는 들어올 수 없도록 해놓은 고룡의 결계.
《결계가 자격을 확인했습니다.》
《입장 인원 4명.》
《데미갓의 의지에 따라 모든 입장자는 아래의 제한을 받습니다.》
《1. 모든 능력치 고정(20)》
《2. 스킬 사용 불가》
《3. 입장 전 소지한 도구 사용 불가》
《4. 입장 전 소지한 장비 사용 불가》
특성 던전.
이곳은 오직 지닌 재능과 특성으로만 싸워야 하는 던전이었다.
별을 먹고 초월하여 얻은 권능을 제외한 모든 게 사용 불가가 되는 곳!
강자와 약자가 동일 선상에 서게 되기에, 배신과 모략이 판을 칠 수밖에 없는 장소다. 하물며 던전의 특성상 배신을 부추기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장비를 비롯한 도구는 모두 던전 안에 있는 거로만 사용할 수 있고, 거기에도 ‘사용조건’이 붙어있는 등 여간 까다로운 탓이었다.
《‘메인 퀘스트 6 : 파티 던전 클리어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퀘스트는 첫 ‘파티 던전’을 클리어한 순간 종료됩니다.》
《보상 : 클리어한 파티 던전에 따라 차등 지급.》
메인 퀘스트 6이 시작되었다는 알림.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을 완전하게 정복하여 기록을 세우는 게 내 목표였으니.
그때였다.
《‘데미갓’의 위압에 ‘영원군주의 심장’이 저항합니다.》
《‘영원군주의 심장’이 ‘데미갓’의 조건 중 하나를 삭제합니다.》
《‘3. 입장 전 소지한 도구 사용 불가’ 조건이 삭제되었습니다.》
철혈군주의 심장에서 진화하여 영원군주의 심장이 된 히든 특성.
그 효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비스트 로드
‘조건 삭제라.’
철혈군주의 심장은 감정을 흐트러짐을 잡아주고, 정신계열 스킬이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특성이었다.
백왕 앞에서조차 의연하게 만들어준 엄청난 히든 특성임에는 분명하지만, 스스로 이점을 보는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영원군주로 진화한 후 데미갓의 위압을 버텨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조건까지 삭제해버린 것이다.
조건 삭제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말 그대로 ‘특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행위였다.
데미갓이 내세운 절대적인 네 가지 명제.
그중 하나, 도구 사용 불가의 명제를 깨버렸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건 던전’이나 ‘탑’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리라.
‘······ 엄청나군.’
영원군주의 심장이 가지는 이점들을 떠올리자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모두를 0에서 시작하게 만드는 조건들.
이걸 0을 1로 만들어줬다.
같이 운동장 한 바퀴를 달리는 달리기 시합을 할 때, 단순히 한 발자국 앞에 선 정도가 아니라 반 바퀴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입장하기 전에 더 준비해갈 수도 있을 터.’
아직 입장 전이다.
도구 사용이 가능해졌다면 미리 준비하고 입장하면 그만이었다.
《데미갓의 의지가 파티를 강제로 전송시킵니다.》
더 이상의 꼼수는 안 된다는 건가?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했다.
*
“흐음······.”
그라시아와의 인터뷰 이후, 김하나는 본격적으로 전세계의 ‘디맨션 워리어’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강림’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김원?”
CK방송국 워리어 전담 기자실.
김하나는 수첩을 손에 쥔 채 고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서정아가 묻자, 김하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통 모르겠어요.”
“우리 기자부 베스트 커리어 김원이 모르는 것도 있어?”
“김원 아니고 김하나라고······ 하아, 됐어요.”
김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서정아뿐만이 아니라 CK방송국 기자들 모두가 김하나를 김원이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그라시아의 인터뷰가 결정적이었다.
“왜 그러는데?”
“미묘하게 달라서요.”
“뭐가 달라?”
“디맨션 워리어들이 하는 얘기요.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내가 취재할 땐 다 똑같은 말만 하던데?”
서정아의 말마따나 취재는 모두 대동소이했다.
워리어들은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했으니.
예컨대 그들은 타차원에서 지구를 지키고자 차원을 넘어온 위대한 전사들이며, 지구인의 몸을 빌려 타차원의 ‘강림체’로 강림을 하는 것이라던가.
허나 김하나는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촉’을 느꼈다.
“그 사람들, 정말 영웅일까요?”
“타차원의 8영웅이니 하는 그거? 조금 웃기긴 해도, 다른 워리어들이 받들어 모시는 거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영웅을 보통 무서워하나요?”
“무서워한다니?”
영웅이란 무엇인가.
여러 종류의 영웅이 있지만, 워리어들이 이야기하는 영웅은 그야말로 ‘영웅’의 표본이었다.
세상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영웅의 스토리였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영웅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서정아는 다른 워리어들이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김하나를 제외한 모든 기자가 똑같을 것이다.
‘오랜 시간 겪어와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두렵고, 껄끄러워하는 기색.’
괴물보다도 영웅을 두려워한다.
그 반대여야 정상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의심은, 오늘 더 증폭됐다.
수첩을 조심스럽게 열자 가운데에 끼어있는 노란 메모장 한 장.
-자신을 영웅이라 부르는 자들을 믿지 마라.
-디맨션 워리어는 없다. 중독자만 있을 뿐.
메모장에 쓰인 건 단 세 문장에 불과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수첩을 정확히 특정하여 넣고 갔다.
워리어 전담 기자실은 보안이 철저하다.
CCTV를 돌려봐도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내부의 누군가가 굳이 이런 장난을 칠 리는 없으니.
심지어.
“이거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여요?”
“뭐야, 웬 지렁이 낙서야?‘
메모지에 적혀있는 글이 다른 사람에겐 낙서로 보인다.
오직 자신에게만 글자로 보였다.
이런 게 가능한 자는 디맨션 워리어뿐이다.
‘자신을 영웅이라 부르는 자들은 8영웅 밖에 없어.’
그라시아와 마스터를 비롯한 여덟 명.
정확히는 일곱이다. 한 명인 빌헬름은 그들도 찾고 있다고 했으니까.
어쨌든, 그 일곱을 믿지 말라는 내용.
‘디맨션 워리어는 없다. 뭐가 없다는 거지? 그 자체가 거짓이라는 걸까? 중독자는 또 뭐고?’
중독자의 종류가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약물 중독자?
도박 중독자?
알콜? 게임?
일이나 운동 중독자 같은 건 아닐 텐데.
-‘히드라곤’의 주인과는 무슨 사이입니까?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라시아가 인터뷰 도중 뜬금없이 물어온 말.
히드라곤이라 불리는 거구의 괴물을 다루는 남자에 대해 그는 말했다.
처음 자이언트 맨티스에게서 자신을 지켜준 남자.
그는 이후 청담의 스테이크 하우스에서도 마찬가지로 김하나를 구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순간 느껴지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김하나는 그라시아의 물음을 즉시 부정했다.
‘박현명······ 씨와 관계가 있는 걸까?’
그 사람이 히드라곤의 주인인 ‘워리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고개를 저었다.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이 희박한 가능성이 사실이라면?
알려줘야 할까?
왠지 모를 섬뜩함. 그라시아가 그를 찾고 있는 게 단순한 선의는 아닌 것 같았다.
하물며 일전 그라시아는 은평구에 나타났다.
하늘을 가득 채운 빛의 기둥을 세워서 한창 난리가 났고, 그 범인이 그라시아라는 걸 김하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은평구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 빛의 기둥을 직접 두 눈으로 봤다.
‘왜 그라시아는 은평구에 갔을까?’
은평구.
자신이 사는 곳이란 사실 외에도, 처음 박현명을 만난 곳 역시 은평구다.
자이언트 맨티스를 처단한 히드라곤의 주인인 워리어도 그곳에 나타났다.
당연히 그라시아가 은평구를 찾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의도가 궁금했다.
‘은평구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했던 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라시아에게서 느꼈던 그 섬뜩함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
던전으로 워프되자 약간의 현기증이 났다.
모든 능력치가 20으로 고정되고, 입고왔던 장비들은 깔끔하게 증발해 있었다.
데미갓의 배려로 티와 바지, 속옷은 입혀줘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으음.”
세렝게티, 아이작, 이자벨라 모두 현기증을 느끼고 살짝 휘청거렸다.
갑자기 능력치가 낮아졌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세렝게티였다.
그녀가 전방을 살피며 말했다.
“무기와 방어구가 있군요.”
말마따나 눈앞에 장비들이 늘어서있었다.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사용할 장비를 고르라는 뜻이다.
허나, 푯말로 조건을 새겨놓았다.
《하나씩만 고르시오.》
《두 개 이상을 고를 때마다 다른 파티원들의 무작위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바로 하나씩만 고르라는 것.
세렝게티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파티원들의 능력치가 하락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고른 사람을 제외한 다른 셋의 능력치가 하락한다는 뜻이다.”
“데미갓이라는 녀석이 굉장히 사악하군요.”
그 의도를 깨달은 세렝게티의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이건 맛보기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의미였다.
“하나씩만 고르라면 우선 무기부터 골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각자 무기를 챙겨서 싸우자.
공격 일변도의 파티 조합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기는 하나면 된다.”
“하나요?”
“나머지는 방패, 갑옷, 투구로 하지.”
내 말을 듣고 세렝게티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