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56화 (56/317)

“8영웅 막심 말이다. 아······ 넌 계속 잠들어있었으니 모를만도 하구나.”

그러다가 세렝게티가 계속 잠들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말을 바꾸었다.

세렝게티는 마계의 대원정 이후 계속 잠들어있었다.

잠깐 깬 적이 있으나 그때도 이런 제반상황은 전혀 알지 못했다.

무언가 싸한 느낌에 그녀가 물었다.

“설마 그 영웅이라는 게 대원정이 끝나고 생긴 말입니까?”

“그렇다.”

“유일 영웅 빌헬름이 아니라, 영웅이 여덟 명이나 있다고요?”

“······ 8영웅 중 한 명이 기사왕 빌헬름이다. 막심을 포함해서.”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막심은 대원정 직후 도망쳤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자기를 따르던 용병단원들도 모조리 버린 쓰레기입니다.”

“······ 잠깐. 그게 사실이냐?”

와이저 후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8영웅 막심이 사실은 도망자라니.

얼추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도 같지만 그게 진짜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렝게티는 자신의 딸이다.

세렝게티가 거짓을 혐오하는 것을 후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일 터다.

세렝게티가 슬쩍 흘겨보곤, 계속해서 말했다.

“마계의 끝에서 마왕까지 닿은 건 빌헬름님 뿐입니다. 그러나 막심은 마계의 입구에 도달하자마자 도망친 비겁한 도망자입니다.”

“다른 8영웅들도?”

“······ 대체 그게 누구입니까? 영웅이 8명이라니.”

와이저 후작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남은 영웅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호명이 끝난 순간 세렝게티의 전신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명예를 모르는 후안무치한 놈들······! 그중 두 명은 아예 대원정에 발도 들이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감히 어떻게?”

“누가 참여하지 않았느냐?”

“그라시아, 그리고 마스터. 그 둘은 아예 참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머지 이름들도 모두 영웅과는 거리가 먼 자들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건······ 엄청나게 큰일이로구나.”

와이저 후작도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막심을 비롯한 8영웅 중 빌헬름을 제외한 전부가 가짜다.

가짜인데, 진짜처럼 행동하고 있다.

대륙 전체가 그들을 진짜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거짓임을 밝힐 자들은 모두 죽었다.

유일한 한 명.

세렝게티를 제외하곤.

“바로잡아야 합니다.”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거다.”

“······ 후계자님.”

“그리고 너는 아직 완전히 저주에서 풀려난 게 아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억울하지 않냐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으냐?”

“······ 아.”

그제야 세렝게티는 심호흡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작게 웃어버렸다.

“······ 정말로 멍청한 놈들이군요.”

멍청했으니까.

적으로 절대로 돌리면 안 될 사람을, 적으로 돌려버렸으니까.

세렝게티는 빌헬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빌헬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손에 넣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길을 막는 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없애버리는 사람이었다.

가장 무섭고, 가장 강하며, 적이 된 자에겐 한 치의 자비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일어나봐라. 허드슨이 네 몸을 치료했다.”

“그게 무슨······.”

세렝게티가 손을 뻗어 급히 이불 안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신의 멀쩡한 두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 대체 어떻게?”

“최상급 엘릭서로 허드슨이 너를 치료했다.”

엘릭서를 건넨 건 나지만, 치료한 건 허드슨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허드슨이 감동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얼굴 뚫어지겠군.

“허드슨. 네가 나를 위해서···?”

“엘릭서는 후계자님이 구해주신 거야. 나는 한방울씩 뿌린 것 외엔 한 게 없어.”

“아무리 그래도 잠도 거의 못잤을 텐데······.”

“너를 위해서 한 일이야. 네가 괜찮으면 죽어도 상관없어, 난.”

“아아, 허드슨!”

“세렝게티!”

둘이 있는 힘껏 껴안았다.

······ 그 둘의 모습을, 여전히 와이저 후작은 혼란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감동스러운 재회의 현장인 건 알겠다만, 세렝게티. 네가 나를 위해 해줘야할 일이 있다.”

툭!

그 순간, 세렝게티의 몸이 직선으로 펴졌다.

기사 시절일 때와 마찬가지로 각이 잡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렝게티가 오른 손을 들어 주먹을 쥔 채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해내겠습니다.”

“내 다음 시련을 위해 네가 필요하다.”

메인 퀘스트 6.

그것의 독주를 위해서 세렝게티가 필요하다.

그녀의 능력.

‘별’로 얻은 초월적인 권능이.

세렝게티의 눈에 빛이 서렸다.

“제가 필요하십니까?”

“······ 그래.”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우선 그렇게만 알고 있도록. 일정은 후에 알려주마.”

체력과 의욕이 이 정도로 넘쳐나는 걸 보면 회복은 완전하게 된 것 같다.

게다가 지금은 감동스러운 재회의 시간이다.

그것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세렝게티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시간 끌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놈들을 박살내는 일이라면 제가 선두로 앞장서겠습니다. 그 가소롭지도 않은 배신자와 머저리들의 목을 베어내고 놈들의 머리를 심연 속으로 던져넣어 영원토록 저주받게 해야합니다. 실추된 명예를 바로 세우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 알게해야할 것인즉, 거짓을 일삼으며 입만 산 놈들을 처형하는데 1초라도 주저할 필요는-.”

모든 준비는 끝났다

생각났다.

세렝게티에게 말을 걸 때마다, 온종일 엔터만 치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혼자서 차지하는 대화 스크립트 양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대화 내용 중에 숨겨진 퀘스트에 대한 힌트 같은 게 있을 줄 알고 유심히 봤지만, 개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빌헬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 PTSD오는군.’

별에 의해 떠오른 기억.

세렝게티는 흥분하면 말이 많아진다.

어릴 적부터 무언 수행을 하며 검만 휘두를 여파인지.

한 번 입이 터지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교정된 게 이 정도.

“이게······ 으음.”

와이저 후작은 나와 세렝게티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세렝게티가 이토록 수다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그런 그녀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초면이라 보기엔 거리가 있었다.

의심을 사지 않고자 나는 최대한 여유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사왕의 수기에 적혀있더군. 적절하게 말을 안 끊으면 한 시간도 거뜬하게 이야기한다고.”

“······ 제 딸이 말입니까?”

“혹시 어릴 때 무언 수행을 시켰나?”

묵언 수행이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수행을 일컫지만, 무언 수행은 말 그대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수행이었다.

와이저 후작이 착잡한 눈빛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모두 제 탓입니다.”

“아무한테나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니, 개의치 말라.”

수다쟁이가 된 걸 무슨 병처럼 여기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기사집안의 딸이 말이 많다는 건 여러모로 치명적인 약점이긴 하였다.

물론 세렝게티가 말이 많아지는 대상은 이 세상에서 둘뿐이었다.

한 명은 허드슨.

나머지 한 명은 빌헬름.

그래서일까.

허드슨이 묘한 눈치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자신 외의 사람에게 세렝게티가 보일 줄은 몰랐다는 듯.

“············ 크흠.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세렝게티가 실수를 깨닫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내 시련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배신자를 처단하는데 너의 검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곡해한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당장은 그보다 메인 퀘스트 6이 중요했다.

어차피 나를 제외한 8영웅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래성 위의 도미노일 뿐이었으니까.

‘놈들은 모든 플레이어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고 과신하고 있다.’

작금의 행태를 보면 확실하다.

현실에서 중언부언하며 변명해대는 모습을 보니 이제 곧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둔하고 있는, 내가 네임드 NPC라고 생각했던 자들.

그들이 진정으로 플레이어라면, 8영웅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자는 많다.

겉으로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아 뒤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

‘임계점을 넘기면 그들도 행동하겠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8영웅과 대립하리라.

머지않아, 지구는 혼란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디맨션 워리어’가 사실은 ‘게임 폐인’일 뿐이라는 사실조차 밝혀질지도 모른다.

워리어의 위상과 명성에 금이 가면 과연 세계인들이 그들을 온전히 믿고 따를까?

한 번 싹튼 의심은 계속해서 커져가는 법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들을 무너트릴 방법은 많다.

무엇이 가장 효율적이느냐의 문제일뿐.

“서로 대화 나누도록.”

나 역시 쓸데없는 의심이 싹트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때마침, 가야할 곳도 있었고.

*

밖으로 나가자 아이작이 살짝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군.”

“실은······ 불안해서 말입니다.”

“누군가가 너를 추격해올까봐 말이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랜시간 크람델에 박혀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척을 진 누군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걱정마라. 한동안은 아무도 너를 신경 안 쓸 테니.”

신경을 쓸 수가 없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막심과 사이엔 공작의 이야기로 대륙이 떠들썩할 테니까.

그 외에도, 아이작이 주로 척을 진 건 네임드 NPC들이다.

즉,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8영웅과 관계되어 있고, 8영웅은 지구의 일로 눈코땔 새 없이 바쁘다.

여기에 막심의 문제까지 겹쳤으니 사실상 아이작을 신경쓸 자는 없었다.

“약속을 지키면, 나 또한 약속을 지킬 거다.”

1년간 봉사하면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을 구해주겠다는 말.

그리하여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겠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 믿겠습니다.”

아이작은 심호흡을 했다.

성각자. 오주력. 기사왕의 후계자.

몇 가지 얼굴을 지녔는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였다.

‘그의 말에는 위엄이 있다.’

이상하게 믿음이 간다.

한동안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방금 그 말에 왜인지 안심이 되는 게다.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 또한 이상하게 신뢰가 됐다.

왜일까?

여러 얼굴로 주변을 속이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위엄이 있다. 그의 말과 그의 존재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그에게 진심이었다. 아이작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신비한 인상과 믿음을 주는 사람은 처음보았다.

심지어 아이작은 8영웅이라 불리는 자들도 만나보았으나.

‘그들보단 차라리-.’

이 남자가 더 영웅 같지 않은가.

그의 행적과 행보를 보면, 영웅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크람델에서도 마계의 수문장 아흐람을 봉인하고, 기사의 정원에선 도시민들을 괴롭히는 8영웅 막심을 처단했다.

그 과정이 비록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완벽한 이이제이였다.

설마 막심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사이엔 공작을 죽이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걸 보면 영웅은 아닐진대.

‘과정을 빼고 결과만 보면 영웅이 맞다.’

대체 뭐하는 자일까.

알면 알수록, 까면 깔수록 양파 같다.

그때였다.

“다만, 악업 수치가 조금 걱정이군.”

“제 악업 수치 말입니까?”

“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크람델이라면 상관없지만, 인간의 도시에선, 특히 사제들은 바로 아이작의 악업 수치를 알아볼 것이다.

아이작의 악업 수치는 어지간한 ‘대악당’ 뺨을 쳤다.

몇 개의 도시를 주름잡는 거대 악당 조직의 간부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평범한 도시민들에게도 ‘위압감’을 줄 수 있다.

앞으로 함께 다니려면 여러모로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마침 잘됐군. 없애러 가지.”

“······ 예?”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아이작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없앤다는 게 악업 수치는 아니겠지?

“따라와라.”

*

아이작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앤드류 사제를 쳐다봤다.

앤드류 사제 역시, 믿기지 않는 얼굴을 짓고 있었다.

“며, 면죄부가······.”

분명히, 앤드류 사제는 면죄부 3장을 전부 사용했다.

세 장 모두 한 사람에게 건넸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4번 째 면죄부가 나타났다.

앤드류의 손을 성배로 씻어내자, 앤드류 사제는 그 즉시 자신이 ‘면죄부’를 한 장 더 발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눈앞의 남자에게만.

‘플래티넘 박스를 왜 사제만 열 수 있나 했더니.’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흐람을 봉인하고 얻은 플래티넘 박스.

하지만 그 플래티넘 박스는 오직 ‘찬양의 기도문’을 외울 수 있는 고위급 사제만 열 수 있도록 제한이 걸려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면죄부가 복사가 될 줄이야.’

마지막 세 번 째 면죄부를 거리낌없이 사용한 이유였다.

앤드류 사제가 여전히 불신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면죄부의 특권을 한 번 더 발동할 수 있게 되긴 했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너의 죄를 사한다, 아이작.”

“자, 잠깐. 그걸 그렇게 함부로 사용하시면······!!”

화아악!

아이작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면죄부를 사용하자, 환한 빛과 함께 악업 수치가 깨끗이 씻겨져 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