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순간 황금률을 비롯해 착용하고 있던 장비도 모두 날아가고 몸만 남은 막심.
이놈을 어디에다가 써야 할까?
레이드 보스몬스터 취급은 받아서 다행이지만, 막심은 능력치만 높지 고기 방패와 다를 게 없었다.
그 활용에 대해 고민하며 턱을 쓸고 있을 때.
《‘히든 특성 퀘스트 : 철혈군주’를 완료했습니다.》
《‘영원의 란돌프’에 의해 히든 특성 ‘철혈군주의 심장’이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진화합니다.》
······ 히든 특성 철혈군주의 심장.
그게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진화했다는 말.
그 진화로 인한 변화를 확인한 순간,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
사이엔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막심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지?’
진즉에 돌아왔어야할 막심에게서 소식이 없다.
와이저 후작에게서 세렝게티를 데려오는 아주 쉬운 임무였거늘.
또 여자랑 놀아나느라 시간을 버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세렝게티에게 푹 빠져서 딴 길로 샌 건가?
“막심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오오! 그래, 빨리 들라 해라!”
문앞에 선 기사들이 말하자 사이엔 공작이 기꺼워하며 소리쳤다.
곧이어 막심이 그의 처소로 들어왔다.
“막심! 내 훌륭한 후계자여. 마침 잘 왔다. 헌데, 세렝게티는 어디 갔느냐?”
문제는 막심이 빈손으로 돌아왔는 점이다.
“그가, 이걸,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 그가 누구냐?”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막심의 말투가 이상하다. 어딜 다친 건지.
하지만 사이엔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막심이 이상한 게 하루 이틀이던가.
막심은 자신의 후계자였고, 8영웅 중 한 명이었으며, 믿음직한 충신이었다.
녀석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을까.
이어 막심이 사이엔 공작에게 다가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검.
그것을 본 사이엔 공작이 두 눈을 크게 떴고.
푸욱-!
그 순간, 단검이 사이엔 공작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다.
“컥! 네가 어떻게 나한테······!”
사이엔 공작의 신음을 흘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막심을 쳐다보면서.
“무슨 일이십니까!”
“마, 막심! 이 자식이!”
사이엔 공작의 신음을 듣고 문 앞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부리나케 들어왔다.
곧이어 기사들은 막심의 목을 베어냈으나, 사이엔 공작의 죽음까지 막지는 못했다.
······여덟 영웅 중 일인이자 사이엔 공작의 공식 후계자였던 막심.
그가 사이엔 공작을 암살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대륙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부활의 세렝게티
장내에 흐르는 먹먹한 적막.
원탁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있는 6명의 사람들은 서로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은 판게니아의 유적도시 룬델라.
이곳에서 벌어지는 ‘원탁회의’는 오로지 8영웅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모여있는 5명은 모두 ‘8영웅’이라 일컬어지는 불세출의 기재들이었다.
『전신(戰神) 마스터.』
『뇌제(雷帝) 다크스타.』
『구미호 흑요.』
『시체여왕 반희.』
『루시퍼.』
“······ 그라시아는, 이번에도 불참인가?”
한참의 시간이 지나,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검성 그라시아. 녀석이 이번 ‘원탁회의’마저 불참했기 때문이다.
막심과 빌헬름은 죽었으니 그라시아를 제외한 전원이 모인 셈이었다.
“또 혼자 고고한 학처럼 굴고 싶은 거겠지.”
검은색의 띠를 눈에 두른 남자, 다크스타가 이죽거렸다.
그라시아가 원탁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건 한, 두 번이 아니다.
거의 매번 불참하고 있으며 오로지 혼자서 행동하는 게 그라시아였다.
고고한 학이라고 포장했으나, 놈이 누구를 모델 삼아 흉내내는 것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기사왕 빌헬름.’
솔로 플레이의 정점에 있었던 빌헬름.
판게니아에서 전설과 신화로 얼룩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중이다.
현실에서조차도.
“그 소문, 사실이야? 막심이 사이엔 공작을 죽였다는 게?”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대며 흑요가 물었다.
공식 후계자였던 막심이 사이엔 공작을 죽인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이다.”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직접 확인해본 결과 소문만이 아닌 진실이었다.
막심은 사이엔 공작을 습격했고, 죽였다.
그로 인해 발란 왕국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특히 ‘8영웅’이 얽힌 사안이기에 발란 왕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지구의 일도 큰일인데 판게니아까지 문제로군. 마스터, 모든 게 네가 만든 ‘판’ 위에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던가?”
검은 장발의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거구의 남자가 작게 비웃었다.
루시퍼. 그는 마스터를 향해 대놓고 이빨을 보였다.
그러자 마스터의 이맛살이 작게 구겨졌다.
말마따나 지구와 판게니아의 모든 것은 잘 짜인 ‘판’의 위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빌헬름이 사망한 직후부터.
‘지구의 일은 어떻게든 무마했다만······.’
첫 번째 차원 균열.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은 육안으로 하늘 위에 뜬 타차원, 판게니아를 확인했다.
이후 게이트가 열리며 괴물이 쳐들어올 일만 남았는데 갑자기 ‘차원 균열의 왕’이 죽으며 퀘스트가 클리어된 것이다.
그리고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한 건 다름 아닌 란돌프였다.
팬텀이라고 확신하는 자.
그것도 놈이 ‘혼자서’ 깼다. 차원 균열을 넘어오기도 전에.
이로 인해 지구인들은 의심하고 있었다.
예언이, 타차원의 전사들의 경고가 틀린 건 아닌지.
-침략의 전조다. 우리의 전력을 확인한 괴물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다.
-타차원의 침략은 기정사실이다.
-괴물들이 타차원을 넘어 지구로 향하기 전에 전사들이 놈들을 어느 정도 막았기 때문이다.
전사들이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모두가 타차원이라 일컫는 ‘판게니아 대륙’을 눈으로 확인했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더불어 플레이어들 역시 이곳에 모인 영웅들이 철저하게 컨트롤하고 있으니 말이 새어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플레이어를 제외하면 ‘란돌프’가 차원 균열의 왕을 죽인 것을 알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
그러니, 플레이어들끼리만 입을 맞추면 된다.
다만······ 문제는 판게니아였다.
마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이 역시 문제없다. 놈을 ‘죄인’이라고 발표하지.”
죄인.
사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애쓰는 빙의자.
이곳에 모인 모두가 빙의자이고 사신들의 표현에 따르면 ‘죄인’이지만, 8영웅이 죄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애당초 ‘죄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게니아의 인간 대부분은 모르고 있었다.
하여 막심을 죄인이라고 발표하려거든 그 죄인이 무엇인지, 사신과 빙의자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야만 한다.
그러자 다크스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건 너무 위험한 도박 아닌가?”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 차라리 우리가 선수 치는 게 나아. 우리 중에 ‘사신’이 붙은 자는 없지 않나?”
“그건 모르지. 극구 숨기고 있을 테니.”
사신에게 노려지고 있다면 플레이어는 그 사실을 극구로 숨긴다.
8영웅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누군가도 사신에게 노려지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사신의 끈질김 때문이다.
사신에게 노려진 자는 언젠가 반드시 사신에게 죽는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으면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플레이어’라면, 누군가를 사신이 죽이러 왔을 때 사신들이 알아차릴 수도 있는 거니까.
그들로서도 사신에 대해선 모든 게 미지였으니 조심할 수밖에.
마스터가 스산하게 입을 열었다.
“사신을 다루는 게 정말 제국의 황족인지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될 거다.”
하지만 유일하게 의심 가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이었다.
제국은 플레이어가 유일하게 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그곳의 황족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아예 없다.
심지어 대원정 때조차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도 전혀 나서지도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며, 제국과 연관되었던 모든 플레이어는 살해당했다.
그러니 사신교와 사신을 다루는 게 제국의 황족들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당연한 이치.
‘막심의 죽음을 역으로 이용한다.’
사신과 빙의자에 대해 자신들이 먼저 밝힘으로써 제국을 표면 위로 띄울 수도 있을 터.
대륙을 혼란해지며 8영웅에 대한 의심 역시 순식간에 지워질 것이다.
이곳을 선동하는 건, 지구보다도 쉬우니까.
“팬텀에 대한 억제도 될 거다. 우리가 직접 ‘죄인’에 대한 정보를 받으면 판게니아 전역에서 제보가 쏟아질 테니.”
“휘유······!”
다크스타가 손뼉을 쳤다.
마스터가 그린 그림.
그는 아예 사신교의 일을 자신들이 대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베일에 싸인 사신교는 발만 동동 구르거나 직접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
또한 죄인에 대해 먼저 밝혀 대륙 전역에서 제보를 받으면, 팬텀에 대한 꼬리가 마침내 밟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미친 듯이 나대는 놈의 행동이 어느 정도 억제될 것이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로군.”
“······ 확실히.”
모두가 짧게 감탄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팬텀이 던진 강속구를 쳐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스터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비록 놈이 한 번은 우리를 방해했으나, 두 번은 없다.”
팬텀, 란돌프가 원탁회의에서 공적으로 지명된 순간이었다.
*
8영웅은 이미, 명예가 없다.
설령 그곳에 빌헬름의 이름이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명예가 없는 주제에 있는 척을 하니, 시궁창에 박아버리는 게 낫겠다.
《‘면죄부’를 사용했습니다.》
《악업 수치가 정화됩니다.》
막심을 깔끔하게 재활용한 이후 나는 면죄부를 사용해 모든 악업을 씻어냈다.
그리곤 기사의 정원으로 돌아와 세렝게티에게 축복을 부여했다.
“깨, 깨어나겠습니까?”
허드슨이 침을 꿀꺽 삼키며 걱정되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 곳곳에 든 멍.
막심이 이곳 영지에 온 이후 허드슨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세렝게티를 지키고 회복시키고자.
그런 그의 노력이 결심을 맺어, 세렝게티는 잃어버린 하반신을 완전히 재생시킨 상태였다.
남은 건 축복으로 말미암아 세렝게티가 깨어나는 일뿐.
솔직히 나도 확신은 못한다.
크람델에 다녀오며 성력은 많이 올랐지만 마왕의 저주가 괜히 마왕의 저주이겠나.
게다가 마계의 절반을 재물로 바쳐서 사용한 저주다.
《‘별의 축복’을 부여합니다.》
《모든 성력을 소모합니다.》
《마왕의 저주를 풀기엔 성력이 부족합니다.》
《‘한계저주’가 일시(56시간)해제되었습니다.》
역시나, 완전한 저주의 해독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확실히 일시해제의 시간이 늘어났다.
성력이 100을 넘어가면 완전한 해제도 가능하지 않을까?
“으음.”
“아······!”
세렝게티가 다시 눈을 떴다.
그것을 본 허드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와이저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그녀를 지키려고 무던 애를 썼다.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세렝게티와 이곳 영지 모두가 사라졌을 것이다.
눈을 뜬 세렝게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드슨, 그리고······ 영주님.”
이번이 두 번째.
그녀의 부름에 와이저 후작이 말했다.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 예?”
“힘들면, 부르던 대로 해도 좋다.”
와이저 후작은 도시의 영주다.
귀족이기에 권위롭고, 딸을 키우는데 있어서도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어릴 때부터 세렝게티를 오로지 기사로 키우는 데에만 전념했기에, 자신을 두둔할 때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세렝게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와이저 후작이 그런 말을 해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평생을 검만 보고 수련하며 부녀의 정 따위는 단 한 톨도 없었거늘.
“············ 아버지.”
“···딸아. 몸은 좀 괜찮느냐?”
“아······.”
딸이라니.
그런 단어로 자신을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세렝게티는 살짝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아직··· 저는 악몽 속에 있는 겁니까?”
마왕의 저주는 끊임없이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그녀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이 역시 현실이 아니라 아직도 악몽의 와중이라면, 어떤 식으로 저주가 작용해올지 걱정부터 되는 것이다.
“현실이다.”
“빌······ 아니, 후계자님.”
나를 본 세렝게티는 급히 말을 바꿨다.
그녀는 내가 빌헬름인 걸 알지만, 굳이 그것을 주변에 알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확언에 세렝게티는 그제야 안심한 눈초리를 지어보였다.
현실.
저주의 악몽이 아닌, 진짜 세상.
“······ 제가 잠들어있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보군요. 대체 누가······?”
세렝게티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드슨의 멍든 얼굴.
그리고 갑자기 바뀐 와이저 후작의 태도.
누군가가 엄청나게 고생을 시킨 게 분명하다.
살의가 솟구쳤다.
그러자 주변의 물건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녀는 정식으로 별을 먹어 초월한 초월자.
확실히, 막심과는 느낌이 백팔십도 다르다.
고작 데몬 하트 따위로 만들어진 초월 상태와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것을 막심도 알고 있으니 세렝게티가 잠들어 있을 때 노린 것이었겠지만.
“걱정마라. 놈은 죗값을 받았다.”
“······ 후계자님이 아니었다면 막심과 사이엔 공작에게 영지가 넘어갔을 거다.”
와이저 후작이 첨언했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 또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진 게다.
특히 내가 막심을 죽이는 걸 본 유일한 목격자였으니까.
8영웅을 손쉽게 요리하는 모습에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윽고 세렝게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막심······? 그 겁쟁이 막심 말입니까? 그놈이 사이엔 공작과는 무슨 관계이기에?”
와이저 후작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