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정말······ 대륙과 인류를 위해 헌신한 영웅이 맞습니까?
앤드류 사제로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함께 싸우다 죽은 동료들이 잠든 비석을 그토록 쉽게 부술 수가 있는 건지.
함께 마계의 대원정을 떠나, 선두에서 솔선수범하며 헌신한 500명의 기사였다.
8영웅처럼 대륙에 이름을 진동하진 않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이곳 ‘기사의 정원’에서만큼은 그들을 기리고자 도시민들이 자비를 들여 세운 비석이었다.
그것을 부수고 망쳐놓은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나는 가만히 도시의 광장 중심부에서, 부서져 흩날리는 비석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기사 500인의 이름이,
“제임스, 노아, 루커스, 제이콥, 시온, 비흐마, 브람······.”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한 그들의 이름이 이 비석에 새겨져 있어야 했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나와 함께 마계의 선두에서 죽음을 무릅쓰며 오직 헌신했으니까.
가족을, 친구를, 또 다른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명예로운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비석은 부서졌으며 표면은 갈려 나갔고, 대신 다른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막심.』
『그라시아.』
『마스터.』
『다크스타.』
『흑요.』
『반희.』
『빌헬름.』
『루시퍼.』
―마계로부터 대륙을 구한
마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위대한 8인의 영웅.
500인의 기사보다, 자신들의 찬양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그렇게 꽉꽉 채워 넣어놓았다.
8영웅이, 적어도 막심이 대원정에 참가하여 죽은 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진정으로 싸웠던 자들을 밀어내고, 지워내고 있다.
아예 대원정에 참가했던 사실 자체를 말살해버리는 중이다.
아마도 빌헬름과 같이.
“······명예로운 자들은 모두 그때 죽었다.”
명예를 모르는 자들만이,
겁쟁이와 후안무치하기 그지없는 자들만이 살아남았다.
허나 나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친 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없다.
두려움은 본능이고, 그곳은 지옥이었으니.
하지만 도망친 주제에 그 사실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도리어 있는 힘껏 싸운 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건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실추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명예를 자신이 했다고 말하며, 진짜를 가짜로,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그 행태에 신물이 났다.
그리고 명예를 부르짖는 저 여덟 명 중에는 웃기게도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마저도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이러는 걸까?
세계는 위험에 빠졌다.
판게니아도, 지구도, 모두가 위험한 상태다.
힘을 합쳐도 모자란 판국에 대체 왜 이토록 분열하려 드는가?
왜 이토록, 내 화를 돋우는가.
“쓰러트려!”
“그쪽! 더 힘을 주라고!”
“어어, 쓰러진다!”
쿠우우웅!
굉음에 시선을 돌리자, 석상들이 쓰러지고 있는 게 보였다.
기사의 정원을 이끌어왔던 명예로운 기사의 모습을 본뜬 석상들.
이곳 도시의 정체성이자 자랑과도 같은 것.
그것들을 도시민들을 이용해 쓰러트리고 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쓰러트리고 싶으면 너희가 하라고!”
사람들은 반발했다.
그러자 병사가 칼을 뽑았다.
“너희도 목이 잘려서 광장에 걸리고 싶냐? 8영웅 막심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일이다. 와이저 후작도 동의했단 말이다.”
“힘으로 겁박한 거겠지, 후작께서 동의했을 리가 없다!”
“나쁜 새끼들. 뭐가 8영웅이냐. 메이 할멈이 뭘 잘못했다고!”
“이제야 겨우 힘내서 살던 분을 어떻게 너희가!”
“이 개새끼들! 더는 못 참겠다!”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자, 병사들도 맞섰다.
“반항하는 놈은 다 죽는다!”
“너희가 그런다고 우리가 무서워할 것 같아?”
“발검!”
아무리 막심의 병사라고 할지라도, 막심 역시 발란 왕국 소속이다.
저 병사들 또한 발란 왕국 소속이고, 이 도시도 발란 왕국 소속이었다.
그런데 자국민을 향해 저토록 쉽게 검을 빼 든다.
심지어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광장에 잘린 채 걸려있는 머리를 바라보았다.
‘메이.’
처음 이곳 도시를 방문했을 때, 비석 앞에서 오열하던 노파.
비석에 새겨진 500인의 기사 중 한 명인 시온의 친할머니.
쓰러진 그녀를 앤드류 사제에게 데려다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야 겨우, 손자가 죽은 걸 인정하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던 그녀가 그래도 살아보려고 하고 있었을진대.
문제는 저것이었다.
비석. 손자의 이름이 지워진 것 때문에 항의를 했다가 목이 잘린 것이리라.
-무시하고, 피하십시오. 후계자께서 이곳에 계신 걸 알면 막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앤드류 사제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온다.
무시하고, 피하라.
맞다. 상식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막심은 강하다.
제아무리 도망자라 할지라도 내가 직접 고용한 용병단의 용병대장이었다.
최소 10레벨.
그것도 ‘초월할 자격’을 지닌 10레벨이었다.
초월할 자격이란, 레벨제한까지 모든 능력치를 올린 것을 말한다.
10레벨에 올라 모든 능력치를 100까지 찍은 자만이 초월할 수 있다.
하물며 그때보다 더 강해졌거나, 만에 하나 초월을 했다면, 지금의 내가 이길 가능성 따윈 없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백왕에게 부탁하는 것이겠지.
막심과 함께 놈의 도시를 날려버리는 것 말이다.
“아악!”
“이 개새끼들아!”
그러니까 참아야 하는가?
현실과의 타협.
지금 당장은 못 본 척 무시해야 하는 건지.
“제가 하겠습니다.”
“이럴 때 대신 손 더럽히려고 나를 고용한 거 아닙니까?”
이자벨라와 아이작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 순간.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결속’효과가 추가됩니다.》
지금, 둘과 처음으로 합이 맞았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분노’의 감정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는 군주로써 마땅히 분노해야할 일.》
《‘히든 특성 퀘스트 : 철혈군주’가 시작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참지 않았다.
기사왕으로써.
저들을 이끌었던 자로써, 분노해야 마땅했으니까.
*
“네놈이 그 기사왕의 후계자를 자처한다는 사기꾼이냐?”
단검을 빙글 돌리며 막심이 비웃었다.
크게 소란을 일으킨 놈이 누구인가 싶었는데, 기사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기꾼이라니.
기사왕 빌헬름이 죽은 뒤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재밌군. 고작해야 레벨 6 따위가, 기사왕의 후계자라!”
막심은 크게 웃고말았다.
이 사단을 낸 상대의 레벨이 고작 6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심은 상대방의 레벨을 볼 수 있다.
두 번이나 초월시킨 관찰스킬 ‘레벨 확정’은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레벨’을 확정시켜 확인하게 해줬다.
오로지 레벨을 확인하는 용도이기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덕분에 ‘관찰불가’ 옵션을 제외하곤 전부 확정해낼 수 있으니까.
막심이 여태껏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
이길 수 있는 레벨의 적과만 싸워왔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레벨 6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다.
‘놈은 혼자가 아니다. 그래봤자 고만고만 하겠지만.’
눈앞의 가짜 후계자가 혼자서 이곳까지 당도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도 영주성의 병사들을 도살하는 자들이 있다.
아마도 파티원.
놈을 돕는 자들이 있으니 가능했을 터.
“와이저 후작, 나를 죽이려고 이런 가짜를 들인 건가?”
“······!”
“이를 어찌한다. 놈을 죽이고 그대에게도 죗값을 물어야······.”
“도망자 막심.”
“······?”
도망자 막심이라니.
막심이 이맛살을 구겼다.
“나한테 하는 소리냐?”
“‘아흐람’을 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 네놈이, 어찌 8영웅이라 불리는 것이냐?”
“······.”
“혼자 살겠다며 생사를 함께한 300명의 용병들조차 버린 네놈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
순간 막심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졌다.
자신의 도망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
나머지 8영웅을 제외하면, 다 죽고 죽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자칭 기사왕의 후계자’가 있었다.
“개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러고 보니, 너한테는 받아야할 돈이 있었지.”
“돈?”
“1,200만 골드. 내가 네까짓 놈을 고용하려고 지불한 돈 말이다.”
“······!!!”
용병단을 고용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에게 지불한 금액.
그 금액은 당사자들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바로 자신과, 기사왕 빌헬름 말고는.
순간 막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것들을 모두 알고 있는 자.
“네놈······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지만,
만에 하나, 천만 분에 하나.
눈앞의 가짜가 사실 가짜가 아니라면?
기사왕 빌헬름의 진짜 제자,
관계자,
혹은.
‘팬텀······.’
플레이어, 팬텀!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레벨 6짜리가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노려온 걸 보면 결코 팬텀은 아니다. 팬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는 싸움을 하지 않으므로.
팬텀이 아니더라도 팬텀과 아주 가까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면 알아서 술술 토해내겠지.’
만약 팬텀을 특정하여 유인해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정보들을 토대로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리라.
8영웅이 아닌, 유일 영웅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화아아악!
막심의 전신에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데몬 하트.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 별과도 같은 힘을 지닌 것.
‘빠르게 끝내주마.’
고작 레벨 6따위.
손가락 하나로도 찢어 죽일 수 있다.
자신의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을 테다.
막심이 땅을 박찼다. 가속하여 순식간에 놈에게 다다른 막심이 단검을 휘둘러 어깻죽지를 노렸다.
근육과 힘줄을 모조리 끊어놓고, 피부에 끓는 물과 소금을 부어 고문하면 기억나지 않는 것도 술술 불게 될 테니까.
촤아아앙!
······ 그런데, 막혔다.
자신의 움직임을 보고 정확히 막아냈다.
막심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건?’
그건 결코 레벨 6의 움직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과 손목이 탈 것같이 아프다.
저런 조악한 철검이 줄 수 있는 데미지는 절대로 아니었다.
“성수······!”
그제야 막심은 놈의 두 철검에 모두 ‘성수’가 발라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그냥 성수가 아니라, 극상의 성수가 분명하다.
검을 부딪친 것만으로도 이만한 자극이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막심은 작게 웃었다.
하긴, 이런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쳐들어온 것이겠지.
하지만 여전히 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성수를 발라놨다고 한들 닿지만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저만한 극상의 성수라면 그 양이 얼마 되지도 않을 터다.
기껏해야 검신에 조금 묻혀놓는 정도.
‘악의 가속.’
막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눈이 검게 물들며 세상이 느리게 보인다.
가속된 자신만의 세상.
데몬 하트를 흡수하며 얻은 절대적인 권능!
느릿하기 그지없는 놈을 향해, 막심은 전방향으로 움직이며 빠르게 돌았다.
잔상이 남을 만큼 그 속도는 경이로웠다.
농락이다.
가만히 선 채로 어디가 찔리는지도 모른 채 쓰러지리라.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 자신의 무력감에 치가 떨릴 테다.
막심은 회심의 미소와 함께 단검을 찔러넣었다.
스으윽!
푹!
“커헉······?”
하지만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온 건 자신의 입이다.
수많은 잔상 중 진체를 잡아내고 정확히 찔러넣은 것이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찌른 것인지는 몰라도, 어지간한 타격 정도는 데몬하트의 재생력으로 재생되기 마련.
그런데 막심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 뭐냐, 이 성수의 양은?’
찔린 가슴팍의 살점이 급속도로 폐사한다.
높은 레벨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하다. 또한 데몬 하트로 강화된 육체는 무엇으로도 벨 수 없었다.
그런데 베였다. 베이고, 썩어버렸다. 재생조차 불가하다.
믿기지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레벨 6짜리가, 10을 넘어선 자신의 움직임을 어떻게 잡아낸단 말인가? 거기다가 타격을 준다고?
이건 성수를 조금 발라놓은 정도가 아니다.
검 전체에 듬뿍 적셔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