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52화 (52/317)

병사들을 뚫고 영주성에 가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재차 남자에게 물었다.

“앤드류 사제는 구호소에 계시는가?”

“아,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알려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후계자님이 아니셨다면 저희 모두 죽었을 겁니다. 게다가······.”

워프가 터진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죽은 기사들을 위해 해주신 말씀, 큰 위로가 됐습니다. 후계자님이 아니었다면 도시는 아직도 슬픔에 잠겨있었을 겁니다.”

500명의 기사가 대원정에 참가했고, 죽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조용하게 묻혔다.

혹자는 그들이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누군가는 아무도 몰라주는 개죽음이었다며 이를 갈았다.

기사왕의 후계자를 자처한 내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위로하지 않았다면 도시는 아직도 깊은 어둠과 슬픔에 잠겨있으리란 의미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조차도 아무도 안 해줬으니까요. 아무튼, 병사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적당히 안 보이는 곳에 치워두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가 기절한 병사들을 질질 끌었다.

도심에서 벌어진 소란.

나를 확인한 주택가의 영지민들은 창문을 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였다.

적어도 영지민들은 내 편이었다.

‘우선은 앤드류 사제부터 찾아야 한다.’

허나 영주성에 들리는 건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다.

기사의 정원으로 돌아온 이유는 오직 앤드류 사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안다사르도 안다사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플래티넘 박스.’

차원 균열을 막은 자 중 1위에게만 주어지는 보상!

기껏 얻었지만 내가 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찬양 기도문을 외울 수 있는 명예로운 사제만이 열 수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예로운 고위 사제’만이 플래티넘 박스를 열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명예로운 고위 사제’는 그나마 앤드류 사제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진정으로 명예로운 자들은 전부 대원정 때 죽고, 명예롭지 않은 자들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

구호소로 향하는 길.

아이작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지어 보였다.

‘후계자? 누구의 후계자라는 말이지?’

도통 란돌프의 정체를 모르겠다.

처음에는 영락없는 시체 까마귀인 줄로만 알았다.

단순한 변장이나 변신의 수준을 넘어, 그냥 시체 까마귀 그 자체였으니.

신화 신비의 관을 통과해 크람델의 모든 괴물들에게 주목을 받고, 오주력이 되었으며, 별을 거머쥐어 별 수호자들마저 탐내게 만든 존재가 어찌 인간일 수가 있겠는가.

‘···인간이었지.’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진짜로 인간이었다.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된다.

분명히 인간이고, 옆에 있는 이자벨라 또한 인간일진대, 시체 까마귀였을 때의 충격이 워낙에 강렬했던 탓이다.

그런데 갑자기 도시 ‘기사의 정원’으로 텔레포트하더니 ‘후계자’라며 추앙받는 상황.

이곳 도시의 영지민들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예사롭지 않다.

‘존중, 존경, 믿음.’

영지민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엔 삼박자가 고루 갖춰졌다.

‘도시를 지배하는 귀족의 후계자라도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엔 떠오르는 게 없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입이 근질거리는 걸 겨우 참고 있었다.

기사의 정원.

이곳이 어떤 곳이던가.

과거 발란 왕국 최고의 ‘기사 훈련소’로 불리었던 장소 아니던가.

발란 왕국이 지닌 13개의 대도시 중에서도 최고로 쳤던 도시다.

수많은 강력한 기사들이 배출된 곳에서 저만한 위용이라.

도시의 주인이나 후계자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저만한 믿음을 얻기는 힘들 것 같은데.

인덕이 좋았던 걸까?

“······ 후계자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구호소에 도착하자 앤드류 사제가 마중을 나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곤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지.”

일행을 확인한 앤드류 사제가 구호소 안쪽의 은밀한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8영웅 막심이 도시를 휘젓고 있습니다. 지금 후계자님이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겁니다.”

골치 아픈 일.

공공연연하게 기사왕의 후계자를 자처한다면, 그야 8영웅이라 불리는 막심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막심은 이미 기사왕의 후계자가 도시를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나라는 건 몰라도 말이다.

“알고 있다.”

“그런데 일행이 늘어나신 것 같군요.”

“음.”

처음 도시에 올 땐 이자벨라와 나, 둘뿐이었다.

둘이었는데 지금은 넷이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흐람까지 다섯이지만, 아흐람은 현재 아이작이 매고 있는 가죽가방 안에 갇혀있는 신세였다.

그러니 추가된 인원은 셋이었다.

아이작과 아흐람, 그리고.

나는 천천히 뒤따르던 듀라한의 투구를 벗겨주었다.

“잠깐. 설마?”

앤드류 사제의 두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 안다사르?”

갑옷을 입고 따르던 자의 얼굴이 익숙했으니까.

앤드류 사제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안다사르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맙소사······! 안다사르······!”

주르륵.

앤드류 사제의 눈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창백한 피부는 시체처럼 차갑기 그지없었으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딸, 안다사르가 분명했기에.

크게 기대도 안 했건만, 정말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앤드류 사제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기사왕의 후계자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쿨럭! 커헉!”

그와 동시에 아이작이 헛기침을 쏟아냈다.

기가 막힌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을 들었으니.

‘기사왕? 설마 그 기사왕 빌헬름의 후계자라고?’

기사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빌헬름밖에 없다.

북부 백왕이 인정한 오주력이 기사왕 빌헬름의 후계자라니.

······ 이게 대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

한참이나 안다사르의 손과 얼굴을 부여잡은 앤드류 사제가 여전히 감정이 북받치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왕의 후계자.

반신반의였으나, 크람델에서 직접 데려오기까지 했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게 있었다.

【명성 724】

【악업 27】

사제들은 대상의 명예와 악업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후계자가 크람델에 다녀온 사이, 명예가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724라니!

‘어지간히 명예로운 기사들보다도 높은 수치이지 않은가.’

기사는커녕 저만한 수치는 여신교에서도 드물다.

추기경 중에도 있을까 말까 한 수준.

대체 무엇을 하면 단기간에 이 정도로 명예를 쌓을 수 있을까?

악업도 살짝 높아지긴 했지만, 명예에 비하면 미미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지요?”

허나 그런 의문은 모두 접었다.

안다사르. 자신의 딸을 데려와 줬으니까.

비록 목이 잘려 듀라한이 됐고,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제부터라도 절대 놓지 않으면 된다.

“이걸 열어다오.”

준비됐다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즉시 플래티넘 박스를 꺼냈다.

그것을 본 앤드류 사제의 두 눈가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성유물 아닙니까?”

“성유물?”

“성유물은 사람마다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 하지만 이건 분명히 여신교의 성유물이 확실합니다. 게다가 왜인지 봉인되어 있군요.”

“그럼 봉인을 깰 수 있나?”

“본래라면 성황께서 직접 하셔야 하는 일이지만······ 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앤드류 사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에게 이것을 맡긴다면 할 수 없어도 해내야만 했다.

단순히 약속을 지켜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명예로운 자였기에, 충분히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다행이군.”

혹시 안 되면 어쩌나 싶었다.

그나저나 봉인된 성유물이라.

나는 앤드류 사제에게 플래티넘 박스를 건네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면죄부도 한 장 부탁하지.”

“······ 또, 면죄부를요?”

벌써 세 장째.

앤드류 사제가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면죄부마저 달라는 소리에 의아해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한 장은 그대에게, 한 장은 안다사르에게 사용했다.”

“아······ 그럼 나머지 한 장은?”

“나 자신에게 사용할 생각이다.”

“하지만 악업이 높은 수치는 아닙니다. 명예에 비하면 굳이 면죄부를 사용할 필요까진······.”

고개를 저었다.

앤드류 사제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벽 너머, 영주성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곧 사용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

*

붉은 단발의 머리칼을 한 젊은 남자.

8영웅 중 일인이라 불리는 막심은 영주의 자리에 앉은 채 다리를 쭉 뻗어 책상 위로 올렸다.

“이봐, 와이저 후작. 언제까지 버틸 생각이지?”

“······ 내가 직접 사이엔 공작과 담판을 짓겠소.”

그리고 방문자를 접견하는 의자에 와이저 후작이 앉아있었다.

굴욕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막심은 사이엔 공작이 보낸 전령이자 사이엔 공작이 직접 공인한 후계자였다.

게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자신이니, 굴욕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이엔 공작께선 이미 값을 다 치뤘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영지의 안녕도 물 건너간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조금만 더 시간을······!”

“이봐. 허드슨이라는 놈도 그렇고, 갑자기 변한 후작의 태도도 그렇고, 내가 정말 모를 줄 아나?”

“······.”

“이 사실이 공작님의 귀에 들어가면 이곳은 전부 몰살이다. 그나마 내가 사정을 봐주고 있다는 걸 감안해줬으면 좋겠군.”

와이저 후작이 입을 닫았다.

‘역시 아무말 못하는군.’

이 영지에 도착한지 일주일 째.

막심은 이미 이 영지의 사정을 전부 파악한 뒤였다.

‘그 허드슨이라는 놈, 순백의 기사와 깊은 관계인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돈 좀 많은 상인인 줄 알았지만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를 바라보는 놈의 눈빛을 보곤 확신했다.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걸.

그리고 이 사실이 사이엔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이 도시는 사라질 것이라는 걸.

‘사라지게 두기엔 아깝고, 내가 먹어야지.’

하여 막심은 생각을 달리했다.

이 약점을 파고들어 영지를 자신이 먹어버리기로.

공작의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이미 도시 하나를 승계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막심은 공작을 넘어 이곳 발란 왕국의 왕이 될 생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용병대장에 불과했으나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원탁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 도시까지 먹어치운다. 그럼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거다.’

막심은 다른 영웅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두 개의 도시의 주인이 된다면, 결코 무시하지 못하리라.

곧있을 원탁 회의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한 뒤 지구에서도 크게 영향력을 떨칠 계획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인다.

자신을 무시한 놈들의 콧대를 바짝 눌러버리는 장면이 눈앞에 선했으니까.

“내 하루의 기다림은 백만 골드의 값어치와 같다. 준비한 돈도 오늘이 끝인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할 것이냐 후작?”

막심은 여유로운 태도로 빙글빙글 손가락으로 돌리던 단검을 영주의 책상에 꽂았다.

영웅이라 불리는 자치곤 하는 행동거지가 동네 양아치, 건달과 똑같았다.

어찌 이런 자가 8영웅이라 불리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저 후작은 입술을 깨물며 바스라지도록 주먹을 쥐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세렝게티가 몸을 회복했건만.

의식만 깨어나면, 이런 놈에게 수모를 겪는 일 따윈 없을 텐데.

‘사이엔 공작에게 돈을 빌리는 게 아니었다.’

와이저 후작은 자신의 선택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이엔 공작보다 더 독한 놈이 영지로 들어와버렸으니까.

영지를 포기하거나, 세렝게티를 포기할 수밖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끄아아악!”

“커헉!”

“사, 살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소리.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영주성을 가득 채웠다.

막심은 이맛살을 구겼다.

“감히······ 어떤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위대한 8영웅이라 불리는 자신이 있는 이곳에.

웬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겁도 없이 쳐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죄. 그 죗값은 목숨으로 치루게 되리라.

화르륵!

막심이 책상에 꽂은 단검을 뽑아내자, 곧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불꽃이 전신에 넘실거렸다.

‘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군.’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무료하기 짝이 없다.

와이저 후작을 괴롭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벌써 일주일 째.

마침 잘 됐다. 이만한 소란을 일으킬 정도라면 이곳의 기사들보다는 강할 터.

‘데몬 하트의 위력을 똑똑히 보여주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해진 몸.

와이저 후작에게 확실하게 새겨줘야겠다.

막심은 살의 가득한 눈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돌프 vs 8영웅 막심

-무시하고, 피하십시오. 후계자께서 이곳에 계신 걸 알면 막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앤드류 사제는 내게 말했다.

피하라고. 막심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태풍 같은 것이라고.

-다만······ 한 가지만 알려주십시오. 그들은 영웅입니까?

다른 도시라면 모르겠으나, 이곳 ‘기사의 정원’의 사람들은 8영웅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특히 막심에 대해.

막심이 정말 마계의 대원정을 떠나 결과를 낸 8영웅 중 일인이라면, 같은 영웅의 후계자와 이곳 도시에 적대심을 보일 리가 없었으므로.

막심이 가장 먼저 이 도시에 와서 행한 행패는 비석을 부순 것이었다.

영면에 든 기사 500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부수고, 갈아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8영웅의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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