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역시, 백왕의 확정적인 보상안에 비견되진 않는다.
무슨 도시이든 내어주겠다는 그 말은 그 정도로 파격적이다.
적을 만들더라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도시의 지배자가 되어도 신비와 칭호는 따라붙는다.
사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러모로 백왕 쪽에 붙는 게 이득이긴 하다.’
백왕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별 수호자들?
그들은 별과 여신의 일을 제외하면 나서지 않는다.
반면에 백왕은 제약이 없다. 제약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롭다.
그 밑의 사주력 역시 호감도만 잘 쌓으면 나를 돕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괴물들의 도움을 받으면, 왕국 하나를 무너트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문제는 내가 인간이거나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게 들키면 그 즉시 사망이라는 거지.’
지금까진 어떻게든 커버를 쳐왔지만 나의 능력 자체는 이들에 비해 아직 부족하다.
만약 허세가 들통나는 순간 목이 날아갈 것이다.
인간임을 들켜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것도 내가 강해지면 될 일이다.’
빠른 성장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향후 미래를 내다보면 역시 백왕 쪽에 붙는게 맞다.
인간인 것도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
“생각해보니, 백왕과 그대들이 마음에 더 드는 것 같다, 까악.”
“······ 그럼?”
“잘 부탁한다, 까악.”
“역시 통이 큰 친구로군! 그깟 별 수호자들 따위에게 놀아나지 않을 줄 알았네!”
사왕이 크게 기뻐했다.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으니,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내가 더욱 기꺼웠으리라.
이런 결정은 최대한 빠르게 하는 게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굳이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재는 모습을 보이면 신뢰도만 하락하기 마련이었다.
<‘백왕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주력’의 자격으로 워프가 활성화됩니다.>
<‘크람델’에 웨이포인트가 생성됩니다.>
<업적 ‘백왕의 인정을 받은 자’가 추가됩니다.>
<명예가 100 상승합니다.>
······이 또한 예상대로였다.
백왕 역시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확실하다.
백왕의 수호 아래, 크람델은 정해진 장소 외엔 워프가 본래 불가능했다.
그런데 백왕의 인정과 함께 크람델에 웨이 포인트가 생성됐다.
언제든 원할 때 텔레포트 북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의미.
내가 시원하게 결정하자 시원하게 답을 준 것이다.
‘별 수호자를 택했다면, 얌전히 보내주진 않았을 것 같군.’
윤곽이 분명해졌다.
백왕은 내게 위협을 느끼고 경고했다.
별 수호자가 되면 자신에게 언젠가는 위협이 되리라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보상과 함께 선택을 기다렸다.
아마도 별 수호자가 되었다면 얌전히 크람델을 벗어나진 못했을 것 같다.
별 수호자들이 나를 적극적으로 지켜줄지도 의문이었다.
처음부터 백왕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멸악의 거인을 협박했을 정도였다.
반면 별 수호자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놈을 몰랐다면 이 관심을 그저 호의인 줄 착각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착각은 금물이다.
백왕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백왕을 안다.
그의 위험을 탐지하는 능력은 미래를 읽는 수준으로 경이롭다.
이 모든 게 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경계에서 나온 호의다.
사왕과의 대화도 몰래 엿듣고 있지 않았나.
‘나는 지금 살얼음판 위에 있다.’
앞으로도 백왕은 내게서 위협을 느끼거나, 위협이 되리란 생각이 든다면 가차 없이 제거할 것이다.
내가 백왕을 100% 믿지 못하는 것처럼, 백왕 역시 나를 100% 신뢰하진 못하고 있을 테니까.
진정으로 살얼음판 위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떨어지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약간의 의구심 정도는 갖고 있을 터.’
무엇보다 나는 인간이다.
그것도 판게니아의 인간이 아닌 플레이어였다.
철저하게 시체 까마귀를 연기한들, 철혈군주의 심장에 의해 감정이 가려진다한들, 백왕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가까이 두고 판별하려는 것이다.
양날의 검.
최강의 우군을 얻었지만, 절대로 틈을 보여선 안 되는 입장이 됐다.
“내일 별 수호자 녀석들의 얼굴이 구겨지는 게 정말 기대되는군!”
사왕이 껄껄 웃었다.
이 선택이 불러올 미래가 통쾌해 죽겠다는 듯이.
*
“시체 까마귀가 오주력?”
“평범한 시체 까마귀가 아니라 ‘신화의 관’을 통과한 시체 까마귀다.”
“백왕께서 직접 인정하셨다면 이견의 여지가 없지.”
“허······.”
웅성웅성.
크람델에 모인 괴물들로 광장이 가득 찼다.
백왕전의 앞에서 다섯 번째 주력의 발표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본 괴물들은 반신반의였다.
내가 정말로 다른 주력들에 비견하여 강력한 존재인지 의아해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백왕과 사주력이 인정했다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 오늘의 결정을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멸악의 거인을 비롯한 별 수호자들은, 똥 씹은 표정을 짓고는 크람델을 떠나갔다.
마지막에 드라무트가 복잡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드라무트도 내가 별 수호자가 되는 걸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
드라무트는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저들의 인정만 없을 뿐, 나는 여전히 별의 주인이었다. 두 개의 별을 소유한 ‘별 계승자’이기도 했다.
이 진실 앞에서 애당초 다른 누군가의 인정 따윈 필요 없는 일.
“크람델의 다섯 번째 주력, 시체 까마귀의 왕 란돌프다.”
백왕이 앞서서 말했다.
동시에 주변이 쥐 죽은듯이 조용해졌다.
떠나가는 별 수호자들과 그들의 똥 씹은 표정을 보며 백왕과 사주력은 아주 즐거워하고 있었다.
별 수호자들이 마저 크람델을 떠나기 전에.
“모두 환영해주도록!”
“란돌프! 란돌프!”
“새로운 주력이시여!”
“크람델이여 영원하라!”
괴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동시에 별 수호자들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기분이다.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그러나 당장에 놓인 상황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살다 살다 괴물들에게 환호를 받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내가 사냥한 괴물의 숫자만 여기 크람델에 모인 괴물들보다 많을 텐데.
심지어 크람델은 나로 인해 한 번 무너질 뻔하지 않았던가.
······ 짧지만, 영원토록 기억될 강렬한 환영식이었다.
*
환영식을 뒤로하고 나는 크람델을 벗어났다.
도시를 고르는 보상안은 더 생각해볼 문제였고, 그보단 ‘기사의 정원’으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그대로 가만히 크람델에 있다간 내 밑천이 드러날지도 몰랐으니까.
“여기는······? 기사의 정원 아닙니까?”
텔레포트 북을 통해 워프를 넘어온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체 까마귀가 왜 인간들의 도시인 기사의 정원에 굳이 찾아온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쩌어어억!
나는 가슴팍에서 핵을 떼어냈다.
“컥······?!”
그것을 본 아이작이 경악했다.
마물이 핵을 스스로 떼어내리라곤 상상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에서 아이작의 입과 눈은 찢어질 만큼 벌어졌다.
“이, 인간······!!”
시체 까마귀가 아니라, 인간으로 변한 탓이다.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역시 이 몸이 제격이군.’
시체 까마귀로 장시간 있으면 몸이 저린다. 오래간만에 돌아오자 전신의 근육이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곤 여전히 경악 중인 아이작에게 말했다.
“달라진 것은 없다, 아이작.”
1년간 봉사하라는 약속.
그 약속은 그대로였다.
인간이든, 시체 까마귀든 간에.
“아, 아니, 진짜로 인간입니까?”
“그래.”
“······ 그 난장판을 벌여놓고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되어 크람델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인간이라 믿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럼 혹시······?”
아이작이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자벨라의 등에서 반룡인의 날개가 사라졌다.
“이, 이런 사기꾼들!”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군.”
아이작 역시 인간인데 반룡인인 척 크람델에 있지 않았나.
턱이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벌어진 아이작을 뒤로 한 채, 나는 간만에 돌아온 기사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삭막하군.’
왠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더 침체 된 분위기다.
우선, 창문을 모두 닫아놨다.
창문을 닫아놨다는 건 위협적인 무언가가 도시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와이저 후작은 놀랍게도 영지민들을 제법 아끼는 귀족이다. 영지민들도 와이저 후작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아예 다른 존재. 제 3자가 도시에 나타났다는 증명.
누굴까?
개인은 아닐 테고, 도시에 위협적인 단체가 왔다고 봐야할는지.
아니면 그 사이에 설마 도시의 주인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가능성은 적지만, 와이저 후작의 상황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여러 의문과 함께 도시의 중심으로 더 들어가자 마침 사람 한 명이 보였다.
물을 뜨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남자.
“이봐.”
“누구······ 아! 후계자님?”
남자가 나를 알아봤다.
이곳 도시의 영지민들은 나를 ‘기사왕의 후계자’라고 알고 있었다.
도시를 지키고, 비석에 새겨진 기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앤드류 사제에게 추앙받은 자.
그런데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영지에 무슨 일이 있나?”
“그, 그게······ 지금은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왜지?”
영지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내 귀에 속삭였다.
“······ 8영웅 중 한 명이 지금 도시에 있습니다.”
순간 이맛살이 구겨졌다.
8영웅?
설마 그 8영웅?
마계의 대원정을 떠난 빌헬름 대신 영웅인 척 하고 있는 그놈들?
영지민의 표정은 어두운 것뿐만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8영웅 중 누가 나타났기에 이런 표정이란 말인가.
“8영웅 중 누가?”
하여 묻자 침을 꿀꺽 삼킨 영지민이 답했다.
“마, 막심님이십니다. 지금 도시로 후계자님이 들어가시면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병사들 중에 누가 보기 전에 어서······.”
“이봐! 거기 누구냐!”
“헉!”
근처에서 들려온 병사들의 고함에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재회
무장한 병사 둘.
‘와이저 후작가의 병사가 아니로군.’
갑옷과 문양이 다르다.
‘막심. 막심이라.’
녀석이 끌고 온 병사가 도시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왜 녀석이 이곳에 있는 걸까.
8영웅이라 불리며 사이엔 공작의 아래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막심은 진정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기껏 고용해놨더니 가장 먼저 도망친 도망자에 불과하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막심은 ‘카이저’ 용병단의 대장이었다.
무려 300명을 이끌며 대륙 전역에 이름을 날린 강자였기에 믿고 계약했다가 피를 봤다.
놈은 첫 번째 지옥 ‘망자의 늪’에서 아흐람이 나타나자마자 도망쳐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쳤다.
그런 놈이 8영웅이라니,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막심이 이곳에 왔다면 사이엔 공작 때문일 터.’
막심이 이곳에 있다면 얼추 그 이유가 예상이 간다.
필시 사이엔 공작과 와이저 후작 간의 거래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세렝게티가 엮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을 들인 것이리라.
허나 아무리 와이저 후작의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지만 이상하긴 하였다.
자신의 영지에 남의 병사가 활개를 치게 놔둔다는 건 영지를 포기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으므로.
‘아니면 도시의 일을 아예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몰려있거나.’
뭐가 됐든 좋지 않은 상황인 건 분명했다.
“뭐야 이 조합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껄렁하게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적당히 기절시켜둬라.”
“뭐라는······ 컥!”
스슥!
그게 끝이었다.
병사들은 제대로 된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채로 무릎을 꿇었다.
아이작과 이자벨라.
둘의 속도는 막상막하였다.
거의 동시에 두 병사를 기절시켰다.
하지만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이작의 레벨은 10이고, 속도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까.
이자벨라가 그런 아이작과 비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Lv.9】
그녀의 레벨이 올랐기 때문이다.
처음 사막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8이었던 이자벨라의 레벨이, 크람델을 거치며 상승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비의 관’을 통과해 쓸모있는 신비도 얻었다.
‘진짜 비룡의 신비를 얻을 줄이야.’
처음 신비의 관에 입장할 때 내가 노린 신비 중 하나가 저것이다.
신화의 관으로 뒤바뀌며 처음 의도와 달라졌긴 했지만, 그걸 이자벨라가 가져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덕분에 속도만큼은 아이작과 대등하다.
어쎄신은 기본적으로 민첩하니까.
고개를 돌려, 아직도 당황한 영지민 남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우리를 못 본 거다.”
“아······ 예! 예,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영지민 남자가 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