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름 없는 성좌는 제천대성인가?’
조금 의아하긴 하였다.
긴고아의 주인은 석가여래다. 하지만 석가여래가 머리카락으로 긴고아를 둔갑시키진 않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으로 둔갑시켜서 내 선택을 유도한 것이라면, 제천대성의 가능성이 더 높으리라 추측되는 상황.
어쨌거나.
‘유용하게 사용해주마.’
나는 긴고아로 빼앗은 아흐람의 스킬을 아낌없이 이용할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긴고아’가 봉인된 ‘아흐람’의 고유 스킬을 한 가지 강탈해옵니다.>
스킬 강탈!
그 순간 아흐람이 경악하며 온몸을 꽈배기처럼 비틀어댔다.
-이, 이 도둑놈이······ 크아아아아악!
백왕의 선물 <2권 끝>
고유스킬.
일반적인 스킬이 아닌, 각 개체가 고유로 쌓아 올려 만들어진 스킬이다.
개체의 삶과 경험이 녹아나는 능력의 총아.
당연히 다른 평범한 스킬보다도 강력하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뿐이며 중복되지 않는 ‘권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긴고아는 봉인된 대상의 그러한 ‘고유 스킬’을 강탈해온다.
-안된다, 안 돼······!
아흐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곧이어 아흐람의 몸에서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듯 연기를 머금은 기포 세 개가 떠올랐다.
저 세 개가 모두 아흐람이 가진 ‘고유 스킬’일 터.
-차라리 나를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비참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그것도 별을 삼켜 더 강해졌음에도 패배했다.
패배하여 죽었으면 모르겠지만 산 채로 봉인 당해 고유의 능력마저 빼앗기기 직전이었다.
이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을까.
“망자의 늪, 망자의 검, 망자의 왕.”
나는 차례대로 고유 스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기포에 떠오른 이름들을 순서대로 입에 담아 아흐람의 반응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망자의 검’만은 안 된다······!
아흐람이 급하게 말했다.
망자의 검. 놈이 사용하던 그 거대한 대검이 분명하다.
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저 반응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내 입으로 다른 걸 불렀을 때 놈은 더욱 크게 반응했으니까.
‘정말 연기 못하는군.’
어떻게든 저 검을 가져가길 원하는 것 같지만, 아쉬운 일이다.
이 정도 발 연기로 속아주리라는 기대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기야, 아흐람이 연기를 해볼 일이 언제 있었겠나.
지옥의 수문장을 자처하며 진짜 왕처럼 군림해온 놈이다. 누군가에게 거짓으로 연기를 해본 경험 자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안 돼! 제발 멈춰라!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망자의 왕(10Lv)’ 고유 스킬을 강탈했습니다.>
기포가 흘러들어오며 새로운 스킬이 새겨졌음이 느껴졌다.
즉시 스킬을 확인했다.
【망자의 왕(10Lv)】
-망자의 왕 아흐람의 고유 스킬
-망자를 끌어들이며, 지배한다.
-지배한 망자를 다른 육체에 심을 수 있다.
-레이드 보스 판정 이상의 망자를 지배하면 추가 능력치를 얻는다.
설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야말로 망자를 지배하여 권속처럼 부릴 수 있는 스킬.
‘시체예술의 거장과 연계되는군.’
지금 이 몸, 시체 까마귀가 지닌 ‘시체예술의 거장’ 스킬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시체 예술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시체 예술은 ‘만드는 것’이다.
쌓고, 연결하여 조립하는 기능이 전부였다.
그것을 움직이려면 여태까진 다른 시체 까마귀를 소환해 이동시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골렘을 만들고 다수의 시체까마귀를 붙여 전투를 시켰지만 역시나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망자의 왕’은 지배한 망자를 내가 만든 예술물에 심을 수 있다.
심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가능해진다는 말.
‘안다사르의 머리가 거기 있었던 이유가 이 스킬 때문이었군.’
이제야 조금 설명이 된다.
왜 안다사르의 머리가 그곳에 있었는지.
이 스킬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그곳까지 당도했으리라.
이어 아흐람의 지배를 받고, ‘광란’을 시작한 듯싶었다.
‘레이드 보스 판정 이상의 망자를 지배하면 추가 능력치를 얻는다.’
뿐만이 아니라, 망자의 격에 따라 추가 능력치가 있다.
마침 잘 됐다.
안다사르의 머리도 이곳에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리자 구석에 처박힌 안다사르의 머리가 보였다.
더불어 머리를 부둥켜안고 있는 듀라한의 육체 또한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떠라.”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안다사르가 눈을 번쩍 떴다.
이미 이 스킬에 한 차례 지배당한 적이 있으니, 다시 지배하는 것 역시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망자의 왕’ 스킬로 ‘안다사르’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안다사르’는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9Lv)’ 망자입니다.>
<‘안다사르’를 지배해 성력이 영구적으로 3 상승합니다.>
성력이 3 올랐다.
그런데 표현이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설마?’
나는 재빨리 상태창을 확인했다.
<능력치>
레벨 : 6
힘 : 82(72+10) 체력 : 82(72+10) 민첩 : 82(72+10)
지능 : 82(72+10) 성력 : 85(75+10)
그것을 보자 두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순수능력치를 올려준다고?’
+가 아니라 아예 순수능력치를 더해준다.
예컨대 추가로 붙은 능력치는 그 추가해주는 것을 잃거나, 착용하지 않게 되면 추가된 능력치가 다시 0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순수능력치로 오른 건 영구히 적용된다는 뜻이다.
설령 스킬을 잃더라도 말이다.
‘레벨 한계선을 뚫고 올려준다. 확실히 고유 스킬이라 불릴 만하군.’
레벨마다 정해진 한계선이 있다.
보통은 1레벨당 능력치 10이 한계선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12지만, 레벨을 높이지 않으면 그 이상으로 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망자의 왕’ 스킬은 그 한계선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었다.
설령 망자의 왕 스킬을 잃게 되더라도 영구히 유지되니, 여태껏 얻은 모든 보상을 통틀어도 최상위급의 능력이었다.
-이, 빌어먹을········· 크아아아악!
자신의 권능을 빼앗겨 배가 아픈걸까.
아흐람이 고통을 못 이겨 발버둥쳤다.
긴고아가 자동으로 아흐람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중이었다.
“좋은 생각, 좋은 말만 해라, 까악. 그럼 고통이 없어질 거다, 까악.”
자동 교정 기구가 따로없다.
긴고아는 봉인한 대상이 나쁜 마음을 먹었을 때 고통을 준다.
게다가 스킬을 강탈당한 아흐람은 몸집이 더 작아졌다.
어린아이 수준에서 이제는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
‘굴복시켜서 정보를 좀 뜯어내야겠다.’
아무리 아흐람이라고 해도 저 고통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다.
언젠가는 굴복할 테고, 그럼 마계와 마왕에 대한 정보를 뜯어내야겠다.
스킬만이 아니라 아흐람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흐람 역시 망자다.’
아흐람 역시 망자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굴복하거나 내가 더 성장하면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때 돌연 엷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다사르.
듀라한의 손에 얹어진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앤드류 사제를 아느냐, 까악?”
“그건······ 누굽니까?”
친부인 앤드류 사제마저 잊고 있다.
망자.
잃어버린 자.
혹시나 했는데, 모든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듯싶었다.
“엘드 리치였던 때는 기억이 나느냐, 까악?”
“······모르겠습니다. 안다사르라는 제 이름과 당신이 제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얗게 샌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몸과 머리가 따로 놀긴 하지만 안다사르는 안다사르였다.
혼종의 핵이 되었을 땐 광란 그 자체였는데 내가 지배하자 이성이 돌아온 것 같다.
문제는 기억이다.
‘차라리 잘 됐다.’
하지만, 차라리 기억이 안 나는 편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의해 엘드 리치가 되고, 사왕에 의해 듀라한이 되어, 망자의 왕 아흐람에 의해 거대 혼종의 핵이 되기까지 했으니.
‘···인생 참 파란만장하군.’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기억들은 백해무익하다.
그냥 잊는 게 일억 배는 낫다.
앤드류 사제는 오열하겠지만, 어쩌겠나.
끔찍한 악몽보단 새로 좋은 기억을 쌓는 게 여러모로 둘 다 행복한 길 아니겠는가.
듀라한이 된 딸이 있다는걸 들키면 여신교에서 파면당하겠지만, 뭐······ 거기까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오주력이여, 들어가도 되나?”
“들어와라, 까악.”
이윽고 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초에 이곳은 그의 성이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을 터.
사왕은 안다사르와 아흐람을 보곤 크게 놀랐다.
“음, 놀랍군. 그 둘을 아예 종속시킨 것인가?”
“하나는 조련 중이다, 까악.”
-크아아아아악!
누굴 조련 중인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허. 마계의 수문장을 봉인한 걸로도 모자라 조련까지······ 그대는 내 상상을 항상 뛰어넘는군.”
“무슨 볼일이냐, 까악?”
“백왕께서 긴 고민 끝에 그대에게 줄 보상안을 결정했네.”
나를 대하는 사왕의 말투가 묘하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본위였지만, 이제는 나를 인정한 듯 보였다.
“궁금하군, 까악.”
“영지. 그대가 원하는 도시를 하나, 내어주겠네. 주력은 모두 자신의 도시를 갖고 있으니. 참고로 이곳 크람델은 공동소유지만 말일세.”
“어떤 도시를 말하는 것이냐, 까악?”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잠깐.
······어떤 도시를 원하냐고?
여기서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의 목록을 나열한 게 아니라, 그저 ‘어떤 도시를 원하냐’고 묻는다.
그 저의가 무엇인가 이상했다.
“······? 아무 도시나 상관이 없나, 까악?”
“아, 예외적인 곳은 있네. 흑왕이 지키는 대륙 남부의 도시와 ‘아르혼 제국’의 소유 도시는 제외일세.”
“그 두곳을 제외한 모든 도시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냐, 까악?”
“바로 그렇다네.”
미친.
그제야 나는 사왕의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복하여 빼앗아서라도, 내게 주겠다.’
그냥, 미쳤다.
이보다 더 파격은 없다.
내가 원하는 도시가 있다면 그곳을 빼앗아서 주겠다니.
물론 어디까지나 ‘내어준다’는 거지 ‘관리하고 막아준다’는 뜻은 아니다.
즉, 넘겨준 뒤에는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짜 미친 일이었다.
백왕과 사주력이 정복하지 못할 도시가 있을까?
‘없다.’
그들이 마음먹어서 빼앗지 못할 도시는 없다.
황금의 도시 아르카나?
기사의 정원? 유적 도시?
기타 여러 왕국의 대도시들?
못 막는다.
그나마 대륙 유일의 제국인 ‘아르혼’을 제외하면, 이들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혼 제국은 아직 플레이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모든 플레이어들, 세력들의 최종 목표는 ‘아르혼’을 먹는 것일 터.
‘어느 때보다도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건······ 이건 당장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더더욱 신중하게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고, 내게 최대한의 이득이 되는 곳을 골라야만 한다.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보상안.
심지어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음, 그대 정도라면 어느 도시이든 가질 수 있겠네만, 그래도 우리 사주력과 백왕의 이름이면 귀찮은 일이 적어지지 않겠나?”
사왕이 첨언했다.
이들이 정복하면 그 순간 그곳은 나의 도시가 된다.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성명을 하겠다는 거다.
백왕과 사주력을 정면에서 적대할 세력?
그딴 게 있을 리가.
그러니 ‘귀찮은 일’이 없다.
“지금 골라야 하는 건가, 까악?”
“백왕께선 인내심이 길지 못하다네.”
사왕은 대답을 촉구했다.
별 수호자들이 내게 무엇을 건네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이 대화도 듣고 있다.’
확신이 생겼다.
겉으로는 사왕을 보냈으나, 이 대화를 백왕도 듣고 있다는 확신이.
‘나를 경계하고 있군.’
내가 오주력 대신 별 수호자의 자리를 택하는 걸 백왕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엄청난 보상안이지만, 나를 경계하고 있다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단순히 별 수호자가 하나 더 늘어나서 생기는 경계심은 아닐 테니.
‘백왕은 나를······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다.’
환영식
자신에게 위협이 되리라고 여기고 있다.
이건 단순한 경계의 정도가 아니다.
‘나를 동격으로 보고 있다.’
동격.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체급이라고 나를 판단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자신의 적이 될 것이냐, 아니면 아군이 될 것이냐.
“고민할 필요가 있나? 별 수호자 녀석들이 내건 보상안이라고 해봤자 ‘칭호’뿐이지 않은가?”
······ 역시,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떠봤다.
별 수호자들은 내가 정식으로 별 수호자가 될 경우 ‘칭호’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칭호’는 능력치를 올려준다.
멸악의 거인처럼.
별 수호자들이 모두 인정하여 격을 높인 칭호. 그 자체만으로 신비가 생기고 고유의 명예가 부여될 테니까.
그러니 그 ‘칭호’가 별 것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엄청난 거지.’
별 수호자들이 정식 명칭을 부여하고 인정한다.
어쩌면 다른 별의 단서마저도 쉽게 내어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