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악의 거인은 아차싶었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건만.
“여신이시여!”
멸악의 거인은 별을 향해 말했다.
검게 물든 여신에게 빌었다.
제발 진정하라고.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 여신 피나의 눈.’
멸악의 거인은 블랙홀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눈을 보았다.
쌍둥이 여신, 레아의 동생 피나.
천공의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눈이 왜 이곳에 떨어져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악에 물든 채, 어찌하여 악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말인가!
―크······ 하하하!
아흐람이 멸악의 거인을 조소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폭발은 막을 수 없다.
별 수호자들을 모조리 데려가주마.
―뭣············?
하지만 아흐람의 조롱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꼈으니까.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무언가’를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걸.
무섭다. 두렵다.
지옥의 왕인 자신에게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놔라······!
그것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험도만큼이나 빠르지 않은 덕에 피하는 건 쉬울테지만, 문제는 멸악의 거인이 아흐람을 붙잡아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흐람은 발버둥쳤다.
저 ‘무언가’에 당하면 끝장이 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폭해서 소멸하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피해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멸악의 거인은 아흐람을 움쩍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자폭을 하고자 벌인 짓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촤악!
이윽고, 아흐람은 알았다.
자신의 이마에 닿은 무언가를.
그 ‘무언가’에 의해 자신이 ‘봉인’당하고 있음을.
아흐람이 조심히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머리에 차여진 이것은 봉인구였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감히 지옥의 왕조차도 묶어둘 수 있는.
하지만 이런 봉인구가 흔할 리 없다.
그리고 아흐람은 이러한 봉인구를 본 적이 있었다.
옛 적.
먼 고대에서.
신에 가장 가까웠던 존재를 봉인했던 물건.
―기, 긴고아······?
바로 전설 속의 봉인구, 긴고아(緊箍兒)라는 걸.
힘을 쓸 수가 없다.
마력이 동하지 않는다.
마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비켜라, 까악.”
몸이 절로 움직였다.
아흐람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시체 까마귀.
그것은, 단순한 시체 까마귀가 아니었으니까.
별에서 읽은 기억과, 자신의 영혼이 저 까마귀를 알고 있었다.
죽여야 하고, 죽이고 싶은 그 이름.
‘기사왕 빌헬름······!’
······ 마계의 천적 빌헬름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묶어도 별의 폭주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흐람은 비웃었다.
멍청한 놈.
아무리 긴고아로 자신을 속박해도 검게 물든 별은 돌아오지 않는다.
별의 폭주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거슬린다, 까악.”
“······ 뭐냐, 네놈은.”
멸악의 거인.
그 역시 당황했다.
갑자기 아흐람이 봉인됐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시체 까마귀가 나타났다.
유일 등급의 신비를 없애고, 아흐람까지 봉인한 정체불명의 시체 까마귀.
“살 좀 빼라, 까악. 몸이 그게 뭐냐, 까악.”
“나보고 살을, 빼라······?”
멸악의 거인에게 살을 빼라고 말하는 겁대가리 없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다 죽었으니까.
자신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간 있어도 없어질 테니까.
“이게 여신의 별이냐, 까악?”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시체 까마귀가 말했다.
아흐람이 봉인되자 놈의 몸에서 폭주하는 검은 별이 분리되었다.
멸악의 거인이 혀를 찼다.
“죽으러 들어왔구나, 멍청한 놈. 백왕과 함께 피했으면 됐을 것을.”
“이 별을 진정시키면 되는 것 아니냐, 까악?”
“별 수호자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네깟 저주받은 까마귀가 성스러운 별을 건드렸다간 그대로 활활 불탈 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다.
처음 드라무트를 만나고 떨어진 빌헬름의 별을 챙길 때, 녀석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비키라고 했다, 까악.”
“······.”
멸악의 거인이 살짝 몸을 들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멸악의 거인이 비키자 블랙홀 같은 검은 구역이 드러났다.
손을 대면 빨려들어가거나 거인의 말마따나 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떠오르며 폭주하는 검은 별을 향해 주저없이 손을 뻗었다.
‘네가 나를 찾고 있었구나.’
그리고 별에 손을 댄 순간,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나를 찾고 있던 별은 이것이 맞았다.
온천에서부터.
아니, 훨씬 전부터.
여신 피나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음······!”
이윽고 여신 피나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기사왕 빌헬름.
그가 마왕에게 붙잡혔다.
그는 진정으로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였기에.
여신의 도움 없이 홀로 저 자리까지 선 대영웅이었으나, 마왕은 여신의 이권 없이는 멸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
“괴물같은 놈. 아무런 여신의 ‘이권’도 없이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이야.”
마왕이 진절머리를 치며 말했다.
자신을 이 정도로 몰아붙인 상대는 처음이었으니.
완전히 넝마가 됐다.
몇 번이고 부활할 수 있는 ‘파괴불가’의 신체를 짖이겨놨다.
불사신의 권능마저도 넘어서는 격을 놈이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너의 패착이다.”
허나 괜찮다.
육체는 죽었으나, 마왕의 본질은 죽지 않으니까.
여신의 권능 없이는 자신을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니까.
차라리 잘됐다.
이 괴물 같은 놈의 육신을 차지하면, 마왕은 지금보다도 더 강해지리라.
마왕의 본질이 빌헬름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안 돼!
천공의 여신 피나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빌헬름이 마왕에게 몸을 빼앗긴다면 이 세상은 끝난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연결된 모든 차원들이 저 멸망 앞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설마 빌헬름이 마왕까지 위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신의 이권 없이 저 정도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이건 빌헬름이 대단한 게 아니다.
빌헬름을 움직이는 존재.
저 세상과 연결 된 ‘그’가 빌헬름이 한계를 넘어 움직일 수 있게끔하고 있었다.
이토록 빌헬름을 완성시킨 것 역시 ‘그’였다.
-미안해요.
결국, 피나는 빌헬름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마왕에게 모든 별과 함께 살아있는 육신을 빼앗겼다간 영영 기회를 잃을 것이다.
저 너머에 있는 ‘그’ 역시 기회를 박탈당하리라.
하지만, 완성된 존재인 빌헬름을 죽이는 건 그녀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여신이라 할지라도 빌헬름은 멸망과 맞서서 이긴 존재.
피나는 빌헬름의 생명을 빼앗는 대신 자신의 육신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지고하며 위대한 존재이시여, 부탁드립니다.
여신 피나의 육체가 부서지고 별이 되어 떨어진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마지막 ‘기회’는 생겼으니까.
여신 피나 역시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여신 피나는 부디 빌헬름을 움직인 ‘그’가 판게니아를 사랑하는 자이기를 바랐다.
‘그’보다 명예롭고 위대한 존재는 없었기에.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 높이 뛰어넘어주기를.
모든 세상을 이끌어줄 존재이기를 염원하고 또 염원했다.
*
기억의 회상.
여신 피나의 몸이 흩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염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결국 모든 시작과 끝은 빌헬름이었다.
기사왕 빌헬름의 죽음으로부터 이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빌헬름의 생명을 빼앗으며 여신 피나 역시 부서졌다.’
그저 블루스크린 끝에 게임을 다시 시작한 게 전부가 아니었던 게다.
그게 가능했던 건, 피나 덕분이었다.
만약 여신 피나가 자신을 희생하며 빌헬름을 죽이지 않았다면 내게 재도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문제는 피나가 희생하며 남긴 별이다.
‘마왕이 피나의 별을 취했나보군.’
빌헬름의 온전한 몸과 다섯 개의 별대신, 피나의 육체를 취하고 부쉈다.
그리하여 마계를 재건한 뒤 지구를 침략하려 하고 있다.
본래 마계는 절반이 부서진 상태였으나, 피나의 별에 의해 수복 속도에 탄력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별의 폭주가 사그러듭니다.》
《‘메인 퀘스트 ???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메인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긴고아로 봉인만 했음에도 ‘제거’로 쳐주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의아한 건 주변의 시선이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까악?”
모든 별 수호자들이.
심지어 백왕과 사주력들마저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놀란 것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별 수호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별 수호자?”
“시체 까마귀가 별 수호자라고?”
뭐? 별 수호자?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하지만 별 수호자란 늠름한 신화종이나 강력한 환상종밖에 없었다.
그 외에 별 수호자는 본 적조차 없었다.
쿠릉!
그 순간 멸악의 거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멸악의 거인은 나를 내려다보며,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곤 말했다.
“······ 새로운 별 수호자가 탄생했다.”
고유 스킬 강탈
디맨션 워리어.
타차원에서 지구를 지키고자 건너온 위대한 전사들.
그들은 이번 침략에 대해 몇 번이고 경고해왔다.
-머지않아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될 겁니다.
-앞으로 한 달 안으로 시작됩니다. 오직 우리 디맨션 워리어만이 여러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부는 협력하십시오. 멸망에 대비해야 합니다!
타차원의 침략에 의해 세계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협력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
앞선 두 차례의 침략이 가져다준 여파의 탓일까. 디맨션 워리어들이 경고한 ‘본격적인 침략’에 하나, 둘 그들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미지의 공포가 실질적인 위협을 해오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됐다.
하늘에 떠오른 타차원의 세상.
전세계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현상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거 나만 보임?
-세계 멸망각ㅋㅋㅋ
-누가 제발 CG라고 해줘!
-와········· 미쳤네.
-신께서 노하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세상은 난리가 났다.
이윽고 하늘에 거대한 검은색의 차원 균열이 열리자 ‘타차원 커뮤니티’ 역시 문의가 폭주하고 있었다.
-하늘에 떠오른 검은색의 원형들이 뭐죠?
-이제 저기서 괴물들이 쳐들어오는 건가요?
-제발 저희를 지켜주세요!
-마스터! 마스터는 어디 계시나요?
-다른 8영웅들은요?
마스터를 비롯한 ‘8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나서자 수많은 방송국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차원 균열이 열린 순간 8영웅들은 솔선수범하여 ‘강림’한 뒤 이제 곧 쳐들어올 적들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타차원의 침략으로부터 여러분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있는 한, 세상은 안전합니다!”
방송국에 비춰지는 다수의 영웅들은 스스로 구원자를 자처했다.
강림하자 황금빛이 감돌며 변신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신화나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전사들 같았다.
늠름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무기를 든 채 대비하는 모습.
그들은 그저 겉모습만 치장한 가짜가 아니다.
혼자서 산을 옮기고 부수는 괴물들조차 두려워하는 진짜배기 괴물이었다.
슈퍼 히어로가 실제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믿습니다!
-멋지다!
-막심! 날 가져요!
이제 침략이 실제로 진행만 된다면 그들의 위상은 하늘을 뚫어버릴 터였다.
8영웅들은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