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마물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견이 있을 수가 없는 완벽한.
“······ 지금은 인간이지 않느냐.”
“까다로운 놈이로군.”
꿀꺽!
다시 핵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전신에 뼈와 살이 입혀지고 깃털이 돋아났다.
순식간에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된 나를 보며 드라무트가 움찔거렸다.
“어, 어떻게? 인간이 어떻게 마물의 모습을?”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다, 까악.”
“인간도 마물도 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고······!”
단순한 변장 수준이 아니라, 그냥 마물 그 자체가 됐다.
고룡이 폴리모프를 해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순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위대한 마법사라도 완벽한 마물이 될 순 없었다.
그저 흉내를 낼 뿐이지.
처음부터 모르고 보면 착각할 수도 있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변한다면 그 미묘한 이질감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별이 안 된다. 한 치의 이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의 법칙과도 같은 것을 눈앞의 남자가 깨트린 것이다.
“드라무트, 까악. 알고 있는 걸 전부 불거라, 까악.”
“······ 까악거리면서 명령하지 마라.”
차라리 인간인 게 낫다.
시체 까마귀가 까악대며 명령하는 꼴을 보느니, 재수는 없어도 인간의 모습으로 말을 하는 게 모멸감은 덜했으니까.
*
드라무트는 알고 있는 걸 전부 토해냈다.
별 수호자들이 크람델에 모인 이유.
그 이유는 33번째 별 때문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크람델의 변화는 1년 전부터 존재했고, 별 수호자들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곳을 찾은 건 아예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곳에 있는 별은 기존 대륙에 존재했던 32개의 별과는 완전히 다른 별이다.”
“여신의 시체가 별이 된 것 아닌가? 아예 다른 별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을 텐데?”
당연한 의문이었다.
애초에 죽은 여신의 시체를 별이라고 돌려 부른 것뿐.
그렇다면 여신의 신체가 아닌 것은 별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32개의 별이 된 여신은 여신 레아다. 하지만 그녀에겐 쌍둥이 동생 피나가 있었다.”
“어디서 본 설정 같군.”
“설정?”
“아니다. 계속 말해봐라.”
판게니아의 태초에 관련된 설정엔 별 흥미가 없었다.
대충 흘겨 넘기긴 했지만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기는 했다.
드라무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여신 레아는 땅을 만들고 여신 피나는 하늘을 만들었다. 그러나 태초의 ‘멸망’과의 전쟁에서 레아는 죽었지. 하지만 여신 레아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몸을 32개로 나누어 대륙에 흩뿌려놓았다.”
그게 바로 32개의 별이다.
인간이 초월하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것.
게이머들, 플레이어들은 그 32개의 별을 두고 경쟁해왔다.
자격을 갖춰도 별을 찾지 못하거나, 남은 별이 없다면 초월할 수 없다.
하지만 별을 가지고 초월한 자가 죽으면 별은 다시 대륙으로 떨어진다.
실제로 ‘초월자 사냥’이 심심찮게 이루어지는 이유였다. 빌헬름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 어중간한 초월자는 거대세력의 먹이가 되곤 했으니까.
‘그래서 랭커일수록 세력이 중요했지.’
게이머들이 연합하고 뭉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게임을 진행한 나는 그런 연합들과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몇몇 초월했던 캐릭터들이 그들에 의해 죽기도 했고.
드라무트가 계속 말했다.
“대륙 전체가 심연에 먹히기 전에 피나는 남아있는 대륙을 떠올렸다. 잠식되지 않은 땅은 서로 끊어졌으나, ‘워프’에 의해 연결될 수 있었지. 모두 여신 피나의 덕분이다.”
대륙이 끊겨져있는 이유.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워프를 타야만 하는 세계관의 설정이었다.
실제로 지금 대륙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모두 하늘에 떠 있다.
본래의 지상에는 심연이 자리하고 있고.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그곳이 마로 ‘마계’였다.
쌍둥이여신 피나가 아니었다면 멸망에 의해 모든 대륙이 멸망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종합해보면 그 고마운 여신 피나가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
“······ 모르겠다. 그래서 별 수호자들이 급히 모인 거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거지?”
“별의 주변으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장막의 ‘신비’가 펼쳐져 있다.”
백왕도 이야기했다.
유일 등급의 신비가 펼쳐져 있다고.
그래서 자신이 안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고.
“그 신비를 없애기만 하면 되나?”
“신비를 어떻게 없앤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없앨 수 있더라도 신중해야 한다. 신비를 펼쳐놓았다는 건 어떤 존재가 별의 근처에 있다는 뜻이니까.”
신비란 증명이다.
길가에 치이는 돌멩이가 신비를 가질 순 없다.
살아있는 것.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에게만 신비가 부여된다.
유일 등급의 신비가 펼쳐져 있다면, 그만큼 강력한 존재가 그 안에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별의 근처에서 그만한 신비를 펼쳐놓았다면, 별 수호자일 수도 있겠군.”
“······ 가능성은 적다.”
대강 알아들었다.
별의 근처를 가로막은 유일 등급의 신비에 가로막혀 별 수호자들도 전전긍긍하고 있다는걸.
더불어 안에 어떤 존재가 자리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도.
‘아는 게 없군.’
이래서야 나랑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내가 별 수호자들보다 나은 건 분명히 있었다.
“드라무트. 나는 그 ‘신비’를 파괴할 수 있다.”
“하하! 신비는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걸 어찌 파괴한다는 것이냐?”
농담도 적당히 하라는 듯 드라무트가 껄껄 웃어댔다.
명백한 무시다.
“하물며 유일 등급의 신비다. 이곳 크람델의 주인인 백왕도, 가장 강한 별 수호자도 포기한 일을, 네가?”
“신비의 관 앞에서 내가 이무기의 신비를 없앴다는 말은 못 들었나?”
“제법 시끌벅쩍하긴 했지. ······잠깐. 그게 너라고?”
일순간 드라무트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아무리 크람델의 일에 관심없는 별 수호자들이라고 해도, 한참이나 시끄러웠던 신비의 관에 대한 이야기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웬 시체까마귀 하나가 이무기를 무릎 꿇리고 사주력과 함께 백왕을 만나러 갔다는 게······.”
“나다.”
“······.”
드라무트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소란의 주인공이 시체 까마귀였다.
이무기의 전설 등급 신비를 파괴했다는 이야기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별 수호자들 모두가 우스갯소리로 치부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당사자가 지금 눈앞에 있다.
자신이 수호하는 별의 주인, 란돌프.
놈은 시체 까마귀인 척 신비의 관에 들어가 크람델을 뒤집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33번 째 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 진짜로 없앨 수 있나?”
“당연.”
즉답.
드라무트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정체를 모를 이상한 놈이었다. 이상한 놈이지만 생각해보면 처음 별을 가져갈 때도 아무런 시련없이 여신에게 선택되지 않았던가.
자격 없는 자가 별에 손을 대면 전신이 타버리기 마련인데, 란돌프는 그저 손을 대자 별의 주인이 됐다.
만에 하나 정말로 란돌프가 저 장막을 없앨 수 있다면, 이건 대사건이다.
‘내 위상 또한 높아지겠지.’
별 수호자들 사이에서 찬밥신세인 자신의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할 건 당연지사.
가장 강한 별 수호자도 해내지 못한 일을, 드라무트가 주도하며 끝내는 것이다.
문제는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였다.
“장막의 근처에 다가가면 별 수호자들이 알아차릴 것이다. 몰래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모든 별수호자가 보든 앞에서 행해야한다. 다만······ 실패하는 순간 죽을 각오를 해야할 거다.”
별 수호자들은 여신과 별에 관련된 모든 것에 진심이다.
허락받지 않은 이가 별의 근처에 다가가는 걸 결코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만에 하나 허락한다고 해도, 실패할 경우 목숨을 담보로 잡을 것이었다.
“별 일 아니군.”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드라무트는 더욱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장막 앞에 데려다놓는 일뿐이다. 네 목숨까지 지켜줄 순 없다.”
“그거면 충분하다.”
역시 드라무트를 찾아오는 게 정답이었다.
멋대로 갔다간 몰려드는 별 수호자들에게 그대로 죽을 뻔했다.
백왕이 다녀간 것도 아는 걸 보면, 별의 근처로 몰래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듯 보였으니.
“좋다. 기다려라.”
드라무트가 방을 나섰다.
다른 별수호자들을 설득하러 나간 것이다.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놔야겠다.
‘백성전의 성좌들. 그들이 직접 내건 보상.’
메인 퀘스트 5를 클리어하며 얻은 보상목록.
나는 아직 보상을 선택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성좌들. 그들을 위주로 살펴봐야겠다.’
우호적이었던 만큼 쓸모있는 보상을 내걸었을 확률도 높을 테니.
500점이라는 압도적인 점수를 이룩하며 나온 보상이다.
그 하나하나가 하늘과 땅을 울릴 보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내가 쓸 수 없으면 쓰레기와 같았다.
아무런 생각없이 골랐다간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시계태엽의 성좌의 모래시계》
《모험의 성좌의 반지》
《행운의 성좌의 네잎클로버》
《전투의 성좌의 창》
《영월의 성좌의 갑옷》
《연금술의 성좌의 발명품》
《이름 없는 성좌의 머리카락》
《대장장이 성좌의 무기도면》
······.
보상 목록을 띄운 이후, 나는 신중하게 성좌들이 내건 목록 중 하나를 선택했다.
*
온천의 지하.
온천수가 흐르는 지하 땅굴에, 광범위한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저 시체 까마귀가 정말 ‘신비’를 없앨 수 있다는 건가?”
“허언이라면 드라무트, 너에게도 책임이 따를 것이다.”
열에 달하는 별 수호자들도 모여있었다.
그들이 못마땅해하며 바라보는 인영은 단 하나.
시체 까마귀의 왕.
장막 앞에 선 시체 까마귀의 왕이 정말로 ‘유일 등급’의 신비를 없앨 수 있는 것인지 모두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별 수호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 백왕과 사주력.”
“네놈들이 이곳에는 왜?”
별 수호자들이 더욱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왕과 사주력이 모두 자리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백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땅에 내가 발을 딛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한 번은 봐줬다만, ‘별’의 근처에 다시 얼씬거리면 전쟁이라고 했을텐데?”
가장 강한 별 수호자 ‘멸악의 거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거인족이며, 거인족은 여신의 수호를 자처하는 지상 최강의 종족이었다.
“그냥 구경이 하고싶을 뿐이다. 이조차 마음에 안 든다면 피를 볼 수밖에.”
허나 백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 시체 까마귀가, 정말로 ‘유일 등급’의 신비를 파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오주력의 발표를 하기도 전에 처리하려 들 줄은 몰랐다만.’
그 행동력 하나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별 수호자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역시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역시 신비의 파괴다.
유일 등급.
백왕도, 다른 별 수호자들도 저 신비에 막혀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흠.”
······그리고 그들의 시선 앞에서, 나는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 펼쳐진건 확실히 신비가 맞았다.
문제는 신비가 내게 보여주는 문구였다.
【제 1의 벽(유일 등급 신비)】
【판게니아 붕괴까지 9.96%】
【첫 번째 ‘차원 균열’ 시작까지 0.04%】
【붕괴가 10%에 다다르면 ‘제 1의 벽’이 소멸됩니다.】
【‘제 1의 벽’ 소멸 시 지구와 이어지는 ‘첫 번째 차원 균열’이 생성됩니다.】
【‘메인 퀘스트 ??? : 차원 균열의 왕 제거하기’가 곧 시작됩니다.】
동시에, 장막 안의 무언가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별이었다.
검게 물든 별을 손에 쥔 차원 균열의 왕!
그리고 차원 균열의 왕이 이끄는 수많은 악몽들이 장막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 ???
다른 놈들은 저게 안 보이는 건가?
신비에 대한 설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장막 안에 있는 악몽들의 숫자는 이곳 크람델에 모인 괴물들의 숫자보다 많았다.
하물며 검은 별을 든 ‘차원 균열의 왕’은 확연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나만 보이는 모양이군.’
봤다면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나를 구경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내가 플레이어여서인지는 몰라도 저 내용과 신비 안의 괴물은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제 1의 벽.
‘저게 첫 번째 차원균열.’
붕괴율이 10%를 달성하면 제 1의 벽이 소멸되고, 차원균열이 열리며 지구로 향한다는 말.
처음 판게니아에 소환되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강조하던 ‘균열’이 바로 저것인가 싶었다.
본격적인 침략과 침식의 시작.
‘왜 크람델 지하에 있는 거지?’
저많은 악몽들이 왜 하필 크람델에 있는 걸까.
지하온천수에 여신의 눈물이 흐르게 만든 건 틀림없이 별이다.
검게 물든 저 별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온천수를 적셔 크람델을 부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저 별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아이작을 만나면서 온천수에 들어갔을 때.
<‘눈 먼 여신의 손’이 당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눈 먼 여신의 손이 나를 찾는다며 온천수를 폭발시켰다.
의아한 일이다.
여신과 딱히 친하게 지낸 기억은 없었다.
5성급으로 초월한 빌헬름이야 별을 다섯 개나 가졌으니 ‘여신의 기사’라고 불렸을뿐이지 따로 접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되자 묘하게 여신이 나한테 집착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면 저 별은 나와 관계된 것인가?
확실한 건 신비를 지우는 순간 수많은 악몽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리란 것이었다.
‘······ 어차피 0.04%남았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실행은 된다.
붕괴율이 올라가는 기준을 모르니 막을 방도도 없었다.
지금 속도로 보건대 아무리 늦어도 1주일 안쪽으로 10%를 달성하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겠군.’
생각을 달리한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차원 균열을 기다리는 것보단, 원하는 타이밍에 열어서 공략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니, 그게 무조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