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백왕의 앞에서 저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사지를 찢어죽여도 모자란 놈이었다.
제아무리 신화의 관을 통과했다고는 하나, 고작 그러한 업적 하나로 백왕과 대등해질 수는 없는 노릇.
백왕이 이룩한 신화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승부수는 던졌다.’
이제는 진짜 돌이킬 수 없다.
손과 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허세지만 백왕 역시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이미 한 번 무시했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으니까.
사주력도, 그리고 백왕도, 모두 빌헬름에게 죽기보다 더한 수모를 겪었으므로.
백왕이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작게 미소지었다.
두 시선이 허공에 부딪히고 격렬하게 튀며 스파크를 내는 듯했다.
“재밌군.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겠지.”
이윽고 백왕이 수긍하자 사주력들의 시선이 다시 바뀌었다.
고작 시체 까마귀에게 백왕이 저런 말을 내뱉다니!
백왕은 절대로 허언하지 않는 절대자다.
그가 그렇게 보았다면, 그게 맞을 터였다.
말인 즉.
‘백왕은 시체 까마귀를 자신과 동격으로 보고 있다······.’
사주력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생각이 들이찼다.
동격.
단순한 시체 까마귀가 아닌, 진짜 초월종이라고.
“나도 소란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까악.”
······여기선 한 발 물러설 때다.
백왕이 양보했다.
아마도 최대치의 양보를.
만약 한 발 더 나아가면,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면 아마 시작된 줄도 모르고 죽는 건 나일 터.
이만한 공방이면 충분하다.
더 딛는 건 연기에 잠식되어 늪에 빠지는 길이었다.
“대신 ‘별 수호자’들이 찾고 있는 것, 저 궁극의 신비 너머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낸다면 그게 무엇인지 내게 알려줄 수 있나?”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 까악?”
“그 이상은 나도 욕심부리지 않는다. 다만, 궁금할 뿐이다. 또 다른 별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단순히 그뿐이었다.
궁금증.
그 하나로 그는 내게 감투를 씌워주었다.
사소한 분란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깔끔하게 해결된 편이었다.
“란돌프가 오주력이 되는데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백왕이 사주력을 둘러보았다.
“반대합니다.”
“저 역시.”
대토룡과 궁기가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가 두표.
“그럼 찬성하는자는?”
“아무래도 같은 계열이다보니.”
“······.”
사왕과 메두사는 찬성하고 나섰다.
같은 계열.
시체를 다루는 자라는 의미일 터였다.
그리고 메두사는, 가까이서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찬성한 것이겠고.
“찬성 둘에 반대 둘이라.”
백왕은 재밌다는 듯 한차례 크게 웃었다.
하기야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일급 신비까지 파괴할 수 있는 존재라면, 적으로 돌리기엔 아쉽지.’
솔직히 반신반의였다.
정말 저 시체 까마귀가 유일 등급의 신비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유일이라 이름 붙은 모든 건 백왕도 쉬이 여길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실패하거든 딱 거기까지다.
신비의 끝을 보고서도 그게 불가능하다면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정말로 시체 까마귀가 유일등급의 신비까지 파괴할 수 있는 게 확실시 된다면, 백왕으로선 그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크람델이 사라질 거라는 그가 내뱉은 말이 허언은 아니라는 증거일 테니까.
거기에 꽉막힌 별 수호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자를 가까이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지켜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결정났군.”
백왕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로써 찬성 셋, 반대 둘.
“란돌프. 그대는 지금부터 오주력이다.”
······그렇게.
정말 뜬금없이, 나는 오주력이 되었다.
크람델의 실질적인 지배자들 중 하나.
괴물들의 정점에 선, 시체 까마귀가.
*
백왕이 떠나간 자리.
사주력들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오주력이여. 한동안은 내 성에서 같이 지내도록하지. 그대를 위한 성은 따로 건축해야할 듯싶으니.”
그때 사왕이 다가왔다.
죽은자들의 왕.
네크로벨리의 주인이자,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놈.
거대한 해골로 이루어진 거체. 거인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순도높은 마력이 느껴진다.
검은색의 로브는 척 보기에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그는 내가 오주력이 되는데 찬성표를 던졌다.
적어도 당장은 ‘적’이 아니라는 증거.
“사양하지 않겠다, 까악.”
“음. 내일 아침에 새로운 주력의 탄생을 발표할 거다. 그때까지 그대는 손님의 신분이니, 내가 수행하도록 하겠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나?”
사왕의 에스코트라니.
이건 좀 귀했다.
‘마침 잘됐군.’
처음부터 나는 사왕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왕이 친근한 척 굴어준다면 더 깊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죽은 자들의 왕이라면 그에 준하는 ‘실험’도 하고 있겠지, 까악?”
“당연하다. 시체의 실험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의미니까.”
“그럼 그대의 ‘실험실’을 한 번 보고싶군, 까악.”
“······ 환영한다.”
사왕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을 다루는 자. 그에 준하는 실험은 다른 주력들도 혀를 내두를만큼 ‘악취미’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감해줄 수 있는 같은 계열의 강자는 없었다.
너무 약한 놈들은 이해하는 척을 할 뿐이고, 강한 놈들도 자신의 예술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놈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과연 이 시체까마귀는 어떨지.
“그럼, 같이 가지. 나의 안식처에.”
*
백왕전 앞에서 아이작과 이자벨라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친······ 백왕이라니.’
특히 아이작은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마 백왕을 직접 알현하러 갈 줄이야!
이곳 크람델에 있는 괴물 대다수가 평생 백왕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는다. 크람델에 1년간 있었지만 아이작 역시 백왕을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고작 이 짧은 시간만에, 성각자는 백왕을 직접 보러 들어갔다.
‘꿈이겠지?’
뺨을 잡아당기자 알싸한 고통이 전해진다.
이 아픔이 꿈일 리는 없으니 현실일 것이다.
온천에서 성각자를 만나, 사주력과 함께 백왕전까지 오게 된 이 모든 게.
‘······지금이라도 튀어야 한다. 백왕을 만나고 살아 돌아올 리가 없어.’
현실이라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주력은 몰라도 백왕은 냉정한 괴물이다.
넘을 수 없는 벽.
심연의 지배자들도 피하는 게 백왕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하지만 진짜 미친 일은 이 다음에 일어났다.
“······!”
아이작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백왕전을 나서는 두 인영이 보인 탓이다.
‘사, 사왕!’
사왕!
사주력 중 하나이나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며 무서운 자다.
영혼과 시체를 모두 빼앗아 종으로 부리는 괴물 중의 괴물.
한 번 잡히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 전해지는 그 괴물이, 성각자와 함께 있었다.
“내 안식처를 보면 그대도 만족할 것이다.”
“기대되는군, 까악.”
“기대해도 좋다.”
······ 그것도 왠지 모르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 느낌으로.
역시 꿈이다.
현실이라면 저 둘이 저렇게 친근하게 길을 걸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성각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둘도 따라와라, 까악.”
······ 빌어먹을.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대격변 탈리스만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얌전히 크람델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것도 문득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자신은 폭풍의 눈에 들어와 버렸다. 대격변 탈리스만을 받는 순간, 자신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여, 아이작은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내일 뜨는 태양을 볼 수 있기를.
*
사왕의 실험실.
그의 성 지하에 존재하는 비밀구역.
그곳에 들어선 아이작은 그 즉시 코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웁······!”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냄새도 냄새지만.
‘살아생전 처음 보는 악질적인 취미다.’
온갖 시체가 온갖 형태로 모여있었다.
천장에 걸려도 있고, 벽에 꿰여도 있고, 바닥에 널려있기도 했다.
감정표현이 없는 이자벨라도 은은하게 이맛살을 구길 정도였다.
끔찍한 수준을 넘어섰다.
“멋지군, 까악.”
······ 저게 멋지다니?
그런데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성각자의 말투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 보이나?”
“예술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까악.”
“하하! 역시 같은 계열이라 그런지 볼 줄 아는군. 특별히 원하는 작품이 있다면 하나 내어주지.”
작품?
‘이게 작품이라고?’
이 시체들이?
아이작은 도저히 저 둘의 예술 감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에 공감하며 웃고 떠드는 건지도.
그윽.
그으으윽.
게다가 시체인 줄 알았던 것들은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
살아있는 것이다.
‘언데드 소굴이군.’
아이작이 살면서 본 끔찍한 장면 중 단연코 첫 번째였다.
대체 성각자는 이곳을 왜 온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서 이자벨라를 쳐다보자, 이자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얌전히 따르라는 것이다.
그때, 성각자가 실험실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것도 줄 수 있나, 까악?”
순간, 사왕이 멈춰섰다.
여태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마치 삭제되다시피 증발했다.
란돌프가 가리킨 것.
시체 까마귀가 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은.
사왕이 가장 아끼는 보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그대는 진짜로 볼 줄 아는 모양이로군.”
사왕의 말투가 사뭇 진지해졌다.
여태까지는 떠보는 연기였다는 듯이 진중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시체의 예술가들도 자신의 예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는 척을 하거나, 두려움에 억지로 맞출 뿐.
그리고 그런 자들은 즉시 눈을 도려냈다.
눈앞에 환상적인 예술을 두고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죄악이다.
제대로 예술을 볼 수도 없는 놈들이 눈을 달아서 어디에다가 쓰겠는가.
시체 까마귀도 당연히 그런 부류 중 하나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백왕에게 인정됐다고 해도, 예술은 아예 다른 영역이었으니까.
‘설마 단번에 저걸 골라낼 줄이야.’
처음부터 다른 건 관심도 없었다.
란돌프는 그가 가장 아끼는 예술 작품을 골라냈다.
볼 수 있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시체 까마귀는 정말로 자신의 예술을 알아본 것이다. 예술을 아는 것이었다.
벽에 묶여있는 시체.
인간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목 위에 얼굴이 없었다.
허나 저건 자신이 만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실험체였다.
외관은 평범하나 사왕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저것은 내가 만든 최고의 예술이다. 한때 엘드 리치였던 인간을 잡아서 만들어냈지. 그 가공할 저주를 품은 육신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재료였으니.”
사왕의 자랑스럽기 그지 없는 말투.
쿵! 쿵! 쿵!
그때였다.
진동과 함께 시체의 주변으로 갑옷이 입혀진다.
엄청난 저주와 마력을 발산하며 그 존재는 봉인구를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크흐흐. 역시 내 최고의 걸작이다. 군마의 봉인구마저 깨트리려 할 줄이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한발 늦었군.’
앤드류 사제의 딸.
저 봉인구에 묶인 시체가 바로 안다사르다.
······ 안다사르는 이미 목 잘린 언데드, 듀라한이 되어있었다.
불가침
2년 전, 백왕 사냥을 나섰을 때.
그때 이미 나는 사왕이 안다사르를 실험체로 잡아들인 걸 알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특수한 이벤트 같은 것인 줄 알았지.’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의해 엘드 리치가 된 안다사르가, 사왕의 실험체가 되어 특별한 이벤트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사주력을 무릎 꿇리고 백왕을 유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온 정신은 백왕에게 향해 있었고 앤드류 사제도 딸을 찾아달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얼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이 없다.
듀라한. 목 잘린 기사라고 불리는 언데드. 사왕에 의해 강화되었으니 그 강력함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문제는 목 위의 부위였다.
쿵! 쿵! 쿵!
봉인구를 부수고 속박을 풀려는 듯 안다사르의 육체가 몸부림을 쳤다.
“보다시피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았다. 나 역시 내뱉은 말이 있으나, 미완성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왕은 기꺼이 선물을 주려고 했다.
안목이 있는 같은 예술가끼리의 인사 선물로써.
하지만 이 듀라한은 미완성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