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백왕이었다.
북부의 수호신.
빌헬름으로 죽이지 못한 유일한 괴물이니까.
‘할만해.’
생각을 바꾼다.
생각을 바꾸면 몸이 반응하게 되고, 몸이 반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주력을 속였다. 백왕이라고 속이지 못할까.
위축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감정을 잡아준다면, ‘영원의 란돌프’는 내 행동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리게 만들어주었다.
거기다가 언제든지 신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도 나름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무기의 신비를 파괴한 뒤 사주력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답이 나온다.
‘경계하고 있다.’
나를.
단순히 경각심을 세우는 정도가 아니라, 나 자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신비를 파괴한다는 건 그들에게도 생소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런 게 가능한 초월종이라면 더 대단한 일도 서슴없이 해내리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자신들을 죽이는 것조차 말이다.
‘강력한 괴물일수록 신비가 가지는 영향 또한 크다.’
물론, 이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과 괴물의 신비는 아예 쓰임새가 다르다.
인간은 이름을 자신의 증명으로 사용하듯, 괴물은 신비를 자신의 증명으로 사용한다.
인간에게 신비는 단순한 위치의 증명이지만 괴물에게 신비는 모든 것이었다.
일반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 따위를 가르는 것도 신비의 유무다.
게임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생긴 괴물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똑같이 생긴 괴물이더라도, 이펙트에 따라 더욱 강력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단순히 이펙트만이 아니라 보스 특유의 추가 효과를 가져다주는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신비가 없다면 구분이 안 되는 괴물이 태반일 테니.
‘손을 하나 자르고 시작하는 것과 같지.’
괴물에게 신비를 없앤다는 건 그런 뜻이다.
손 하나 없이 싸우는 것과 진배없다.
격이 높은, 강력한 괴물일수록 신비가 가지는 영향 또한 크다.
만약 사주력이나 백왕 정도의 괴물이 지닌 가장 급 높은 신비를 파괴한다면, 그 자체로 레벨다운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시체 까마귀로군.”
······ 그 순간이었다.
찰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느덧 백왕이 내 앞에 나타났다.
백호의 가면을 쓴 2m의 체구에 달하는 반인반마.
건장한 몸과 하얀 털, 꼬리와 귀를 보건대 이놈은 백왕이 맞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리는 안 지른 것 같다.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지만, 다행히 착각이었다.
확실히 여기는 사지(死地)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목이 잘리는 것도 모른 채 죽으리라.
그도 그럴 게.
【Lv. 15】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으니까.
‘···원래 이렇게 레벨이 높았던가?’
심지어 백왕은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도 아니다.
그보다 위다.
마왕과 비슷한 격의, 마땅히 정해진 이름조차 없는.
그리하여 게이머들이 ‘끝판왕’, 혹은 ‘네임드 보스’라고 불렀던 존재.
백왕의 레벨은 나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에도 관련된 정보가 없었으므로.
애당초 빌헬름으로 제압하는 것도 실패했지 않나.
허나, 뻣뻣하게 고개를 든 채 나는 모습을 드러낸 백왕과 눈을 마주했다.
‘먹힌다.’
놈과 마주한 순간 확신했기 때문이다.
‘히든 특성이 통한다.’
생각보다, 떨리지 않는다.
본래라면 모조리 간파당한 뒤 목이 잘려야 했음에도.
히든 특성으로 인한 효과가 백왕에게도 통한다는 말이다.
백왕은 나를 간파하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것은 히든 특성으로 인한 ‘철면피’ 역시 가능하다는 뜻이다.
<‘거인의 항마력’이 ‘백왕의 눈’을 상쇄합니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백왕의 기세’를 상쇄합니다.>
“······ 예의가 없군, 까악.”
단순히 떠보는 걸 넘어 스킬을 사용했다.
나를 간파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히든 특성은 백왕의 스킬조차도 무력화시켰다.
인상을 구기며, 명백하게 기분이 나쁨을 표현하자, 백왕의 눈에 이채가 떴다.
동시에 사주력의 동공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백왕의 앞에서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시체 까마귀 따위가 거침없이 ‘예의’를 운운하는 게 많이 아니꼬운 듯싶은데.
“음. 확실히 이상한 녀석이다.”
백왕은 솔직하게 나에 대한 평을 내놓았다.
이상한 녀석이라.
‘충분하다.’
그 정도 평이면 아주 양호하다.
백왕은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다. 그야말로 예측 불가. 한 달 동안 쫓았던 이유가 있다.
그런 놈이 ‘이상한 녀석이다’라고 평했다면, 이는 놈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화의 관을 통과했다고?”
“별거 아니더군, 까악.”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정말 별거였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굳이 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의 시련이 있었단 말인가?”
백왕이 턱을 쓸었다.
혼잣말이다.
혼자서 되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백왕. 그가 도전을 포기한 네 번째는 완성의 관이었다.
신화가 완성되는 단계. 헌데, 그 이상의 시련이 더 있었음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 그걸 대체 어떻게 깬 거지?”
백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도전한 신화의 관은, 깨라고 만들어놓은 게 아닌 괴이한 난이도였다.
세 단계의 시련을 마쳤으나 백왕은 확신했다. 네 번째의 ‘완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탑이 그렇게 안배해 놓은 것이라고.
그런데 눈앞의 시체 까마귀는 ‘완성’을 넘었다.
다섯 번째. 초월,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이룩해냈다.
“마지막 시련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
“맨입으로 알려달라, 까악?”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백왕이 나를 만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놈은 철저하게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놈일진대.
‘신화의 관에 대해 미친 듯이 궁금해하고 있다.’
자신이 넘지 못한, 아예 있는지조차 몰랐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그를 이곳에 나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걸 3단계까지 간 백왕이 솔직히 더 대단하다.
나는 꼼수아닌 꼼수로 가능했다지만, 백왕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시련을 받았을테니.
‘진짜 괴물이지.’
동레벨에 달하는 만 마리의 적과 싸우며, 단계를 올릴 때마다 엄청난 특성이 하나씩 추가된다. 그걸 세 단계나 클리어한 건 그나마 백왕이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을 바라나?”
“하나 남은 송곳니를 바란다면, 까악?”
내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부르르르르!
사주력 전원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순수한 분노다.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강하게 나갔나?
“음. 그건 곤란하군. 그런데 내 송곳니가 하나뿐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백왕은 실로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가면을 쓴 건 하나남은 송곳니를 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기사왕 빌헬름에게 뜯긴 송곳니를.
그러나 빌헬름과 사주력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절대로 내가 빌헬름인 걸 알게해선 안된다.’
나는 란돌프다. 철저히 란돌프여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백왕과 사주력은 이번에야말로 사력을 다해서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
“그걸 모를 수도 있나, 까악?”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말.
어정쩡하게 설명하는 것보단 차라리 강하게 나가는 게 낫다.
상상의 영역에 맡기면 제알아서 살을 붙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더 위험하고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게 되리라.
“흐음. 사주력이 내게 데려올만 하구나.”
백왕은 가만히 시선을 겨눴다.
사주력들이 재단하지 못한 존재.
자신의 눈으로도 파악이 안 된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전혀 놀란 기색도, 흔들리는 눈치도, 그렇다고 여유가 없는 것조차 아니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빛.
자신의 송곳니 하나가 없는 것마저 맞췄다.
그의 가면 너머를 간파하는 건 메두사도 불가능한 일이건만.
‘꿰뚫어보는자······.’
신화의 시련에서 끝을 본 자.
과연, 사주력 전원이 이해를 포기한 존재답다.
만약 처음 자신이 나타났을 때 놀라거나 반응을 보였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시체 까마귀는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었다.
심장의 박동은 평온하고 고요했으며, 동공이나 피부의 떨림도 있지 않았다.
‘더 깊숙하게 들어가려면 본체로 변해야만 한다.’
백왕은 잠시 고민했다.
본체로 변신해서 스킬을 사용하면 더 깊은 심연까지 내다볼 수 있다.
그리하면 자신의 마력을 막고 있는 게 저 종의 격 자체인지, 또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의를 운운했다는 건 자신이 은연중 스킬을 사용한 것마저 읽었다는 뜻.
저 시체 까마귀는 스킬의 발동을 파악하는 재주를 지녔다.
게다가.
‘신비를 파괴했다. 신비의 관에서 아예 신비를 파괴할 권능을 준 게다.’
시체 까마귀가 이무기의 신비를 파괴한 걸 백왕은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시 신비의 관에서 얻을 것일 터.
그것은 탑이 저 시체 까마귀를 ‘신비의 제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이겠나.
‘종의 규격 자체가 나보다도 높다는 말이겠지.’
신비는 종의 규격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저 시체 까마귀의 종족값이 자신보다도, 누구보다도 높다는 의미다.
종족값이 높다는 게 강하다는 말과 같은 건 아니지만, 마지막 신화의 시련까지 완성했다면 결코 만만히 볼 놈은 아니다.
백왕은 지극히 강렬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
‘······호승심이라.’
그건 바로 호승심이었다.
자신이 얻지 못한, 달성하지 못한 시련.
그것을 깨고 멀쩡히 자신의 앞에서 패기를 흩뿌리는 자.
몸이 달아오른다.
하지만, 느껴진 건 호승심만이 아니었으니.
‘내가 지닌 신비 또한 두려워하고 있군.’
백왕은 자신의 신비와 완벽하게 합일 되어있다.
다른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연결성.
그것은 마치 피부처럼, 피부의 조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지니고 있는 신비가 저 시체 까마귀를 보자 경직된 채 경고를 보내는 중이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의 출현에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이런 적은 처음이다.
‘실로 흥미롭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눈앞의 시체 까마귀가 확실하게 무언가를 지닌 존재라는 걸.
“이름이 무엇이냐?”
백왕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묻는 저의를 깨닫고, 나는 내심 주먹을 움켜쥐곤 말했다.
“란돌프다, 까악.”
“나를 찾았다고 들었다. 왜지?”
“네가 이곳에 있는 이유와 같다, 까악.”
“내가 크람델에 있는 이유 말이냐?”
“그래, 까악.”
확신했다.
백왕은 크람델에 관심이 없다.
아니, 세상사 자체에 초탈해있다.
크람델이 무너지든 말든,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믿고 따르는 사주력에 때문에 신경 쓰는 척을 해줄 뿐.
그런 그가 지금 크람델에 있었다.
이윽고 백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 33번째 별, 너도 그걸 알아보려는 거였군.”
“맞다, 까악.”
“하지만 별에 대한 권한은 ‘별 수호자’들에게만 존재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별 수호자들에게 관여할 권한은 없다.”
별 수호자.
그것은 별을 수호하는 강력한 괴물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백왕이라 할지라도 별 수호자들과는 아예 선이 그어진 모양이었다. 크람델에서도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크람델의 입구에서 보았듯, 일반적인 괴물들과 아예 취급이 다른 것 같긴 했다.
백왕이 다시 말했다.
“별 수호자들이 정확히 무엇을 찾고 있는 건지 너는 알 수 있단 건가?”
“알 수 있다, 까악.”
오직 나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드라무트.
놈도 여기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빌헬름이 가졌던 다섯 개의 별. 그 별의 수호자들도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곳은 유일 등급의 신비로 막혀있다. 그런데도?”
“쉬운 일이다, 까악.”
신비에 의해 막혀있다니.
백왕도 찾아보려다가 포기한 게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잘됐다.
“······ 좋다. 그럼 임시로 다섯 번째 주력의 자리를 내어주마. 크람델에서 활동하기 보다 편해질 것이다.”
“백왕이시여······!”
사주력들이 깜짝 놀라서 들고 일어났다.
이에 백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내 자리를 내어줄 순 없지 않나?”
“아,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놈에게 오주력의 자리라니, 안 될 말씀입니다!”
대토룡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역시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 밑에 들어가야하는 거지, 까악?”
“너같이 위험한 존재를 그냥 내보낼 순 없으니 말이다.”
오해하지 말라는 듯 백왕이 이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주력은 내 밑의 자리가 아니라 나와 대등한 자격이다. 저들은 그저 나를 존중하는 것일 뿐, 실질적으로 크람델을 이끄는 건 내가 아니라 주력이니.”
동등한 자격이라는 것.
하지만 그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나 같은 자를.
싸우지 않으려면 감투라도 씌워야한다는 의미일 터.
여기엔 내가 거부하면 전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쐐기를 박는 것뿐.
“확실히. 너와 내가 싸우면 크람델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겠지, 까악.”
내가 말하자, 모든 사주력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왕
미치도록 오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