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배가 넘는 격차.
어떻게 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감조차 안 잡히는 신비를 거머쥐었다.
‘팬텀.’
팬텀······.
판게니아의 정점이라 불렸으나 몰락한 그 왕이.
모든 것을 잃고 떨어진 뒤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월스트릿의 가장 높은 건물.
조금 전에 그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뉘어있다.’
차근차근, 마스터는 진정한 왕이 되어가고있었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타차원의 힘. 그 정점에 있는 자가 이 세상의 정점에 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나는 군림하는 자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은 능력이 있는 자들만이 지배하게 되겠지.’
앞으로 세상은 변할 것이다.
이전의 변화와는 완전히 다른 격동의 방식으로.
판게니아의 괴물을 처리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이 지구의 주인이 될 것이었다.
그 시작.
모든 게 완벽했어야할 지금, 마스터는 최악의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 5의 이권이 한 단계 밀린 건 제법 치명적이었다.
‘어찌해야할까.’
그러나 팬텀은 이미 몰락한 왕이다.
마계의 절반을 때려부순 그 공로는 인정하지만, 마스터를 비롯한 최상위의 플레이어들은 마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계와 마왕을 이용해 판게니아에 자리를 잡고, 지구의 왕이 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팬텀은 죽었다.
죽어서 플레이어가 됐다면 강해지는데 한계가 있다.
하물며 팬텀은 세력이 없기로도 유명했으니, 자신들과의 격차를 어찌 따라잡을까.
‘산 채로 잡아서 정보를 뜯어내려 했다만.’
마스터는 몰락한 왕을 산 채로 잡아서 그만 알고 있는 정보를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몇 년간 찾았음에도 도저히 잡히지 않았다.
마스터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
“······ ‘원탁 회의’를 소집해야겠군.”
“8영웅들에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마스터.”
그림자가 사라졌다.
마스터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슬리기 시작하는군.’
슬슬, 거슬린다.
그 몰락한 왕의 행보가.
그러니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
《더이상 탑에서 획득할 수 있는 보상이 없습니다.》
《탑의 보상목록이 백성전 성좌들의 보상목록으로 대체됩니다.》
《100개의 목록 중 한 가지 보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은 탑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신비를 획득했으니, 그를 대체할 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상의 대체?’
하지만 그 다음의 내용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성좌들의 보상목록으로 대체됐다니?
허나 이윽고 떠오른 목록을 보자 절로 이해가 됐다.
《시계태엽의 성좌의 모레시계》
《모험의 성좌의 반지》
《행운의 성좌의 네잎클로버》
《전투의 성좌의 창》
《영월의 성좌의 갑옷》
《연금술의 성좌의 발명품》
《이름 없는 성좌의 머리카락》
《대장장이 성좌의 무기도면》
······.
성좌의 이름이 붙은 100개의 보상목록이 떠올랐다.
‘정확한 보상이 뭔지 알 수가 없군.’
그런데 관련된 능력이나 옵션이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성좌의 이름만을 보고 골라야하는 셈.
‘이건 당장 고를 필요는 없겠지.’
고민을 해봐야할 문제다.
성좌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민 보상.
필시 그 하나하나가 경천동지의 보물일 터.
섣불리 고를 수는 없었다.
‘그보다.’
이미 얻은 건 많았다.
일단,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300시간을 확정적으로 얻었다.
명성도 500이나 올랐다. 명예 관련 퀘스트를 깨봐야 10에서 30사이로 주는 걸 감안하면 500은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수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영원의 란돌프.’
규격 외 등급 신비, 영원의 란돌프!
유일급이었을 땐 내 이름만 붙어있었으나, 규격 외로 격상하자 ‘영원’이란 접두사가 붙었다.
영원이란 이름의 접두사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절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무색, 무취, 무형의 신비.
하지만 나는 분명하게 내게 주어진 신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원의 란돌프(규격외)】
★ 모든 규격을 넘어선 자에게 주어진 신비.
★ ‘영원의 란돌프’ 이하 등급의 신비 영구파괴가능(발현중인 신비를 파괴. 대상당 1회 한정)
★ 파괴불가(파괴신의 망치로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 간섭불가(신비에 간섭할 수 있는 모든 영향을 차단합니다.)
★ 영구지속(모든 상황에서 지속됩니다.)
★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 추가
신비치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문구들.
‘······미쳤군.’
하지만 그 내용만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채, 심장 박동이 얼굴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상대의 신비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심지어 영원의 란돌프 이하 등급을 파괴할 수 있다는 건, 유일급의 신비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영구히 없애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유일급 아이템의 3대장 옵션이라고 칭해지는 ‘파괴불가, 간섭불가, 영구지속’이 모두 붙어있었다.
‘히든 특성까지 추가됐다.’
13개였던 히든 특성이 14개가 되는 순간이었다.
재능에 따라 추가되던 히든 특성이 신비에 의해 하나 더 생긴 건 나도 처음 보는 것이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는 옵션들.
기사왕 빌헬름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최강의 신비!
말 그대로 최강이었다.
이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만큼.
나는 한참동안 감동의 여운을 맛보고 즐겼다.
이런 건 정말 본 적이 없으니까.
게임을 플레이하며 여덟 개의 유일급 아이템을 모아봤지만, 그때 느낀 감격보다도 훨씬 여운이 길었다.
‘이제 나갈 때가 됐다.’
십여분 가량을 음미한 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레벨업을 하며 체력을 비롯한 모든 상태가 회복되었다.
신비의 관을 모조리 섭렵했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생성된 워프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사주력?’
탑 앞에 모여있는 사주력과 마주하게 되었다.
*
마지막 입장자가 고작 시체 까마귀의 왕이라니.
입장자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놈이다.
사주력은 내심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100명의 입장자가 모두 나왔으나 초월종이라 여겨지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
“모르겠군.”
저 시체 까마귀의 왕을 향해 확신을 내릴 수가 없다.
사주력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강한건지, 약한건지, 무엇 하나 제대로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확실한 것은 자신들을 의뭉스럽게 할 정도의 무언가를 저 시체 까마귀의 왕이 지녔다는 것.
“저, 저 왕관은······.”
“고리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왕관 아닌가?”
“아.”
괴물들의 중얼거림 속에 답이 있었다.
시체 까마귀가 쓴 왕관은 분명히 탑의 다섯 고리가 합쳐지며 만들어낸 것과 똑같았으므로.
“고작 저딴 시체 까마귀 따위가 내 신비를 넘어섰다는 말이냐?”
허나 모두가 납득한 것은 아니다.
이무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현상과 상황을 빚어낸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무기가 위협적으로 전설 등급의 신비 ‘환영용의 안개’를 펼쳤다.
“보아라! 나의 위용을! 시체 까마귀 따위는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신비의 주인이 나일지니!”
위풍당당, 기세가 흘러넘친다.
시체 까마귀의 앞까지 당도하여 확실한 격의 차이를 몸소 보여주었다.
“비켜라, 까악.”
그 순간.
이무기의 신비, 환영용의 안개가 사라졌다.
“뭣······?!”
이무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비가 비활성화가 된 게 아니다.
······ 신비가 파괴됐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비란, 남이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괴물들에게 있어서 신비는 존재의 증명과도 같다.
단순히 능력치를 올려주고 옵션을 부여해주는 것을 넘어선 영역. 불변하는 존재력.
그런데 한순간에 신비가 파괴되었다.
마땅히 다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시체 까마귀의 왕이 눈에 담자, 신비가 영원히 사라졌다.
“음······!”
그것을 본 사주력은 경직됐다.
그들 역시도 신비가 파괴되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상식이 깨졌다. 단 한순간에 균형의 추가 무너져내렸다.
“어, 어떻게 내 신비를······!”
이무기는 여전히 당황한 채였다.
허나 그 당황은 이내 분노로 뒤바뀌었다.
신비의 관에서 얻을 수 있는 신비는 단 하나.
사력을 다해 괴물들은 신비의 관에 도전한다.
얼마나 어렵게 얻은 신비였건만.
“죽여버리겠······!”
쩌적!
이무기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돌로 변해버린 탓이다.
그것을 보며 시체 까마귀의 왕이 말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있나보구나, 까악.”
오만하게.
감히 사주력을 앞에 두고서도, 한 치의 밀림 없이.
마치, 가만히 안 뒀으면 이 주변의 모든 영역을 없애버리기라도 하려 했다는 듯이 말을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오만하게 들리질 않는다.
‘위엄.’
시체 까마귀의 왕이 말을 하자, 그만한 위엄이 서렸다.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 되는.
백왕을 마주하고서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각이었다.
사주력 전원이 느꼈다면 이는 결코 착각이 아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군인 것도 아니었다.
뭘까.
대체 저 시체 까마귀가 무엇이기에?
하지만 이윽고 이어진 시체 까마귀의 말은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백왕을 데려와라, 까악. 너희와는 격이 맞질 않는다, 까악.”
*
신비의 관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사주력들.
그리고 수많은 괴물들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놈들이 이곳에 모인 게 나 때문이라는 걸.
아마도 탑 자체가 내 도전을 알린 것이리라.
처음 도시에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
【Lv.12】
사주력의 레벨이 11인줄 알았는데 12였다.
지난 시간 동안 레벨을 올린 모양.
문제는 사주력 전원이 일반적인 괴물과는 궤가 다르다는 것이다.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
레벨 1의 차이는 1성의 차이 이상이었다.
‘부딪히면 순살당하겠군.’
아마 내가 죽는데 1초도 안 걸릴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첫인상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을 볼 수밖에.
마침 운도 좋았다.
이무기의 신비를 파괴하여 경각심을 심어줬으니.
게다가 사주력은 절대로 나를 파악할 수 없다.
14개의 히든 특성.
그중 ‘영원의 란돌프’가 가지는 효과 중 하나가 무엇인지 감이 잡힌 덕이었다.
‘종의 위엄.’
말에 위엄을 심어준다.
그 효과는 웬만한 규격의 괴물로는 거스를 수 없을 정도였다.
감히 사주력조차도 말이다.
‘······절대로 안 만나려고 했다만.’
그리하여 현재.
나는 사주력과 함께 백왕전에 있었다.
절대로 다시는 안 만나려고 했던 백왕이건만.
“백왕께서 나오신다.”
대토룡의 말과 함께, 높디 높은 왕좌를 바라보며.
반인반마의 형태로 변한 사주력들이 차례대로 무릎을 꿇는다.
······ 이제는 진짜 돌이킬 수가 없었다.
백왕(수정)
기호지세.
나는 이미 호랑이의 등에 올랐다.
기세를 탔으니 내릴 수 없고, 한 번 뱉었으니 주워 담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건 하나.
죽기 살기로 해볼 수밖에.
‘최종보스로군.’
······아무리 의연한 척하려고 해도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속을 게워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압박감.
사주력을 속여넘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백왕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래도 놈들이 나를 백왕의 앞까지 데려온 걸 보면 나에 대한 경각심을 느꼈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들 수준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