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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도시 크람델
크람델이 요새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도시 전역이 요새화되어있기 때문이다.
인세에는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성. 만화나 영화에서나 겨우 표현될 법한 끝이 보이지 않는 저 거체가 바로 크람델이었다.
그 가운데엔 백호의 석상이 들어서 있다.
‘백왕.’
북쪽의 수호신인 백왕.
마찬가지로 크람델 역시 백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백왕이 보호하는 한 마계도, 심연의 지배자도, 인간들도 이곳을 넘보지 못한다.
‘약속은 했다만, 상관없겠지.’
녀석과는 다시 북쪽으로 발을 들이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지금 이 몸은 빌헬름이 아닌 란돌프였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건 ‘최강의 신비’다.
그 과정에서 앤드류 사제의 딸인 안다사르만 데려가면 그만이었다.
백왕과 마주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어, 엄청나군요.”
“확실히 이만한 크기의 성은 크람델뿐이다, 까악.”
“그게 아니라······ 성으로 들어가려는 괴물들 말입니다.”
이자벨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성의 입구는 문전성시였다.
입장하려는 괴물들로 엄청나게 붐볐다.
하지만 괴물들의 급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괴물들이 ‘줄을 서서’ 성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능을 갖춘 괴물들.’
평범한 필드 위의 괴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들은 진화한 괴물들이다.
시체 까마귀가 플레이어를 잡아먹고 진화했듯이, 저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화하여 ‘숨겨진 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반 몬스터부터 보스 몬스터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신화종들도 이따금 섞여 있었다.
‘이만한 괴물들이 굳이 크람델로 모이는 이유가 뭐지?’
판게니아에 정통한 나조차도 이들이 크람델로 모이는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이곳이 괴물들의 지상낙원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은데.
꼬르르르륵!
‘······ 대식가가 반응하는 거 보니 확실하군.’
시체 까마귀의 왕으로 의태 했음에도 대식가가 반응한다.
진화한 몬스터의 핵이 대식가의 주식인 모양.
하지만 특성 하나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사고 쳤다간 정말 못 빠져나올 수도 있으니까.
<백왕의 가호로 텔레포트가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텔레포트 북도 여기선 쓸 수 없다.
당연히 성의 내부에도 워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대한 조용하게 할 일만 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줄이 세 개다.’
문제는 줄이 세 개였다.
일반 괴물들의 줄과 급이 다른 괴물들의 줄, 그리고 신화종이나 환상종과 같은 고대의 종들이 프리패스로 지나가는 길.
하기야 인간들보다도 계급주의가 심한 게 괴물들이긴 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반 줄에 섰다.
끝이 없는 행렬. 줄어드는 속도로 보아 하루는 내리 기다려야 할 것 같지만 별수가 없었다.
“반룡인과 ‘왕’은 두 번째 줄에 서야 합니다.”
그러자 앞에 있던 ‘꽃 선인장’이 말했다.
꽃 선인장은 사막지대에 등장하는 레벨 3의 몬스터다.
【Lv.5】
하지만 눈앞의 꽃 선인장은 그 규격을 넘어서고 있었다.
원래의 꽃 선인장은 지능이 거의 없다시피한 괴물.
이 역시 진화한 종이다.
“알려줘서 고맙다, 까악.”
짧게 인사하며 자리를 옮겼다.
두 번째 줄은 훨씬 짧았다.
반나절 내로 입성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시체 까마귀 주제에 감히 내 앞에 서겠다고? 비켜라.”
등을 돌리자, 검은색의 위가 뾰족한 고깔 같은 망토를 뒤집어쓴 무언가가 있었다.
‘혼돈 고깔’이라 불리는 심연의 존재.
【Lv. 8】
심연의 괴물도 크람델에 있다던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았다.
물론 심연 속에는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 이런 특이한 개체가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지만.
‘무시가 상책이다.’
온갖 괴물들이 모이는 곳에서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감히 날 무시해?”
대놓고 무시해버리자 혼돈 고깔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변했다.
“싸움, 금지다. 싸우면, 저렇게, 된다.”
내 앞에서 불에 타고있는 해골 ‘파이어 스컬’이 성벽의 중심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벽의 중심부엔 수많은 종류의 석상이 진열되어 있었다.
“문의, 주인, 메두사, 가, 돌로 만든다.”
모두 메두사에 의해 돌로 변한 괴물들이다.
장식하듯 전시해둔 걸 보면 악취미가 따로 없다.
‘메두사는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다.’
메두사는 11레벨의 슈퍼 엘리트 레이드보스 몬스터.
1성의 초월자 12명 이상, 혹은 2성의 초월자가 못해도 세 명은 모여야 잡을 수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말이 11레벨이지 그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한 절대자 말이다.
몬스터의 레벨은 플레이어와 달리 그 규격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까.
‘몬스터는 앞에 붙은 수식어가 길면 길수록 강력하지.’
예컨대 일반 몬스터의 레벨이 11이라면 11레벨의 플레이어 한 명이 충분히 사냥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스’ 수식어가 붙은 몬스터라면 11레벨이 최소 두 명이 모여야 하며, ‘레이드 보스’ 수식어가 붙은 몬스터는 4명이 모여야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는 같은 레벨의 캐릭터 8명이, ‘슈퍼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는 12명이 합을 맞춰 공략해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규격은 백왕이나 마왕 같은 놈들밖에 없다.
‘분명히 백왕의 네 심복 중 하나였지.’
게다가 메두사는 백왕을 따르는 사천왕 중 하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파이어 스컬이 혼돈 고깔에게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고깔. 뺨에, 표식, 떴다.”
“뭣?”
혼돈 고깔의 위로 어느새 메두사의 표식이 떠올라있었다.
메두사가 보내는 경고의 의미이자 저주.
“흐이이익!”
혼돈 고깔은 호들갑을 떨며 몸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역시나.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내로라하는 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고 싸움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한 번 저주를 건 이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메두사가 문을 지키고 있다면 그야 고분고분 해질 수밖에.
혼돈 고깔에게 반응했다면 내 뺨에도 메두사의 저주가 새겨졌으리라.
······ 참 재밌는 곳이다.
“‘별 수호자’님이다!”
“그것도 두 분이나!”
그때였다.
돌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별 수호자?’
어딘가 익숙한 어감에 소란의 중심지로 고개를 돌리자, 두 마리의 ‘환상종’과 ‘신화종’이 문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한 마리는 전신이 푸른 화염으로 이글대는 환상종의 피닉스.
다른 한 마리는 끝이 안 보일만큼 기다란 신화종의 뱀이었다.
“저 뱀은······?”
이자벨라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 드라무트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별 수호자라고 불린다는 건 그와 같은 자격으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별 수호자는 별의 근처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그런 의문도 잠시.
순식간에 피닉스와 드라무트가 성 안으로 들어갔다.
파이어 스컬이 말했다.
“새로운, 별이, 나타, 났다는, 소문이, 사실인가보군.”
“새로운 별이 뭐냐, 까악?”
“서른, 세, 번 째, 별이, 크람델에, 나타, 났다는, 소문. 이 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대륙에 존재하는 별은 서른 두 개다.
이는 5년간 변치 않았다.
판게니아의 역사를 살펴봐도 마찬가지.
그런데 33번째 별이라고?
‘여신이 죽으며 32조각으로 나뉜 게 별이건만.’
어디 숨겨둔 부위라도 있었다는 뜻일까?
가만히 턱을 쓸었다.
성지를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드라무트가 크람델에 나타났다.
심지어 괴물들은 ‘서른 세 번째 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간다.
그러나 흥미는 미친 듯이 샘솟았다.
‘사실이라면 절대로 놓칠 수 없다.’
관련된 내용을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드라무트와도 몰래 접선할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을 듯싶고.
*
크람델의 내부.
의외로 그 안은 인간들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면.
“몸과 정신의 정화를 위해 ‘인정 온천’으로 오십시오! 오늘만 반값에 모십니다!”
“불안정한 육체를 정화해야합니다!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 ‘친절 온천’으로!”
곳곳에서 피어나는 연기들.
저게 다 온천수로 인한 증기인 것 같다.
하지만 이곳은 북쪽이다. 바깥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는데 온천이라니?
이곳에 온 괴물들도 일단 온천부터 가는 걸 보면 목적 자체가 저기에 있는 것 같다.
‘빌헬름으로 왔을 때와 많이 달라졌군.’
빌헬름으로 백왕을 사냥하고자 크람델에 잠입한 적이 있다.
불과 1년 전.
그땐 이렇게 크람델에 괴물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온천도 없었다.
고작 1년 사이에 대격변 수준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혹시 반룡인이십니까? 저희 온천에도 반룡인이 지금 와 계신데, 같이 혼욕은 어떠신지?”
이자벨라를 향해 다가온 흰 투구를 쓴 고블린.
가게 홍보를 위해 나온 고블린들은 모두 저 흰색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길안내를 해주었던 괴물쥐는 검은색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투구의 색깔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는 듯싶었다.
“반룡인이 있다고, 까악?”
“예. 멸종했다고 전해지던 그 반룡인입니다. 같은 종족끼리 화포를 풀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싶은데요?”
미켈라 세트를 착용하면 발동되는 옵션 천룡인.
하지만 그 천룡인은 단지 천룡인의 날개를 지니게 해주는 옵션일 따름이다.
진짜 천룡인이 아니라 그래서 ‘반룡인’이라 불리는 거고.
하프 천룡인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진정한 반룡인은 오래전에 멸절했다.
‘······ 인간이다.’
고로, 인간이다.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미켈라 세트를 착용한 채 크람델에 잠입한 인간이 있다.
어쩌면 플레이어일지도 모른다.
‘확인해 봐야겠어.’
어차피 난 지금 시체 까마귀의 왕이니까.
이자벨라 역시 진짜 반룡인이라 생각하게 하면 그만인 일.
“대가는 무엇으로 지불해야 하냐, 까악.”
“아, 크람델에 처음 오셨나보군요? ‘진화의 조각’ 10분 어치면 됩니다.”
“진화의 조각, 까악?”
“바로 이겁니다.”
고블린의 전신에 미약한 황금빛이 서린다.
이윽고 고블린이 황금빛을 취하자 손 위에 아주 작은 금가루가 떠올랐다.
‘······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이 이곳에서도 화폐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이상하다. 황금률의 조각은 플레이어들만 가질 수 있는 것 아니었나?
무엇보다 이곳에선 황금률의 조각이 ‘진화의 조각’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황금률의 조각이 진화의 원인인가보군.’
진화한 괴물들.
그리하여 지능을 얻고 더 강력해졌다.
설마 그 원인이 조각난 황금률의 조각일 줄이야.
그 말인 즉, 시체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괴물들 모두가 부서진 황금률 조각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거래도 가능하다고······.’
황금률의 조각을 서로 거래할 수 있다.
문득 황금률 상점이 떠올랐다.
어쩌면,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조각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의 감각으로 시도하자, 내 주변으로 황금률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
“시체 까마귀 치곤 상당하군.”
순간 주변 괴물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현재 남아있는 황금률의 시간은 19시간 정도.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선 많은 양인 듯싶었다.
고블린이 했던 것처럼 황금률의 빛결에 손을 대어 조각을 떼어냈다.
“이거면 되나, 까악?”
“두 분, 환영합니다!”
*
정성 온천.
크람델 중심부에서 살짝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한, 제법 준수한 규모의 온천이었다.
왜 이름이 다 이런 식인지는 몰라도 온천수의 비밀을 푸는데 이만한 규모면 충분하다.
로비에서 값을 지불한 뒤 안내를 받고 깊숙이 들어가자 온천이 보였다.
수많은 괴물들이 온천을 즐기고 있는 가운데에.
“······ 음? 반룡인?”
천룡인의 날개를 지닌 남자가 그 중심부에서 설녀들과 함께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남자는 새롭게 입장한 이자벨라를 쳐다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나 역시 남자를 보며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인간.’
예상대로 저놈은 인간이 맞다.
【Lv.10】
그것도 무려 레벨 10의 강자!
이마에 박힌 번개모양의 흉터.
번개를 맞은 듯한 황금빛의 머리 디자인.
주변을 감도는 정전기 형태의 특급 신비까지.
이리보나 저리보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저놈은, 내가 아는 놈이 분명했다.
그리고 놈을 봤을 때의 충격은 드라무트를 봤을 때의 충격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 저놈이 왜 여기있지?’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저 특징을 착각할 리도 없었다.
이자벨라와 마찬가지로······ 내가 키운 캐릭터니까.
‘뇌절사냥꾼.’
뇌절(雷絶)의 아이작!
맥스 레벨에 보물급 아이템도 꽤 갖췄지만, 워낙에 해괴한 짓을 많이 해놓은 터라 로그인조차 불가능했던.
로그인하면 그 즉시 네임드 NPC에게 척살당할 위기에 놓였던 그 비운의 캐릭터가,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