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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요르문간드
면죄부.
이름 그대로 사면권이다. 면죄를 증명하는 서류 말이다.
그리고 여신교의 사제는 평생에 걸쳐 세 번의 면죄부를 발행할 수 있었다.
당연히 면죄부를 발급하는 건 무엇보다도 신중해야하는 일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이 준 면죄부로 인해 파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면죄부라도 여신교에서 규정하는 대죄 ‘10악(十惡)’까지 용서해주진 않으므로.
10악의 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사제는 당연히 파면되기 마련.
“······ 아무리 기사왕의 후계자라고 하여도, 검증되지 않은 자에게 면죄부를 발행해줄 순 없습니다.”
그러니, 앤드류의 말은 정론이었다.
자신의 직을 걸고 행하는 게 면죄부의 발급이었으니.
여신교에서 정규 사제가 된다는 건 일반적인 의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여신교에서 10년 이상 수행한 부제 백 명 중 한 명만이 사제가 될 수 있으니, 도시로 파견된 사제들에겐 도시의 주인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정도로 대단한 지위.
자신이 쌓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데 달라고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내 말에 앤드류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면죄부는 오직 당사자만 쓸 수 있습니다. 구호소에 기부해주신 건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기사왕의 면죄부를 기사왕이 아닌 자가 쓰는 건 불가능합니다.”
“허나, ‘면죄’ 되었을 텐데?”
“······.”
앤드류는 입을 꾹 닫았다.
그래. 그게 이상한 것이다.
면죄부. 앤드류는 기사왕 빌헬름에게 죄를 면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여신에게 직접 약속하는 것이기에 굳이 종이 따위가 없어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면죄부의 당사자가 아닌 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고.
‘······ 그런데 사용했다. 기사왕에게 발급한 면죄부의 면책권이, 내게 사용됐다.’
눈앞의 남자가 ‘죄를 사한다, 앤드류’라 말한 그 순간.
앤드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 세상은 죄를 지으면 ‘악업’이라는 게 쌓인다.
명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제들은 상대의 악업이나 명성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명성 84】
【악업 0】
······ 이처럼.
그냥, 눈에 보인다.
이로써 저 기사왕의 후계자라는 남자가 적어도 죄를 짓고 살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추앙의 기도문을 여신이 아닌 인간에게 사용한 순간, 앤드류의 악업은 폭발할 듯이 늘어났다.
여신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행위니까.
악업이라는 건 단순히 악한 짓을 하는 것만으로 쌓이는 게 아니다.
사제가 자신이 속한 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행동을 해도 쌓이기 마련이었다.
‘사제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행할 수 없다. 이대로 며칠만 지나도 내가 추앙의 기도문을 사람에게 사용했다는 게 여신교에 알려졌겠지.’
그 순간 부제로 강등되거나 파면될 것이다.
하지만 도시를 지키고자 앤드류 사제는 교리를 어겼다.
그로 인해 악업이 늘었고, 심판을 받을 일만 남았는데.
‘······ 그런데 악업이, 사라졌다.’
눈앞의 남자가 ‘죄를 사한다’고 말한 순간 앤드류 사제의 악업이 눈녹듯이 사라졌다.
면죄부의 면책권이 발동한 것이다.
눈앞에서 직접 여신을 보았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그 발동된 ‘면죄부’가 자신이 발행한 것이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어미가 자식을 알아보듯 지극히 당연한 일.
“기사왕께서 말씀하시더군. 앤드류 사제, 그대가 자신에게 큰 빚을 졌노라고.”
“으음.”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더군. 그런데 그의 후계자에게 면죄부 한 장 주는 게 그토록 아까운가?”
앤드류 사제가 침음을 삼켰다.
말마따나 앤드류 사제는 기사왕에게 빚이 있었다.
하지만 둘만의 비밀이었다.
그걸 후계자에게 말해줬단 말인가?
“······ 빌헬름님에게 직접 들었습니까? 그 ‘빚’에 대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내 입으로 말해 줄 수도 있다만.”
“해보십시오.”
해보라. 자신만만한 태도다.
천하의 기사왕이 둘만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았으리라 확신하는 걸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사왕이 나라는 사실을 앤드류 사제는 모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원하는 대로 말해주었다.
“‘엘드리치 안다사르’의 정화를 직접 해주었지.”
“······ 안다사르의 정체에 대해서도 들으셨습니까?”
“그대의 숨겨둔 딸이었다는 것 말인가?”
“······!!!”
앤드류 사제의 두 눈에 당황이 가득찼다.
그럴 수밖에.
앤드류 사제는 명예와 관련된 퀘스트를 주야장천 주는 존재였다.
모든 퀘스트를 완료하고 호감도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면 ‘엘드리치 정화’라는 히든 퀘스트를 주었는데, 거기까지 도달한 캐릭터는 빌헬름뿐이었다.
엘드리치 안다사르.
안다사르는 앤드류 사제의 숨겨둔 딸이다. 유일급 아이템의 주재료인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에 의해 엘드리치가 됐다.
나는 그녀를 정화한 뒤 그 흑마법서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사실을 아는 건 빌헬름뿐.
명예를 아는 자인 빌헬름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는 걸, 앤드류 사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명예와 관련된 퀘스트를 끊임없이 준 것도 결국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갈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겠지.’
숨겨둔 딸이 사악함의 대명사인 엘드리치가 됐다.
앤드류 사제로선 반드시 은밀하게 해결해야만 하는 일.
결과적으로 정화하긴 하였으나 안다사르는 앤드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안다사르를 데려와주마.”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안다사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어, 어디에 있습니까?!”
앤드류 사제가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평정심이 순식간에 깨진 것이다.
정화는 했으나, 안다사르의 행적은 묘연했다.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크람델.”
······ 그녀는 크람델에 있다.
요새 도시, 혹은 요괴 도시라고 불리는 그곳에.
“크람델이라면······ 인간은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 아닙니까?”
인간인 안다사르가 어떻게 그런 도시에 있냐는 말.
아쉽게도 그 믿음은 틀렸다.
“흑마법서를 잃고 저주로부터 정화됐다고는 하나, 엘드리치가 된 그 순간부터 안다사르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아아······.”
앤드류 사제가 다리를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반쯤 쓰러졌다.
자책 가득한 눈빛.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자책하는 앤드류 사제를 향해 쐐기를 박았다.
“그녀를 데려오려면 면죄부가 필요하다. 앤드류 사제.”
그러니 면죄부를 내놓으라고.
*
다음날, 히드라곤 마차를 타고 나는 ‘기사의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게 면죄부입니까?”
마차 안에서 이자벨라가 내가 든 종이를 보며 물었다.
갈색의 면사포같이 뻑뻑한 사각형 종이.
종이에는 아무 것도 안 적혀있지만 이게 바로 면죄부였다.
면죄부가 발동될 때 이름과 여신교의 표식이 이 종이에 떠오르게 만든 건데, 실물을 안 보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따로 제작했다나.
“실물은 처음 보겠군.”
“예······ 사막에는 여신교가 없으니까요.”
하긴. 사막의 여왕은 여신교를 싫어했지.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추격대가 편성되어 열심히 우리를 쫓고 있을 것이다.
여왕이 공주를 놔줄 리가 없으니까.
“어쩌다가 사막의 공주가 된 거냐?”
생각난김에 그간 미뤄두었던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분명히 내가 키울 땐 공주의 직위는 얻지 못했건만.
이자벨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제가 가진 ‘신비’를 여왕이 본 뒤, 여왕이 저를 공주로 임명했습니다.”
······ 잠깐.
신비를 보고 여왕이 공주로 앉혔다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신비(神祕)가 무엇인가.
신비란 ‘이펙트’다.
게임을 하다보면 캐릭터 외관을 따라 빛나는 빛, 혹은 색깔들.
아이템을 특정 강화까지 끌어올리면 초록색이나 붉은색으로 빛나는 것처럼.
판게니아에선 그러한 특색들을 ‘신비’라고 불렀다.
다음 메인 퀘스트에서 얻어야할 신비 역시 같은 것이다.
‘기본적인 신비 말고는 없었을텐데?’
분명히 신비술사한테 돈을 주고 구매한, 아무런 능력도 없는 흰색의 빛줄기를 내뿜는 기본 신비말고는 가진 게 없었을 것이다.
특수한 능력을 지녔거나 자격을 증명하는 신비 같은 건 내 기억으론 없었다.
“무슨 신비를 가졌기에?”
“그게······ 보여드릴까요?”
“음.”
고개를 끄덕이자, 이자벨라가 양 손을 펼쳤다.
그러자.
화아아.
이자벨라의 외관 위로, 검은색 무늬가 올라온다.
마치 점박이처럼 수없이 많은 검은색의 동그란 무늬가 이자벨라를 감쌌다.
그건 무언가의 눈 같아 보이기도 했고, 표범의 외피같아 보이기도 했으며,
‘뱀의 비늘.’
특이한 뱀의 비늘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저 ‘신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요르문간드의 비늘.’
순간 뇌정지가 왔다.
왜 저걸 이자벨라가 갖고 있는 거지?
“그 신비를 어디서 얻은 것이냐?”
이자벨라가 천천히 설명했다.
“······ 어느날 거대한 뱀이 저를 감싸는 꿈을 꿨습니다. 그 뒤에 이 신비를 얻었는데···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선택받았군.”
“선택이요?”
“사막여왕이 제대로 봤다는 말이다.”
신비, 요르문간드의 비늘.
아무런 능력도 없지만 대신 한 가지 자격을 부여하는 신비다.
‘별을 가질 자격. 요르문간드의 별을 찾는 신비다.’
32개의 별 중 하나.
그중 아직 아무도 찾은 적이 없다는 요르문간드의 별.
이름이 붙은 몇 안 되는 초월성이다.
저건 그걸 찾아서 가질 권리를 주는 신비였다.
‘레벨 10을 찍으면 바로 찾을 수 있겠군.’
그러나 의아했다.
이자벨라의 레벨은 아직 8.
초월하기엔 이른 레벨인데다가, 저런 신비를 그저 우연히 얻었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어느날 꿈을 꾸고 모두가 찾아 헤메던 신비를 얻었다니.
‘특정한 조건을 만족한 건가?’
가만히 턱을 쓸었다. 저 말마따나 정말 우연일 리는 없었다.
숨겨진 조건을 만족했으니 얻은 것일 터.
확실한 건 내가 플레이할 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막여왕은 저게 초월에 필요한 별을 찾아주는 신비임을 알아본 뒤 이자벨라를 공주의 자리에 앉힌 게 분명했다.
“······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별 일 아니다.”
이자벨라의 의아함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 일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별 일이 맞았다.
‘여왕은 절대로 이자벨라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라도 안한다.
가로채려는 걸 수도 있고, 진짜 후계자로 만들려는 걸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 됐든 이자벨라는 엄청난 보물덩어리니까.
‘허.’
그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그런데··· 여긴 어디입니까?”
이자벨라가 마차 바깥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묘지였다.
“네크로벨리. 크람델로 향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이곳은 죽은 자의 도시, 네크로벨리.
그 이름처럼 살아있는 건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언데드나 고스트가 넘쳐나는 위험한 지역이지만, 이곳을 지나야만 크람델로 향하는 워프를 찾을 수 있다.
“이쯤이면 되겠군.”
나는 특정 묘지 부근에 마차를 세웠다.
수많은 묘지들 옆에는 과거 죽은 자들의 위령비가 숱하게 세워져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삽’을 꺼내들었다.
푹! 푹! 푸욱!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삽으로 묘지를 파헤치는 걸 보곤 이자벨라가 기겁했다.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악업’이 쌓여갑니다.>
동시에 악업이 올라갔다.
별로 신경은 안 쓰였다.
내가 면죄부를 받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내가 묘지를 파는 이유는 간단했다.
‘네크로벨리의 지하던전.’
수많은 묘지들 어딘가에 지하던전과 연결된 무덤이 있다.
그 지하던전에 크람델로 향하는 지름길이 있었다.
“흠. 여긴 아닌가 보군.”
“······.”
당황한 이자벨라를 뒤로한 채 나는 다른 무덤가를 찾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떠오른 글귀.
<‘천상의 정령알’이 영향을 받습니다.>
<‘천상의 정령알’의 부화율이 상승합니다.>
······ 나는 잠시 멈칫했다.
‘명성과 악업에 영향을 받는 거였나?’
진정한 영광 업적을 달성하며 명성을 얻었을 때도 부화율이 올랐다.
천상의 정령알이 내 명성, 혹은 악업에 영향을 받는 듯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크람델로 향해서 그 ‘최강의 신비’를 얻는 것 역시 만만치 않게 중요했으므로.
무엇보다, 악업에 영향을 받는다고 그게 나쁘다는 확신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툭!
순간 무덤을 파헤치던 삽에 무언가가 걸렸다.
<‘네크로벨리 : 까마귀묘지의 지하던전’을 발견했습니다.>
*
던전.
게임의 설정상, ‘도시’와 ‘심연’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게 바로 던전이었다.
그렇기에 던전에선 간혹 숨겨진 워프가 발견되곤 했다.
당연히 크람델로 향하는 비밀워프도 이 던전 어딘가에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쉿! 좀 조용히 해봐. 까마귀 우는 소리가 안 들리잖아.”
···던전에 입장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비좁은 골목을 돌던 나는 이맛살을 구기며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네크로벨리의 지하던전.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어린 소년·소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몰래 카메라지 이거?”
“오빠. 닥치라는 말 못 들었어?”
“똥 마려우니까 나 좀 꺼내줘요!”
“······ 아, 이 돼지새끼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