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30화 (30/317)

────────────────────────────────────

────────────────────────────────────

팬텀(Phantom)

황금률 상점에 떠오른 목록들.

그 하나하나가 눈이 휙 돌아갈 만큼 엄청난 것임에는 이견이 없었다.

메인 퀘스트 순위를 연달아 네 번 1등 했음에도 살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누구라도 탐낼만한 항목들이었다.

첫 줄부터 기가 막힐 지경이다.

신화종의 알이라니.

별의 수호자인 드라무트 역시 신화종의 일종이다.

신화종은 최소 엘리트 레이드 보스 몬스터 취급을 받을 만큼 종의 규격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백왕의 이빨,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 용의 심장.’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부 내가 유일급 템을 제작할 때 썼던 주요 재료들이다.’

순간 느껴지는 빳빳함에 나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쌍욕을 내뱉고 있지 않을까?

유일.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신급의 아이템들. 그런 유일급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중심이 되는 재료들이 지금 황금률 상점의 목록에 떠오른 상태였다.

우연의 일치로 같은 재료가 있을 수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왕이 자기 이빨을 두 개나 뽑을 리가 없으니.’

백왕. 혹은 백제라 불리는 북쪽의 주인.

그 거대한 백호는 반신급 신화종의 괴물이다.

빌헬름으로 플레이할 당시 녀석의 이빨을 얻고자 한 달을 씨름했다. 워낙에 재빠르고 습격하는데 능해서 몇 번이나 역으로 죽을뻔했는지 모른다.

‘빌헬름으로도 죽이는 걸 포기한 놈이니까.’

결국, 이빨 하나로 합의를 본 채 서로 제 갈 길을 갔다.

다시는 북쪽에 발을 들이지 않는 조건으로 백왕이 자신의 이빨 하나를 건넨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백왕을 죽인 게 아닌 이상에야 녀석의 이빨이 이 황금률 상점에 있을 리 만무했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다면.

‘······빌헬름이 죽고 나서.’

그건 바로 빌헬름의 죽음 뒤, 보유하고 있던 유일급 템들의 행방과 이 황금률 상점이 관계가 있을 때뿐이었다.

빌헬름이 보유한 유일급 아이템은 여덟 개.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유일급 템은 내가 알기로 총 열다섯이었고, 그중 절반이 넘는 유일급 아이템을 빌헬름에게 몰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 게임은 캐릭터가 죽으면 모든 게 공중분해가 된다.

가진 아이템도 마찬가지다.

빌헬름이 죽고 여덟 개의 유일급 아이템은 증발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던 게다.

“이게 무슨 되팔렘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지고지순한 여신이 시체에서 아이템을 수집하고 분해해 되팔고 있다니.

아예 없어지는 것보단 재사용하는 게 낫다지만.

물론 황금률 상점의 주인이 여신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갖고 황금률 상점의 목록에 오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치 내 시체 위에서 누군가가 춤을 추며 전재산을 몰수해가는 그런 기분.

‘추앙의 기도문을 외울 때 여신의 축복이 걸린 것도 이상했지.’

양심이 찔려서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던 걸까?

생각해보면, 빌헬름을 죽인 것도 여신 아닌가.

그야 가만히 있어도 마왕에게 몸을 빼앗겼을 테지만, 여신이 마냥 선(善)하다는 믿음을 가질 순 없을 것 같았다.

‘빌헬름만이 아니다. 모든 캐릭터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게다가 이에 해당하는 건 빌헬름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대지신의 성배는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걸 누가 갖고 있던 건지는 안다.

‘대지신의 성배. 대지의 성자 알브히드가 지녔던 성배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지신교에서 갑자기 성배를 수배하기 시작한 탓이다.

솔직히 믿기 힘들었지만 대지신의 성배가 떡하니 여기 있는 걸 보면 정말 알브히드가 죽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황금률 상점을 이용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목록에 있는 아이템에 따라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있겠군.’

같은 이유로 많은 이들이 빌헬름의 죽음을 알았을 것이다.

황금률 상점을 보고 빌헬름의 죽음을 확정한 뒤, 8용사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빠르게 퍼트린 것이리라.

‘아직 안 팔린 걸 보면 천 시간 단위로 황금률을 모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터.’

유일급 아이템의 중심이 되는 재료들.

살 수 있으면 무조건 사야만 한다. 내가 그만한 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구매했을 테니.

‘······ 아니면 이미 팔릴만한 건 다 팔린 뒤이거나.’

이맛살을 구겼다.

만약 팔렸다면, 누가 사 갔을까.

당연히 명예의 전당 최상위권을 석권한 붙박이들일 것이다.

현재까지 상위권 ~ 최상위권을 독점한 이들은 그라시아와 민트초코맛있어요, 흑요, 마스터, 학살, 다크스타, 바르무슈 등이 있었다.

‘최상위 플레이어들을 만만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어.’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만 했다.

빌헬름이 착용했던 유일급 아이템이 세상에 풀렸다. 얼마나 풀린 건지는 몰라도 그걸 갖게 된 사람들의 무력수준은 차원이 달라졌을 것이다.

단순히 재료만 있다고 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최상위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더 높을 수도 있겠다.

‘어찌한다.’

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아야 하나, 써야 하나.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수록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래 봐야 극소수만 구매할 수 있을 테지만, 퀘스트의 순위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이 게임을 잘 이해하고 플레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140시간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다섯 가지.’

축복이 깃든 최상급 엘릭서(30h), 만능의 핵(50h), 대격변 탈리스만(60h), 월광나비 탈리스만(40h), 황금가지(100h).

축복이 깃든 최상급 엘릭서는 잃어버린 육체를 ‘재생’시킨다.

만능의 핵은 재료, 혹은 보유한 혼의 종류와 상관없이 강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대격변 탈리스만은 장비가 지닌 특수옵션을 죄다 바꿔버리는 것이다.

월광나비 탈리스만은 이름처럼 ‘월광나비’옵션을 붙여주는 탈리스만이고, 황금가지는 보검 뒤랑달을 만드는 재료였다.

하나같이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아이템들.

《‘축복이 깃든 최상급 엘릭서’를 구매했습니다.》

《‘대격변 탈리스만’을 구매했습니다.》

《‘월광나비 탈리스만’을 구매했습니다.》

그중 셋을 구매한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특히 대격변과 월광나비 탈리스만은 요정 여왕의 눈물과 비슷한 급의 초희귀 탈리스만이었다.

‘훌륭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도 오르고, 엘릭서와 훌륭한 탈리스만도 두 개나 구했다.

황금률 상점의 용도 또한 알았으니, 남은 일은 거침없이 질주하는 것.

어차피 다음 메인 퀘스트는 내가 무조건 1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 얼마나 압도하여 압살(壓殺)하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

*

허드슨의 두 눈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세렝게티의 하반신이 조금씩 재생되고 있었다.

“추, 축복이 깃든 최상급의 엘릭서······!”

고작 한 방울을 떨어트렸음에도 살이 트고 나온다. 뼈진이 붙고 뼈가 만들어진다.

축복이 깃든 최상급의 엘릭서는 여신교에서도 1년에 10개가 채 안 나오는 극히 희귀한 물건. 자격이 없는 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플레이어는 황금률 상점에서 구할 수 있다지만.’

그것도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이 30시간이나 필요하다.

황금률 30시간.

말이 30시간이지, 랭커가 아닌 다음에야 그만한 시간을 보유한 사람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성각자님은 플레이어가······.’

허드슨은 성각자의 이름을 모른다.

들어본 적도, 그가 말을 하는 것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굳이 궁금해하진 않았다.

성각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름이요 자격이었으므로.

그러나 이곳에 와서 성각자는 기사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세렝게티를 만나, 상위권의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구할 수 없는 엘릭서를 아낌없이 건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플레이어일까?

‘······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

플레이어이든, 아니든, 그가 따라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세렝게티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그가 아니었다면 허드슨은 앞으로도 영원히 세렝게티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상관없다.

오히려 그가 플레이어라면 판게니아에서 받은 은혜를 현실에서 갚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곳에선 힘들지만, 현실에서라면 가능할 테니까.

“2시간 주기로 한 방울씩 떨어트려라. 그렇게 한 달은 꼬박해야 완전하게 재생될 거다.”

“그럼 한 달 동안 옆에 꼭 붙어 있어야겠군요.”

“와이저 후작에게는 내가 말해놓으마. 축복이 깃든 엘릭서는 거부반응이 없는 사람이 뿌려야 효력이 좋다고 말이지.”

“······ 감사합니다, 성각자님!”

와이저 후작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세렝게티의 저주가 풀려도 하반신을 잃은 상태에선 앞날이 캄캄할 테니, 아예 허드슨을 강제로 떼어놓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역시, 구원자가 맞다.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

“란돌프다.”

“커헉?!”

순간 허드슨은 사레가 들린 듯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이름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란돌프라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최근 가장 뜨거운 감자가 아니던가.

란돌프는 현재 가장 유력하게 ‘팬텀(Phantom)’으로 추정되는 이름.

팬텀의 최고 캐릭터는 당연히 기사왕 빌헬름······.

‘아!’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허드슨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가장 위대하며, 가장 은밀한 자. 팬텀은 판게시아를 플레이한 모든 사람에게 전설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로 추정되는 캐릭터들이 이룩한 업적들은 셀 수조차 없다.

모험과 낭만과 불가능을 향한 도전들.

그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올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잘못 들은 것일 테다.

‘말이 안 돼.’

상식적으로.

설마 그 란돌프가, 그 팬텀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환상 그 자체였던 존재가 자신에게만 정체를 알려준다고?

지나가는 뽀삐가 웃을 일이다.

“세렝게티가 눈을 뜨자마자 네 이름을 부르더군.”

“······.”

“순백의 기사가 믿는다면, 나 역시 믿을 수 있다.”

“······.”

······ 잘못들은 게 아닌가 보다.

“아아······.”

주르륵.

돌연 듯이, 허드슨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가 이름을 알려줘서? 아니다.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팬텀은 내게 한 줄기 빛이었다.’

허드슨에게 팬텀은 빛이었다.

게임 속 캐릭터를 사랑한 허드슨에게, 현실보다 더 애틋했던 판게니아에 활기를 가져다준 그의 존재는.

처음엔 모두가 이곳을 가짜라고 여겼다.

판게니아는 그냥 게임 속 세상일 뿐이라고.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은 단순한 신의 장난인 것이라고.

하지만 팬텀은 이 세상을 탐구했다. 진지하게. 현실보다도 더 깊이.

그리하여 모두에게 이곳이 단순한 게임이 아님을, 또 다른 현실임을 알려준 존재였다.

판게니아를 밝히는 가장 찬란한 빛.

허드슨이 생각하는 팬텀은 그런 존재였다.

“내 이름을 알게 된 게 그렇게 감동적인가?”

“예.”

“······.”

“지금까지 못 알아본 게 한탄스러울 만큼 감동적입니다.”

왜 못 알아봤을까.

그가 팬텀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설명된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비밀은 무덤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마이 로드(My Lord).”

“······ 마이 로드?”

점입가경이 따로 없다.

“예스, 마이 로드.”

진지하기 짝이 없는 허드슨의 두 눈빛에 얼굴이 뚫려버릴 것만 같았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도록.”

“그, 그래도 저 따위가 어떻게······.”

“닥쳐라.”

“옙. 성각자님.”

발로 차버리려는 걸 겨우 참았다.

“한 달 뒤에 돌아와서 저주를 풀 것이다. 그때까지 와이저 후작과 사이엔 공작으로부터 그녀를 잘 지키고 있어라.”

세렝게티는 초월자다.

저주를 풀고 몸이 정상화 되면 그녀가 필요할 일은 아주 많았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허드슨은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들어 되물었다.

“······ 그런데 한 달 뒤라니. 어디 가십니까?”

“북쪽의 요새로 간다.”

“북쪽의 요새라면······ 서, 설마 요괴도시 크람델 말입니까? 거긴 인간이 입장 불가능한 곳 아닙니까?”

요괴도시 크람델.

인간이 아닌 것들이 주인으로 있는 도시다.

그리고 인간은 입장하자마자 공격받는 곳이었다.

백왕의 은혜 아래 존재하는 무적의 요새이기에, 수많은 자원이 존재함에도 인간들은 감히 손도 못 대는 천혜의 장소.

거길 가겠다고?

“그래. 크람델로 간다.”

대답 한 번 간단했다.

허드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위, 위험합니다. 게다가 워프를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던데······.”

초월자도 피하는 게 요괴도시 크람델이다.

지능을 가진 온갖 괴물과 신화종들, 심지어 틈새에서 흘러나온 알 수 없는 것들까지 존재하는 게 바로 그곳인 탓이다.

게다가 도시와 이어진 워프의 위치도 시시각각 바뀐다.

워프의 위치는 자격이 주어진 길잡이 괴물들밖에 모른다.

‘길은 돌연변이로 찾으면 돼.’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13개의 히든 특성 중 하나, 돌연변이.

이 히든 특성으로도 충분히 숨겨진 워프를 찾을 수 있으니까.

‘다음 메인 퀘스트는 오직 나만이 아는 방식으로 깬다.’

인간은 접근할 수 없는 도시.

나는 그곳으로 가서,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 ‘신비(神祕) 얻기’를 완료할 생각이었다.

오직 나만이 아는 특별한 방식으로, 가장 강력한 신비를.

*

앤드류 사제.

그는 여신상을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여신이시여.’

추앙의 기도문을 올리자 나타난 여신의 형상을.

믿기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신이었다.

여신이, 기사왕의 후계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현상은 그가 사제로 지내는 동안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기도를 올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도해도 나타나지 않던 여신 아니었던가.

여신교에서 여신을 실제로 본 자는 손에 꼽힌다.

그마저도 증명할 수 없는 말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도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 그가 나타났으니까.

여신의 사랑을 받은, 자신을 면죄한 기사왕의 후계자가.

하지만 마냥 반가워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느닷없이 나타나 그가 자신에게 요구한 것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앤드류 사제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 면죄부를 내놓으란 말씀입니까?”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