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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광
지상 최강의 남자, 그라시아.
그가 늦은 저녁 은평구의 한 거리를 거닐었다.
자이언트 맨티스에 의해 몇 채의 건물이 부서진 곳.
그리고 이곳에서 히드라곤 역시 나타났다.
-모르는 사이입니다.
인터뷰 당시 김하나 기자는 즉답했다. 히드라곤의 주인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결국, 그라시아가 직접 사건현장을 찾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찾아야 한다.’
그가 찾는 건 팬텀이 아니다.
그는 과거 판게니아에서 히드라곤의 혼을 보유했다고 전해지는 플레이어를 찾는 중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히드라곤의 혼을 찾고 있었다.
‘반드시 찾아내서, 히드라곤의 혼을 회수해야만한다.’
수아아아!
이윽고 황금빛이 아지랑이치며 솟구친다.
강림한 그의 전신에는 희뿌연 안개와 전기가 일고 있었다.
곧 허공에서 수천 개의 검이 나타나 질서정연하게 늘어섰다.
모두가 보물이라 칭해질 수준의 명검들.
휘이잉!
손을 휘젓자 수천 개의 검이 허공을 빙빙 돈다.
그라시아는 그중 한 자루를 쥐었다.
‘진(進) 심연추적자의 검.’
극의 칭호가 숙련도, 혹은 한계성 옵션과 관계가 있다면,
진이라 이름 붙은 칭호는 장비의 특수한 성능을 극대화한다.
심연추적자의 검은 심연의 지배자 중 한 명을 죽여 빼앗은 검. 그것을 극한까지 강화하고 격을 높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검은 ‘안전지대’마저 뚫어내 모든 대상을 추적할 수 있다.
물론 추적을 위한 실마리는 필요하다.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실마리가 구체적일수록 더 멀리, 더 정확히 찾아낸다.
‘염원구슬.’
흰색의 별이 그려진 주황색 구슬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다.
이 역시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를 죽이고 빼앗은 것.
사용자의 염원을 최대한 구체화하여 들어주는 구슬이다.
단순하고 별 게 아닐수록 확실하게 이루어주지만 복잡하거나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는 건 구체화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예컨대, 눈앞에 있는 10레벨 이하의 대상을 즉살시킨다거나.
그런 간단한 ‘염원’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보물이었다.
한 번의 염원을 충전하는 데 한 달은 걸리지만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이 주변에서 사진 속 남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내라.”
그라시아가 품에서 히드라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사진을 꺼냈다.
염원구슬로 증거를 찾고, 그 증거를 진 심연추적자의 검에 심어 대상을 찾아낼 계획이었다.
이윽고 염원구슬이 붉게 타오르더니 펑! 터졌다.
휘이익! 휘이익!
염원구슬에서 튀어나온 별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별이 찾아내는 건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사건 현장이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나와야 정상이다. 하다못해 걸어간 발자국이라도 보여야 한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염원인데도 불구하고 염원구슬이 아무런 증거를 찾아낼 수 없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별을 먹어 초월한 상태는 아니었는데.’
염원의 대상이 초월자일 때.
그렇다면 염원구슬로는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그라시아는 초월한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히드라곤의 주인은 영상으로 봤을 땐 분명히 초월하지 않은 상태였다.
초월자가 아님에도 염원구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추적을 피하는 초고등급의 스킬, 혹은 수호벽과 비슷한 이권들.’
이 역시 실현 가능성은 아득히 낮다.
굳이 누군가의 추적을 피하자고 관련 스킬을 최고등급까지 숙련시키는 사람은 없으니까.
수호벽과 같이 특정 레벨 이하의 모든 것으로부터 ‘면역’되는 이권도 마찬가지다.
허나, 수호벽이라고 해봐야 최대 10레벨이다.
염원구슬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초월한 상태여야만 하는데, 수호벽의 레벨이 11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아끼는 염원구슬까지 썼는데도 티끌 한점 찾지 못했다.
‘······ 이 은평구를 전부 증발시켜버리면 놈이 나타나겠지.’
그라시아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그 순간이었다.
[메인 퀘스트 4의 전당 순위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그라시아가 이맛살을 구겼다.
순위가 변하지 않으면, 이 문구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라시아는 최근들어 벌써 네 번째 이와 같은 문구를 보고 있었다.
범인은 단 한 명.
<1위, ???점. 란돌프>
<2위, 200점. 그라시아>
<3위, 191점. 민트초코맛있어요>
<4위, 180점. 다크스타>
<5위, 170점. 바르무슈>
······.
<<순위가 낮아져 ‘황금률 상점’의 목록이 한칸 줄어들었습니다.>>
“······ 팬텀.”
란돌프. 놈은 팬텀이 분명하다.
아니라면 연속으로 자신을 이처럼 끌어내릴 순 없을 테니.
‘물음표?’
그런데 점수가 이상하다.
???점. 저렇게 점수가 표시되는 건 처음본다.
너무 점수가 높아서 확인도 불가능하다는 건가?
대체 몇 점을 받아야 물음표로 점수가 뜬단 말인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띠링! 띠링!
그때였다.
종을 울리는 소리.
그라시아가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서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낫을 든 해골 사신들이 검은색 종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판게니아 바깥까지 쫓아오다니, ‘균열’이 곧 벌어지긴 할 모양이군.”
사신이다.
‘플레이어’를 쫓아 죽이려는 끈질긴 놈들.
그간 판게니아에서만 나타났는데 이제는 현실까지 들이닥쳤다.
곧 일어날 ‘균열’에 의한 영향일 터.
그라시아가 양 손을 모아 합장했다.
후아아아아아아앙-!!
수천 자루의 검들이 합쳐지며 거대한 빛의 기둥이 세워졌다.
*
세렝게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지독한 마왕의 저주가 다시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허드슨은 끝까지 세렝게티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옆에선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와이저 후작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 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저 뭣도 없어보이는 놈과 비밀약혼식까지 올렸다는 소리를 세렝게티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이다. 순간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질 뻔한 걸 겨우 버텼다.
“후작님. 워프를 새로 짓고 안정화시키려면 못해도 500만 골드는 필요할 겁니다.”
허드슨이 눈을 빛냈다.
어차피 막다른 길이다.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천만 골드에 세렝게티를 팔라는 거냐?”
“이미 사이엔 공작에게 팔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 끝난 이야기다. 뒤집을 수 없는 이야기야. 사이엔 공작이 알게 되면 네놈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다.”
이미 사이엔 공작에게 약속한 뒤였다.
대도시 세 개를 가진 사이엔 공작의 힘은 국왕 다음으로 막강했다.
돈 좀 있는 상인 나부랭이가 사이엔 공작과 대적할 수는 없다.
게다가 비밀약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와이저 후작과 이 도시의 안녕도 장담할 수 없어진다.
“공작의 밑에 ‘막심’이 있나?”
나는 둘의 언쟁에 끼어들었다.
전혀 다른 주제지만.
허드슨이 답했다.
“8용사 중 한 명인 막심 말입니까?”
“그래.”
“지금은 사이엔 공작의 영지 하나를 물려받아 후계자 수업을 하고 있을 겁니다.”
막심이?
‘출세했군.’
8용사라 불리면서 사이엔 공작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대도시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출세가 어디있을까.
‘일개 용병이 지금은 대도시의 주인이라.’
그것도 일개 용병이.
막심은 대원정 당시 내가 고용한 용병단의 우두머리였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했더니 가장 먼저 도망친 쓰레기 말이다.
그랬던 놈이 8용사 행색을 하며 사이엔 공작의 눈에 들어, 대도시의 주인까지 되어버린 웃지못할 상황이었다.
‘8용사의 기준을 모르겠군.’
설마 도망친 순으로 된 건가?
하지만 8용사 중에는 ‘그라시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라시아는 아예 대원정에 참가 자체를 안했다. 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대원정 영입순위 1순위였으니까.
네임드 NPC인줄 알고 러브콜을 보낸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다.
어쨌든, 그럼에도 그라시아는 공공연연하게 자신을 8용사라 말하고 다니는 중이다.
현실에서조차 말이다.
나를 도발하려는 걸까?
‘내가 나타나길 바라는 것일 수도.’
손을 잡고 ‘협력’하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믿을 리 만무했다.
빌헬름으로 플레이할 때 내 동선과 단 한 번도 겹친 적이 없는 게 그라시아다. 의도적으로 나를 피해다녔다는 뜻이다.
그런 그라시아가, 빌헬름이 죽자마자 헛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협력을 말하지만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나를 누르거나, 죽이려는 수작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빌헬름의 업적을, 위대한 기사들과 나눠야할 영광을 훼손하는 놈들.
심지어 대원정에서 가장 먼저 도망간 놈과 참가하지도 않은 놈들이 그러고 있다.
차라리 비석에 안치된 500인의 기사들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영광의 자리에 빌헬름이라는 이름이 없어도 좋았다.
‘필연적으로 족쳐야할 놈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 번 천 번을 양보해도, 족쳐야할 놈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나마 가장 만만한 게 막심이지.’
8용사 중 가장 하잘 것 없는 게 막심이다.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려 문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허드슨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제대로된 추모식을 진행할 것이다.”
“예?”
“500인의 기사들. 그들의 가족에게 일만골드씩 보상하도록.”
“··· 제가요?”
“종의 돈은 주인의 돈이다.”
“아니 그게······ 예?”
그게 그렇게 되나?
돈이라도 맡겨놨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에 허드슨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
이미 나가버린 사람에게 더 뭐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자신이 했던 말이 있으니.
“······.”
*
“······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서로 등을 맞댄 채, 잔악무도한 마족들을 상대로 단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비석 앞.
추모를 위해 도시의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낡은 책 한 권을 들어올렸다.
“이 책은 기사왕께서 남기신 수기다. 수기엔 대원정에 관련된 내용들이 적혀있다. 이곳에 이름 적힌 기사들의 위대함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남겨놓으셨다.”
기사왕이 남긴 수기.
물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제임스, 노아, 루커스, 제이콥······.”
500명의 이름을 차례대로 읊었다.
단 한 명의 예외없이 모두 외워서 입에 담았다.
“그리고 시온까지. 그들의 영광은 후대에 반드시 전해져야만 한다. 진정한 영웅은 8용사라 불리는 자들이 아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음에도 조용히 자리를 지켰던 바로 이들이 진정한 영웅이다.”
“시온······!”
노파가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메이. 구호소에 내가 업고간 그 여자였다.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전해주었다.
“나는 기사왕의 후계자로써 그들의 영광스런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다시 없을 영웅들의 영면을 위하여, 그들을 가슴 속에 영원히 묻을 것이다.”
나는 비석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헌데,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쓰라림은 무엇일까.
‘제임스, 노아, 루커스, 제이콥, 시온······.’
다시 한 번 500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었다.
머릿속에 깊숙하게 각인시켰다.
《500인의 기사가 영면에 듭니다.》
《명예가 50 상승했습니다.》
《업적 ‘진정한 영광’을 달성했습니다.》
《‘천상의 정령알’의 부화율이 상승합니다.》
《‘텔레포트 북’에 ‘기사의 정원’ 웨이포인트가 생성됐습니다.》
*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친구여!”
“다음에는 내가 놀러가도록하지.”
“하하! 친구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빠르게 하이 드라이어드와 드라이어들을 배웅했다.
고작 하루 도시에 있었음에도 피골이 상접한 게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드라이어드들을 텔레포트 북을 통해 보낸 뒤, 나는 그제야 새롭게 떠오른 ‘이권’에 주목했다.
《‘비밀경매장’》
《‘황금률 상점’》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커맨드가 두 개.
나는 그중 아래에 있는 ‘황금률 상점’을 열었다.
《황금률 상점이 열렸습니다.》
《상점에서 이용할 수 있는 황금률의 잔여시간은 140h 36m입니다.》
《명예의 전당 순위에 따라 볼 수 있는 ‘목록’의 개수가 달라집니다.》
《1위는 10개의 목록을 부여하며 그 아래로 5위까지 목록이 하나씩 줄어듭니다. 이후 6위부터 10위까지는 5개의 목록을, 11위에서 100위까지는 4개의 목록을, 100위 바깥은 3개의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황금률 상점은 30일마다 갱신되며 새로고침시 황금률 10h가 소모됩니다.》
《1등의 권리로 10개의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이용해 무언가를 구매할 수 있는 상점!
‘140시간이라.’
메인 퀘스트 4를 달성하며 얻은 ‘큰 조각’으로 인해 내 잔여시간은 100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전부 쓸 수는 없겠지만, 솔직히 무엇을 살 수 있을지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나는 눈에 힘을 빡 주고 황금률 상점의 목록에 집중했다.
《알 수 없는 신화종의 알 300h (잔여수량 : 1개)》
《축복이 깃든 최상급 엘릭서 30h (잔여수량 : 9개)》
《만능의 핵 50h (잔여수량 : 4개)》
《대격변 탈리스만 60h (잔여수량 : 5개)》
《월광나비 탈리스만 40h (잔여수량 : 3개)》
《황금가지 100h (잔여수량 : 10개)》
《백왕의 이빨 1,000h (잔여수량 : 1개)》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 600h (잔여수량 : 1개)》
《대지신의 성배 500h (잔여수량 : 1개)》
《용의 심장 2,000h (잔여수량 : 1개)》
“쿨럭! 커헉!”
목록을 보자마자 사레가 들렸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