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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 상점
세렝게티가 말을 아낀 이유.
내가 마왕이거나, 혹은 마왕의 분신체 같은 것임을 염려에 둔 것이리라.
그림자가 내 육체를 지배하려고 했으니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니까······ 게임상으로는 마왕을 잡을 수 없게 설정되어 있었다, 이 말인가?’
들어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오직 특별한 이권을 지닌 ‘플레이어’만이 마왕의 본질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기사왕 빌헬름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내가 마우스로 움직이는 단순한 게임 속 캐릭터였을 뿐이지.
‘이 모든 게 여신의 계획이라면, 내가 오직 게임으로서 마왕을 죽인 건 분명히 그녀의 계획에 없던 일이라는 거로군.’
게임으로는 도달하지 못하게 해놓았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마왕을 죽일 수 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가 되는 조건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게임 속에서 죽으면 플레이어로 소환된다. 하지만 빌헬름 캐릭터가 내 최초의 죽음은 아니었다.’
나의 경우 빌헬름이 죽은 뒤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할 때 ‘히든피스’를 달성했다는 소리와 함께 소환되었다.
그러나 캐릭터의 죽음이 기준이라면 분명이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내가 키운 캐릭터만 수백이 훌쩍 넘는다.
당연히 도중에 죽은 캐릭터도 상당했다.
그러나 빌헬름이 죽었을 때만 플레이어가 되는 현상을 겪었다.
유일급 템을 소유해서?
아니. 그러기엔 플레이어가 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다.
특별한 아이템이 아니라면, 무슨 기준과 근거를 가지고 소환했을까.
‘자신이 키우던 가장 강한 캐릭터가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된다.’
그나마 합리적인 이유는 이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하드코어 게임을 좋아했던 나는, 적당히 키우다가 각이 안 나오면 그대로 방치한 뒤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는 형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 과정에서 무력의 편차가 커지고 어지간한 캐릭터가 사망해도 소환되지 않은 건 아닐지.
이후 다른 캐릭터로 빌헬름의 성장에 필요한 모든 걸 모았으며, 빌헬름 자체의 성장 한계를 넓히고자 수년간 고된 노가다의 행진을 걸어갔다.
재능 자체는 란돌프보다 적어도, 육체의 완성도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그야말로 극진멸참의 육체였다.
끝에 이르러 반신에 다다른.
가장 강한 캐릭터인 빌헬름이 죽어야만 플레이어로 소환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왕의 목을 따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블루스크린이 떴다. 아마도 마왕의 권능에 의한 것이겠지.’
게임의 한계.
플레이어가 아니고 이권이 없는 빌헬름은 아무리 강해도 마왕을 이길 수 없다.
그로 인해 현실에도 영향이 끼쳤다.
블루스크린이 뜨며 손을 댈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그 사이 마왕은 육체를 바꾸려고 했고.
‘별을 마왕에게 빼앗기기 전에 여신은 빌헬름의 생명을 앗아갔다.’
Game Over.
결국 나는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재능 만땅, 히든 특성 13개를 지닌 초유의 캐릭터가 탄생했지만.
‘의문이 해소됐지만, 의문이 생겼군.’
모든 실마리가 풀린 것은 아니다.
우선 의문 첫 번째.
‘세렝게티를 누가 마계에서 내보낸거지?’
그것도 말에 묶인 채 영지로 돌아왔다.
마계에서 살아남았다면 영지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후 황금도시 아르카나에서 허드슨에 의해 그녀가 영지로 돌아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온 방법에 대해선 쉬이 짐작이 가질 않는다.
세렝게티도 이후의 기억이 없다고 말했으니.
누군가가 개입하여 마왕 몰래 탈출시켰다는 것이다. 아니면 초인적인 생존본능으로 세렝게티가 바닥을 기어 돌아왔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는 그다지 가능성이 없을 것 같지만.
‘내 육체는······ 빌헬름의 육체는 그럼 마왕이 된 건가?’
또한 여신이 빌헬름의 별과 생명을 빼앗았을뿐, 육체 자체는 마계에 그대로 남아있다.
마왕은 부활을 위해서 그 육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죽음을 이용하고 시체를 움직이는 마족은 많았으니까.
‘어쨌든 마계는 박살났다. 마왕이 나를 죽일 마법진을 실행하려고 마계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대원정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어찌됐든,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대원정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대원정 실패 이후 마계가 준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계 역시 절반을, 절반 이상의 타격을 받은 탓에.
하지만.
‘배신자. 나를 제외한 8용사라는 것들도 관여되어 있을 터.’
배신자가 없었다면, 어쩌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계와 내통한 놈이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야한다.
‘관련된 놈들은 다 족친다.’
이제 NPC라고 생각해서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를 방해한, 방해했던, 방해해온 모든 놈들에게 그에 걸맞은 최후를 안겨주리라.
그러기 위해선 빠른 성장이 필요했다.
“젠장! 워프가 몇 개가 터진거야!”
“검! 내 검 어딨어?!”
“빨리 움직여!”
······ 바깥이 유난히도 소란스러웠다.
몬스터 웨이브.
도시가 공격받고 있었다.
그말인 즉.
‘오랫동안 워프를 관리하지 않았다. 워프가 암흑공간으로 연결된 거다.’
판게니아의 모든 대륙은 이어져있지 않다.
빛과 어둠의 전쟁 이후 여신 레아가 죽으며 대륙이 어둠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도시의 끝으로 가면 오직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암흑공간’이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대륙의 사이사이를 잇는 건 오직 워프뿐이다.
허나, 워프를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면 워프를 통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
문제는 워프를 관리하는데 천문학적인 골드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돈이 없어서 워프의 관리까지 소홀했나보군, 와이저 후작.’
쯧.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 금방 끝내고 돌아오마.”
*
암흑공간.
혹은 틈새라 불리는 곳.
그곳의 심연까지 내려가면, 심연의 지배자들이 나온다.
오랫동안 워프가 터진 채로 방치하면 놈들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멸망이다.’
심연의 지배자가 튀어나온 순간 도시의 명운은 다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지간한 성급의 초월로는 놈들을 대적할 수 없다.
하물며 강력한 기사들이 죄다 죽어버린 ‘기사의 정원’은 절대로 심연의 지배자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놈들이 튀어나오면, 나 역시 도망칠 것이다.
남은 워프가 전부 심연에 꺼져버리기 전에 도망치지 않으면 영원히 틈새에 갇히게 되니까. 그렇게 되면 죽는 것 외엔 탈출할 방법이 없다.
암흑공간은 모든 ‘연결’을 차단하기에, 텔레포트 북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싸워라! 도시를 지켜야 한다!”
와이저 후작이 성벽 위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검을 들었다.
······ 몇몇 기사들은 아직 가동되는 워프를 막고 있었다.
작동되는 워프의 앞엔 두려움에 떠는 도시민들이 대거 모여있었다.
“와이저 후작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때 도시민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건 귀족의 책무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 사이에서 앤드류 사제가 목청을 높였다.
멀쩡히 작동되는 워프를 왜 막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힘없는 도시민들은 우선 안전하게 이동시켜야하지 않느냐는 논지였다.
와이저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 사제! 그대가 도와주겠다면 그리하겠소.”
“알겠습니다.”
“워프를 열어줘라!”
기사들이 비키자, 몇몇 도시민들이 워프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앤드류 사제가 남는다는 말에 대다수의 도시민들은 워프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빨리 빠져나가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서 만납시다!”
“사제님이 이곳에 계신데 저희만 어떻게 빠져나갑니까!”
“더 늦으면 다른 워프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어서!”
“싫습니다. 같이 싸웁시다! 같이 도시를 지킵시다!”
······ 도시민들의 앤드류 사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도시를 잃으면 방랑자 신세가 된다.
와이저 후작도 그 점을 알기에 앤드류 사제를 이용한 것이었다.
“크악!”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
“아아악! 내 다리!”
머지 않은 곳에서 괴물들과 기사들의 혈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몇몇 워프는 도시 안쪽에 있다.
도시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직은 다크 고블린과 같은 조무래기들 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력한 개체가 고장난 워프를 타고 등장하리라.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방법은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고장난 워프를 ‘연금술사’가 고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장난 워프를 파괴하는 것.’
이게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갈 길이 구만리였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면 워프를 통해 튀어나오는 물량이 어지간한 군단 수준이었으니.
지금 도시에 상비한 병력만으로는 길을 뚫을 수 없다.
그렇다고 외면한 채 내 갈 길 갈 수도 없는 노릇.
<<‘서브 퀘스트 : 도시를 지켜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보상 : 명예+30, 막대한 경험치>>
<<거절시 : 명예-30>>
······ 서브 퀘스트가 눈앞에 도달했으니까.
막대한 경험치라니. 이걸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나가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4 : 암흑공간의 틈새를 메워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워프가 가열되었습니다. 심연의 강자들이 튀어나오기 전에 가열된 모든 워프의 작동을 멈추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한시간 30분>>
<<보상 : 클리어 시간에 따라 차등 지급>>
<<보상 2 : 명예의 전당에 등록 시 이권 ‘황금률 상점’ 이용 가능>>
<<10분 초과 시 : 심연의 강자 ‘검은 살갗 혼종’이 등장합니다.>>
<<20분 초과 시 : 심연의 초강자 ‘용의 살갗 혼종’이 등장합니다.>>
<<30분 초과 시 : 심연의 지배자 ‘신의 살갗 혼종’이 등장합니다.>>
······ 설마 이게 여기서 시작될 줄은.
메인 퀘스트 4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시작됐다.
‘최악이군.’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이 메인 퀘스트를 깰 수는 없었다.
깨봤자 순위권에 오르지 못하면 손해이니.
도망쳐서 재도전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테다. 아예 도전 자체를 하지 않으면 카운트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황금률 상점이라니.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으로 이용하는 상점인가?’
내게 꼭 필요한 이권이다.
반드시 명예의 전당 순위권에 들어가야하는 이유였다.
평소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빠져나갔을 것이나.
‘앤드류 사제. 세렝게티.’
앤드류 사제와 세렝게티가 눈에 밟힌다.
이 도시가 사라지면 그 둘도 함께 사라진다.
가장 명예로운 사제와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최측근의 기사가.
‘10분만 지나도 클리어는 글렀군.’
문제는 퀘스트 자체에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10분마다 튀어나오는 혼종들.
혼종이라 이름 붙은 것들은 죄다 강력하기 짝이 없다.
하물며 검은 살갗 혼종이면 레벨 10의 괴물이다.
그 뒤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빠르게 길을 뚫어야 한다.’
그러니 10분 내로 깨야만 한다.
허나 이자벨라와 허드슨만으로는 부족하다. 히드라곤을 얹혀도 마찬가지.
10분 내로 워프들을 전부 파괴하는 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상황.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이이잉!
나는 텔레포트 북을 사용했다.
곧이어 눈앞에 ‘바스락 숲’의 광경이 비추는 워프가 발생하였다.
“오! 우리의 친구여. 다시 숲에 올 셈인가? 그렇다면 오늘도 축제를 벌여야겠군!”
하이 드라이어드!
숲의 주인이자 드라이어드의 군주인 그가 워프 반대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친구여.”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다 이럴 때 쓰라고 친구찬스가 있는 것 아니겠나.
*
“······.”
“······ 저게······.”
“저, 저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