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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웨이브
마왕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핵에 ‘빛의 길’을 꽂았으나 역으로 자신이 사망했다는 사실까지.
세렝게티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 별을 앞두고서 제게 해주신 말씀을 떠올려보십시오.”
세렝게티는 신중했다.
내가 나의 죽음에 관한 말을 꺼내기 전보다도 더 진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신뢰를 주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뭔가가 더 있다.’
나는 세렝게티를 알고 있다. 내가 게임에서 알았을 때보다도 자세하게. 플레이어가 되어 마주친 그녀에게 묘한 동질감과 그리움을 느낄 지경이었으니까.
그래서 알겠다.
내 죽음과 관련되어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또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기사왕이라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 내가 뭐라고 했더라?’
헌데, 기억이 안 난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세렝게티에게 별을 구해준 당시 나는 세렝게티를 ‘격려’했다. 그건 분명히 기억난다. 문제는 그 ‘격려’의 내용을 내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캐릭터 커맨드에 불과했으니까.
컨트롤을 누르고 키보드 T키를 같이 누르면 26가지의 감정표현 중 한 가지를 할 수 있다.
‘격려’ 커맨드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등을 토닥이는 모션을 취하는 건데, 그 내용을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 너는 별을 먹고 초월하면 자신이 ‘세렝게티’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닌지 항상 걱정했었지.”
그런데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온다.
내가 알 리 없는, 당시의 내용이.
“너에게 깃든 걱정을 당시에는 몰랐다. 지금와서 떠올려보면 허드슨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랐던 것이었을 터.”
“······ 맞습니다.”
“별을 앞에 두고, 나는 너를 격려했다. 닥치라고.”
“아······.”
부르르르!
세렝게티가 몸을 잘게 떨었다.
오직 그녀와 기사왕만이 알고 있는 기억.
나 역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순간 눈앞에 그때의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별을 취한 사람들은 모두 변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닥쳐라.
··· 격려한 게 아니라 별을 향해 발로 밀어버린 것 같다.
이거 격려가 맞나?
그리고 닥치라는 말에 저렇게 감동하는 게 정상인가?
······ 우는데?
‘별의 기억을 읽어서인가보군.’
별의 계승자 클래스의 숨겨진 효과.
각 클래스마다 숨겨진 고유의 효과들이 있듯, 내게도 있었다. 별의 직전 소유자의 기억을 읽어내는 효과가.
아마도 그 영향이지 않을지.
“정말 빌헬름님이십니까?”
“그렇다.”
“허, 허나 그 모습은······.”
“사정이 있다.”
“‘죄인’이 되셨단 말입니까?”
“죄인?”
죄인이라면 죄를 지은 인간.
주로 감옥에 갇힌 놈들을 일컬어 그렇게 부르곤 했다.
하지만 지금 세렝게티가 꺼낸 ‘죄인’의 단어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세렝게티가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죽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빙의’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며 사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을 사냥꾼, 혹은 사신이라 부르는······.”
“처음 들어보는군.”
사신. 분명히 플레이어 사냥꾼이다.
얼핏 허드슨의 인생사를 들을 때 들어본 단어인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세렝게티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조심하십시오. 그들의 ‘죄인’을 찾아내려는 집착과 끈질김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품에 울리지 않는 ‘검은 종’을 숨긴 자들이라고.”
“유념하지.”
“그리고··· 빌헬름님의 최후에 관하여, 꼭 아셔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본 게 정말 사실인지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세렝게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흔들리는 눈초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날.
기사왕은 20만에 이르는 병사와 함께 마계로 가는 워프를 강제로 열었다.
마족들의 저항은 거셌으며, 마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수천의 병사가 죽어 나갔다.
사제들이 열심히 기도문을 외우고 선전했으나 마계의 어둠은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느낌이 좋지 않군. 마왕군이 우리의 공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어.”
마계로 향하는 워프.
그것을 여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극소수의 인원밖에 모른다.
그런데 마계의 마족들은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한 것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철두철미한 움직임조차도 일격(一擊)에 박살났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기사왕이 거대한 빛의 검을 휘두르자 수천의 마족이 눈 깜빡할 사이에 증발했다.
지형이 바뀌고 함정은 전부 무용지물이 됐다.
무신(武神)이다. 기사왕은 살아있는 신 그 자체였다.
무신의 앞에 선 마족들이 불쌍해질만큼 그의 존재는 압도적이었으니.
“기사왕께선 쓰러지지 않는다. 전군 돌격하라!”
“마족을 죽여라! 어둠을 걷어내라!”
“승리의 여신께서 우리에게 미소짓고 계신다!”
기사왕이 존재하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하지만 마계의 어둠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
‘다 어디갔지?’
······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이 사라지고 있다.
최전방으로 달려나간 기사들과 병사들의 거리에 차이가 생겼다.
단순히 병사들의 발걸음이 늦은 걸로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세렝게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이곳이 마계라고는 하나 아무런 대비없이 들어온 게 아니다.
이런저런 상황을 모두 계산한 뒤 워프를 연 것이다.
당연히 마계의 어둠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길을 잃지 않고 잘 따라오게끔 ‘여명의 횃불’도 두둑히 챙겨오지 않았나.
‘의도적이다. 인위적이다.’
병사들이 와해되고 있다.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게끔.
마족의 공작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눈치를 챘을 땐 이미 늦었다.
‘누가 배신을?’
이만한 병단을 와해시킬만한 입장의 인간이 배신을 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다수가 분명하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렇게나 조직적인 은폐를 시키는 건 불가능하므로.
“아악!”
“세아 성녀!”
함께 걷던 성녀가 몸을 비틀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기사들이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희생문을 외우고 있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얼굴과 몸에는 온갖 마기를 품은 종기가 자라났고, 두 눈은 악마의 그것처럼 검은 자위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성녀 세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와중에도 지지않고 외쳤다.
“가, 가십시오. 앞으로 계속 가십시오. 제 목숨을 바쳐 축복하겠습니다!”
“허나!”
“멈추면 안 됩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셔선 안 됩니다! 이 구간은 ‘파리 지옥’! 마왕의 마기가 가장 강렬한 곳! 뒤를 도는 자들을 모두 썩게 만듭니다!”
세아 성녀는 헌신의 기도문으로 대신해서 자신의 몸을 썩게 만들고 있었다.
즉, 앞서나간 기사들 중 몇몇이 마기의 유혹에 못 이겨 뒤를 계속 돌아봤다는 의미다.
뒤를 돌 수도, 뒤쳐진 사람을 챙길 수도 없는 지옥.
이 지옥에 들어서면 따라오는 자를 확인할 수 없기에, 병사들이 와해되고 있는 것 역시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게다.
‘그렇다면, 이 지옥에 대해 알고있던 자들이 있다는 건가?’
이곳은 인류가 처음 닿는 장소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마계와 내통을 했다는 의미.
세렝게티는 여전히 선두를 달리는 기사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없이 앞만보고 있었다.
앞서 겪은 일곱 개의 지옥보다도 이 파리지옥이 끔찍하다.
······ 여덟 번째 지옥, 파리지옥을 벗어났을 때 남은 기사의 숫자는 30이 채 되지 않았다.
‘다······ 어디갔지?’
세렝게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있어야할 두 다리가 없었다.
“······ 미련한놈.”
기사왕이 세렝게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파리지옥을 벗어나려는 순간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이 직접 새겨둔 마법진.
그 마법진은 마계의 절반을 침몰시킨 뒤 작동되었고, 본래라면 기사왕 빌헬름의 목숨을 앗아갔어야 할 터였다.
그 순간 세렝게티는 자신의 초월성을 사용해 서로의 위치를 바꿨다.
초월하여 얻은 능력은 그 어느것보다도 우선되므로.
이후 운 좋게도 살았으나 하반신이 날아간 것이다.
“쿨럭!”
세렝게티가 피를 토했다.
죽는다. 살 수 없다.
그녀가 겨우 손을 뻗어, 기사왕 빌헬름에게 닿았다.
“빌헬름. 지고하며 가장 명예로운 기사왕이시여. 원정에 성공하면 부디 허드슨, 그이를 지켜주세요. 그리고 이것과 제 말을 전해주세요.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랑했노라고.”
손에 쥔 목걸이를 건넸다.
하지만 빌헬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닭살 돋는 이야기는 네가 네 입으로 직접 전하도록.”
즉시 최고급의 엘릭서를 잘린 단면에 부었다.
이후 부적을 하나 들어, 세렝게티의 가슴팍에 붙였다.
세렝게티의 두 눈에 당황스러움이 가득찼다.
“이걸 왜 저따위한테······!”
“어차피 이제 못 쓰는 거다.”
극멸진(極滅進) 수호의 부적.
수호의 부적은 필드에서 몬스터에게 인식되지 않도록 휴식처를 제공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10레벨을 넘어 초월한 괴물에게는 소용없다.
하지만 초월한 괴물들도, 이 극멸진 수호의 부적 안에 있는 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강화하여 수없이 격을 깬 부적이었으므로.
하지만 이제 쓸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지켜봐라. 내가 놈을 죽이는 것을.”
······ 바로 앞에 마왕이 있었으니까.
그오오오오!
마왕의 핵이 깨진다. 핵에 꽂아넣은 ‘빛의 길’은 마왕의 마기를 처참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겼다. 승리했다!
마계의 기나긴 원정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기도 잠시.
‘뭐······?’
세렝게티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핵이 깨지고 마왕이 죽자.
쯔아아아아아악!
핵이 터지며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마기가 빌헬름을 속박했다.
그리고.
“괴물 같은 놈. 아무런 여신의 ‘이권’도 없이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줄이야.”
······ 마왕의 그림자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마치 멈춘 것만 같았다.
그림자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곤 작게 혀를 찼다.
완전히 넝마가 됐다. 핵도 깨졌으니 이 몸으로 부활 따위는 꿈도 못 꾼다.
“하지만 그게 너의 패착이다.”
육체는 죽었으나, 그의 본질은 죽지 않았다.
오직 여신의 권능이 온전하게 담겨야만 자신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육체를 도륙낸 인간은 불세출의 영웅이 맞지만 여신의 권능이, 이권들이 제대로 담겨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스아아아아!
그림자가 빌헬름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빌헬름의 몸을 온전하게 속박하고 먹어치우면 그는 다시 새로운 육체로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왕이 지닌 최후의 권능이었다.
‘과연, 엄청나군.’
다섯 개의 별을 먹어 초월한 육체는 상상이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 자체의 재질도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수준이다. 얼마나 단련을 한 건지 인간을 뛰어넘어 감히 반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음?”
수아아아아악!
순간 기사왕 빌헬름의 몸에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빌헬름의 머리 위로 여신의 잔상이 떠올랐다.
“레아······!”
그림자가 강하게 반발했다.
순식간에 여신의 빛을 몰아냈으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고 말았다.
“‘별’을 빼앗기기 싫어서 너를 따르던 기사의 생명을 빼앗아? 그러고도 네년이 여신이라 할 수 있느냐!”
여신이 빌헬름의 생명을 빼앗아 강제로 별을 거둔 것이다.
덕분에 빌헬름의 육체를 온전하게 지배하려는 마왕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빛이 걷힌 자리, 빌헬름은 창백한 안색으로 죽어있었다.
*
“······ 다음의 기억은 없습니다.”
“······.”
“다만······ 튀어나온 그것은 마치 순수한 악과도 같은······.”
쿵!
콰아아앙!
그때였다.
돌연 지면이 흔들리며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허드슨이 문 바깥에서 소리쳤다.
“모, 몬스터 웨이브입니다! 도시가 공격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