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4화 (2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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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의 최후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후계자라니?

기사왕 빌헬름에게 후계자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사기꾼이로군.’

와이저 후작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기사왕의 전신이니, 환생이니, 제자이니 하는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던가?

특히 대원정이 실패한 뒤 몇몇 도시에선 공공연하게 ‘기사왕의 제자’라며 한자리를 꿰찬 놈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냥 제자도 아니고, 뭐? 후계자?

어이가 없다.

태연자약한 저 태도도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된다면 본모습을 보이리라.

와이저 후작은 손을 내렸다.

후작의 명령을 알아들은 기사들이 한 발자국을 막 떼려는 순간.

“후작가는 기사왕에게 ‘별’을 빚졌다. 그 대가로 와이저 후작, 그대는 기사왕에게 무엇을 맹세했나?”

“······ 멈춰라.”

뚝!

살벌한 살기를 흩날리던 기사들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와이저 후작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사왕에게 그는 빚을 졌다. 무남독녀,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가 초월할 수 있게끔 기사왕이 도와주는 대신 그는 맹세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당사자인 세렝게티조차도 모르는 일이다.

오직 기사왕과 와이저 후작만이 알고 있는 진실.

곧이어 스스로를 기사왕의 후계자라 일컫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잊었다면 다시 알려주마.”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 충분한 성의를 보였소만.”

와이저 후작이 대답했다.

나는 크게 웃어버렸다.

“언제부터 충성이 ‘충분한 성의’의 줄임말이 됐지?”

와이저 후작은 기사왕 빌헬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충성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정성이요, 마음 아니던가.

그것을 고작 ‘성의를 보였다’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갈 순 없는 것이다.

“한때는 ‘명예로운 와이저’라 불리던 그대가, 이제는 정말 살찐 돼지가 되어버린 건가?”

기사 와이저는 그 명예로움과 실력으로 발란 왕국의 후작이 됐다. 기사들이 머무는 ‘기사의 정원’의 주인이 될 정도로 그는 명예를 아는 자였다.

와이저 후작이 이를 갈았다.

“500명의 기사는 죽었고, 세렝게티도 폐인이 됐소. 여기서 무엇을 더 잃으란 말인가?”

“그럼에도 ‘별’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본래 별의 가치는 이 대도시 하나로도 부족한 것이다.

이런 대도시가 판게니아 대륙에는 244개나 있다.

그러나 별은 고작 32개뿐이다.

희소성도 희소성이지만, 여신의 유해가 가지는 가치와 상징성, 그리고 초월성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나도 막되먹은 인간은 아니다. 나는 그저 스승의 마지막을 전해듣고싶을 뿐이니까.”

“세렝게티를 만나겠다는 것이오?”

“그래.”

그 외에 바라는 것은 없다.

도시를 내어달라는 것도 아닐진대, 와이저 후작의 표정은 굳은 채 펴질 줄을 몰랐다.

“기사왕의 후계자라면 증거를 보여주시오.”

“증거라면?”

“검술. 혹은, 계승받은 스킬이라도······.”

오직 둘만 아는 진실을 전했으나 말만으로는 모든걸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사왕의 검술, 혹은 스킬이라.

나는 자세를 바로잡은 뒤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어려운 일이었다.

··· 어떡하지?

*

연무장의 건너편을 보자 은빛의 갑주를 입은 살벌한 표정의 정규기사가 있었다.

검은 들고서 나를 반으로 쪼개버리겠다는 기세를 풀풀 풍긴다.

【Lv.7】

저자가 이곳 영지에 남은, 그나마 강한 기사였다.

진짜 강력했던 기사들은 대원정에 의해 전원 갈려나간 탓이다.

그래서 고작 7레벨의 기사에게, 온갖 보물을 쥐어주고 있었다.

‘축복받은 집행검, 축복받은 백기사의 은갑주, 축복받은 왕가의 반지까지?’

그야말로 축복받은 기사였다.

장비에 ‘축복받은’ 접두사를 붙이려면 고위급 사제가 축복받은 탈리스만을 가지고 온갖 노력과 기도로 기적을 올려야만 했다.

그런걸 둘둘 착용했으니, 고작 3레벨인 나로선 확실히 벅찬 상대다.

“별 볼일 없어보이는데, 실수로 죽여도 모릅니다?”

기사가 신이 나선 집행검을 빙빙 돌렸다.

지금 입을 터는 저 기사는 내가 기사왕의 후계자라는 걸 모른다.

와이저 후작의 함구 아래 이 대결이 치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 마음대로 해라.”

와이저 후작은 사뭇 진지했다.

내가 정말 그의 후계자인지 확인하는 건 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대원정으로 도시에 돈과 인재가 모두 증발했으니, 그는 지금 몰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기사왕의 후계자가 돕는다면 이 도시는 몰락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집판검!”

··· 좋댄다.

어딘가 익숙한 표현이지만, 축복받은 보물을 저런 식으로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런 놈이 이 도시에 남은 그나마 강한 기사라는 걸 보면, 확실히 도시의 명운이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쌍검’을 꺼내들었다.

“뭐냐. 그 투박한 검들은? 게다가 듀얼 소드?”

기사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겉으로 보기에 내가 꺼낸 두 자루의 검은 정말 허접해보였으니까.

대장간에 가면 입구에 널려있는 그런 흔한 무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보다 듀얼소드는 ‘겉멋’든 허접한 놈들이나 하는 행태다.

제대로 된 검사가 두 개의 검을 동시에 다루는 경우는 없었으므로.

허나, 이 두 검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극(極) 철검 두 자루.’

메인퀘스트 3의 초월한 보상으로 얻은 무기들.

나는 주저없이 똑같은 극 철검을 두 자루나 선택했다.

‘스위치 용도다.’

히든 특성 중 하나인 웨폰마스터의 장점은 모든 무기를 상당한 숙련도로 다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 특성을 최대치로 활용하려면 ‘스위칭’할 무기들이 필요했다.

미켈라 칼이 아니라서 천지인 효과는 못 받지만, 기사왕의 흉내를 내는 데에는 이 두 자루의 검이 제격이었다.

【극(極) 철검】

★ 극에 이른 철검. 기본에 충실한 평범한 철검이었으나 어떤 괴짜 초월성(超越星)에 의해 최대의 강화와 초월이 동시에 진행됐다.

★ 힘+3

★ 극(極)의 칭호가 붙은 다른 장비와 함께 착용시 ‘극의’ 효과

★ 검의 숙련도 보정 + 1Lv

★ 관찰 불가

★ 귀속

극, 진, 멸, 참.

이 네 가지 칭호가 붙은 무기는 평범한 잣대로 결코 규정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워낙 평범한 무기에 초월을 해놔서 붙은 능력치는 아쉽지만, 그 외의 효과는 감히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숙련도 보정.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만큼 사기가 없지.’

극 철검 두 자루를 손에 쥐자, 관련 된 내용이 눈앞에 떠오른다.

《검의 숙련도가 7Lv로 보정됩니다.》

《검의 숙련도가 8Lv로 보정됩니다.》

《‘극의(+2Lv)’효과로 인해 검의 숙련도가 10Lv로 보정됩니다.》

히든 특성 ‘웨폰 마스터’는 무기의 숙련도를 5Lv에서 시작하게 해준다.

거기에 히든 특성 ‘손재주’는 모든 숙련도를 +1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만해도 기본 6Lv.

극 철검 두 자루와 ‘극의’효과로 2Lv이 더 올라 10을 달성했다.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10Lv을 넘어가면 돌멩이도 탑이되고 물방울도 바다가 되는 법.

‘부족하다.’

하지만, 여전히 ‘기사왕의 전인’이라 하기엔 부족하다.

이것만으로는 기사왕 특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없다.

발톱의 때조차 되질 못한다.

무엇을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기사왕의 후계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 순간이었다.

《‘별의 계승자’클래스는 특정 조건에서 보유한 별이 가진 직전 소유자의 기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검 숙련도가 10Lv에 이르러 보유한 별의 기억을 읽어들입니다.》

《기사왕 빌헬름의 검술, ‘천지개벽’의 ‘천’을 재현합니다.》

*

“······.”

사람은 자신의 인지를 뛰어넘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할 때 바보가 된다.

멍하니 넋놓고 쳐다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연무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와이저 후작도, 허드슨도, 이자벨라도, 그리고 그를 마주한 기사조차도.

‘뭐, 뭐야?’

기사는 연무장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축복받은 보물들을 착용하고서 자신감이 충만했다. 절대로 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상대는 겉멋 든 듀얼소드의 사용자. 투박하기 그지없는 철검 두 자루로 검사 흉내를 내는 보잘것없은 놈이었다.

그런데 두 검을 들고 전투가 시작되자 모든 게 뒤바뀌었다.

전투 시작 전에는 빈틈 투성이였으나, 전투가 시작되자 앞길이 막막해졌다.

어디로 내지르며 공격을 해야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지금처럼 천장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해할 수 없다.

검이 빨라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쳐낼 수 있을만큼 느렸다.

느림의 묘리(妙理)?

그딴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땅히 쳐내야 했는데 쳐낼 수가 없었다.

주변 전장을 압도하는 기세.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

놈은 순간 하늘이 되었다.

“······ 아.”

와이저 후작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숨을 안 쉬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탓이다.

‘기사왕의 검술이 맞다.’

눈앞의 남자가 펼친 검은 기사왕의 그것과 맞닿아있었다.

인지를 초월하여 도저히 대적할 수 없게 만드는 그 기세 말이다.

저런걸 할 수 있는 인간은 기사왕 빌헬름뿐이었다.

한 없이 느린데도 막을 수 없고, 두 눈을 뜬채로도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마법과 같지만 기사왕은 그것을 자신의 검술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저 절대영역을 펼칠 수 있다면.

‘아아······.’

와이저 후작이 전율했다.

지고의 기사왕.

인류 최강,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었던.

죽은줄 알았던 그가 돌아왔다.

*

침소에 누워 초점을 잃은 두 눈을 뜬 채 누워있는 여인.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여인이 바로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였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로.

“이 상태에서 말에 묶인 채 돌아왔소. 성녀를 불렀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저주 탓에 성녀도 별수가 없다고 하더군.”

와이저 후작이 무겁게 말했다.

그 뒤에서 세렝게티를 바라보는 허드슨은 애써 흘러나오는 눈물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마왕의 저주.’

그녀는 지금, 마왕의 저주에 걸려있었다.

영원히 꿈속에 구속된 채 악몽을 꾸게 만드는 저주다.

마왕의 저주는 그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다. 성녀나 성황이 손을 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깨워야만 했다.

그래야 나의 최후를 들을 수 있으니까.

‘세렝게티······.’

최측근.

500의 기사들과 함께, 가장 나를 따랐던 기사.

그들의 죽음도 내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그냥 게임이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지금 세렝게티를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도저히 게임이라고 할 수 없는 이 현실감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 이제는 인정할 때였다.

‘게임이 아니다.’

이곳은 게임 속 세상이 아니다.

또 다른 현실이었다.

“세렝게티를 깨우고자 모든 수를 써봤소. 좋다는 영약도, 이름있는 치료사들도, 다 소용이 없었소.”

도시의 재정이 박살 난 이유 중 하나였다.

와이저 후작이 모든 수를 다 써봤지만, 세렝게티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 허나 이제는 나도 이 영지를 지켜야 하오. 앞으로 한 달 후면 세렝게티는 이곳에 없을 것이오. 사이엔 공작이 이 아이를 받아줄 것이니. 나로선, 방법이 없소.”

“······!”

허드슨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두 눈엔 경악이 들이찼다.

사이엔 공작은 이전부터 세렝게티를 탐내던 왕국의 최고위의 귀족.

와이저 후작이 씁쓸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도움이 못 돼서.”

“괜찮다.”

그러나 정말로 괜찮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화아아아!

별무리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흡수된다.

《‘별의 축복’을 부여합니다.》

《모든 성력을 소모합니다.》

《마왕의 저주를 풀기엔 성력이 부족합니다.》

《‘한계저주’가 일시해제되었습니다.》

천천히.

세렝게티의 두 눈에 초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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