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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벌써 끝났냐?”
골목 어귀. 담벼락이 무너진 어느 장소에서 해골 마스크를 쓴 학살이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러자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너부러진 남자가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었다.
“사, 살려줘. 우리 같은 플레이어잖아. 현실에서 PK는 반칙이잖아······!”
“반칙? 그걸 누가 정했어?”
“그, 그라시아님이 말씀하셨잖아. 현실에서의 PK는 지양하라고.”
“그라시아의 말이 곧 법이다?”
“그런 건 아니지만······!”
“쯧.”
학살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툭!
그러자 남자의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떨어졌다.
학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꽝이다.’
팬텀을 잡으려고 비밀경매장에 수많은 물건으로 ‘피싱’을 해놨다.
그런데 잡히는 건 이런 자잘한 송사리들뿐이었다.
현실에서 남자를 죽인 건 마침 이놈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해 ‘강림’한 덕에 위치가 특정됐다.
하지만 역시나 이놈도 팬텀은 아니었다.
팬텀이라면 고작 5분 변신한 거로 강림 상태가 풀리진 않을 테니까.
너무 약하기도 했고.
학살은 고민했다.
‘팬텀을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현실에서 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쌍둥이 탈리스만의 옵션을 숨겨놔도 안 사는 걸 보면 아예 비밀경매장을 이용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피싱’을 통해 잡히는 놈들도 다 변변찮았다.
학살은 턱을 쓸었다.
‘탑.’
메인 퀘스트 3의 내용이 떠올랐다.
탑을 오르는 것.
‘명색이 팬텀이 평범한 탑에 오르진 않겠지.’
기초의 탑 같은 정말 기초 자체인 그런 탑에 오르진 않을 것이다. 1등을 하기 위해선 더 고차원의 탑에 오를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자신이 오른 ‘태풍의 탑’이나 그라시아가 오른 ‘불멸자의 탑’같은.
‘문제라면 레벨링한다고 늦게 깰 수도 있다는건데······.’
그라시아는 불멸자의 탑을 오르고자 메인 퀘스트2만 깨둔 채 레벨을 7까지 올렸다.
무식하게 레벨링한 이유는 불멸자의 탑을 정복해 최고의 점수를 받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9레벨, 혹은 10레벨은 되어야 끝까지 오를 수 있는 그 탑을 고작 7레벨로 올랐던 일은 지금도 회자되는 기적같은 업적이다.
팬텀이 과연 그라시아가 세운 점수를 넘을 수 있을까?
‘불멸자의 탑보다 높은 단계의 탑들은 지금의 나도 힘들다.’
학살은 강하다. 10레벨이지만, 거의 1성급에 다다랐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불멸자의 탑을 완전히 정복하려면 쉽지 않다. 그 이상의 탑? 죽음을 각오하고 임해도 오를까 말까다.
하물며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됐을 팬텀이, 그런 탑들을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
하지만 팬텀의 행보를보면 모든걸 ‘빠르게’ 진행하는 중이다.
레벨링 한답시고 그라시아처럼 몇 달을 죽쑤진 않을 터.
‘······ 투신의 탑. 거기로 가겠군.’
그나마 레벨과 상관없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다.
투신의 탑.
싸움을 잘하고, 싸움에 미친 전사들을 위한 투기장.
하지만 게이머가 플레이어가 되며 생기는 괴리감은 넘을 수 없는 벽 수준이다. 아무리 게임을 잘했다고 플레이어가 되어서도 잘 싸우진 않는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팬텀이었다.
판게니아의 전설.
‘메인 퀘스트 1의 점수를 보면 플레이어가 되어서도 미친 듯이 잘 싸우는 건 분명하다.’
게이머가 플레이어가 되면 모두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얼마나 당황하지 않고 잘 살아남느냐, 잘 싸우느냐에 따라 점수가 분배되는데 거기서도 팬텀으로 추정되는 란돌프는 1위를 거머쥐었다.
전혀 당황하지 않았으며, 악착같이 살아남은 걸로도 모자라, 적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다녔다는 뜻이다.
‘나보다도 더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건데······.’
문득 학살은 자신이 플레이어가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메인 퀘스트 1, 생존.
그는 키메라 실험실에서 깨어났다.
수많은 실험자 중 한 명으로. 살짝 당황하긴 했으나 최대한 빠르게 상황에 적응한 뒤 박사와 간수들을 암살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163점이었건만.
란돌프가 받은 220점은 아직도 어떻게해야 받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어쨌든, 그런 무지막지한 놈이라면 충분히 투신의 탑으로 갈만하다.
‘투신의 탑에서 대기하면 되겠군.’
목적을 정한 학살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팬텀은 자신이 죽인다. 자신 외의 다른 누군가가 팬텀을 죽이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
“선장님. 주변 CCTV도 다 확인해봤는데, 아예 흔적이 없는데요?”
청담동 스테이크 하우스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연합의 단원이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자 선장이라고 불린 남자도 고개를 내저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당시 건물 내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모르는 모양이고.”
반경 1km 내의 cctv는 다 뒤진 것 같다. 당시 내부에 있었던 사람들도 만나봤지만 ‘치드 맘바’를 죽인 남자에 대해선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팬텀이나 운영자가 아니더라도, 치드 맘바를 예술적으로 제압한 인물이다. 그만한 싸움실력이면 연합에 들일 자격은 충분했다.
하지만,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허공에 증발해버린 느낌.
“정진우를 다시 만나러 가볼까요?”
“됐다. 정신 놔버린 것 같던데.”
정진우는 아직도 병원에 있었다. 양 팔이 잘린 쇼크로 미쳐버렸다. 다시 찾아가봤자 시간낭비라는 말이다.
청년 단원이 선장에게 재차 물었다.
“김하나는요?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CK 방송국으로 쳐들어가자고?”
“그건 아닙니다만······ 앞에서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요?”
“괜히 건들지 마라. 골치 아파진다.”
“······? 김하나가 뒷배경이라도 있습니까?”
“그라시아가 방한하는 건 알고 있냐?”
“예. 그걸로 한국의 플레이어들 전부 난리도 아니잖아요.”
“그 양반이 김하나랑 직접 1:1로 인터뷰 한댄다.”
“엥. 왜요?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대요?”
“몰라, 새끼야. 하여간 괜히 벌집 건들지 마라.”
그라시아.
명실상부 최강의 플레이어다.
모든 플레이어가 존경해 마지않는, 진정한 영웅!
그런 그가 갑자기 한국의 방문을 선언했다.
그리고 암암리에 김하나와 1:1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침공과 침식으로 인해 전세계가 난리가 난 상황이다. 자국을 돌봐도 모자란 판국에 갑자기 그라시아가 한국에 오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뭔가 큰 일이 엮여있다.’
김하나는 벌집이었다.
솔직히 궁금하긴 하지만, 그라시아가 함께 엮여있다면 최대한 멀어지는 게 맞다.
만에 하나라도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연합 자체가 뭉개질 테니까.
선장은 연합 내의 서열 4위다. 레벨 10에 이제 ‘별’만 찾으면 초월할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런 그도 그라시아를 상대로 3초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별을 먹어 초월한 검성(劍星).
몇 성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는 5성의 초월자였던 빌헬름과 맞수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그라시아랑 빌헬름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빌헬름은 죽었다. 그런 비교는 이제 무의미해.”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요? 어쨌든 둘 다 ‘8용사’인데.”
이것도 궁금하긴 하다.
빌헬름. 팬텀이 가장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키운 캐릭터.
별을 5개나 먹이고, 유일급 템으로 둘둘 말은 판게니아 역사상 다시 없을 전설. 신화.
반면에 그라시아는 어떤가?
플레이어로서 전설을 계속해서 써나가고 있다.
버그나 치트키를 사용하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한계가 없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가 한계를 보일 정도의 적이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별을 하나 더 먹었다지?’
이 또한 소문이지만, 사실이라면 더 강해졌다는 뜻이다.
얼마나 강해졌을까. 얼마나 강할까?
‘그래도 당장은 빌헬름이 더 강하겠지.’
선장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빌헬름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강자다.
무엇보다 선장은 빌헬름의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마계로의 대원정에 그 역시 참가했기 때문이다.
마족들을 썰어버릴 때의 그 압도적인 무(武).
무신이 있다면 그런 느낌이었을까.
그때의 전율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또한, 그라시아가 빌헬름과 만나는 걸 최대한 꺼려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빌헬름은 죽었다.
그리고 그라시아는 살아서 계속해서 강해지는 중이다.
‘그런데 그라시아가 왜 8용사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지 모르겠군. 그라시아는 대원정에 참여 자체를 안 했을 텐데······.’
*
정령의 탑에 들어서자, 같이 들어온 이자벨라와 허드슨이 사라졌다.
여기서부턴 개인전이다.
각자에게 걸맞은 정령의 문으로 인도된 것이다.
정령의 탑은 간절한 자에게만 답을 준다. 허드슨이 진정으로 바라고 갈망하는 게 있다면 탑을 오르며 이룰 것이다.
이자벨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탑의 입구. 거대한 돌문 위로 얼굴이 튀어나왔다.
돌문의 정령이자 관리자 중 한 명. 탑에 오르는 이에게 알맞은 문을 열어주는 측정사의 역할도 맡고 있었다.
-놀랍군. 모든 속성의 친화력을 지녔다니.
입이 움직였다. 내가 가진 재능들을 읽고 놀라움을 표하고 있었다. 하기야, 모든 속성의 친화력 역시 ‘재능’의 일부였다.
문은 가장 적합한 속성의 친화력을 측정해 관련된 문을 열어준다.
물의 속성을 지녔다면 물의 정령의 문을, 불의 속성을 지녔다면 불의 정령의 문을 열어주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모든 속성의 친화력을 지녔다면 어느 하나의 문을 열어주기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상반되는 속성마저도 함께 지니고 있구나. 허무의 속성이라······, 그러나 허무라 하기에도 너무 많다.
돌문의 정령은 고민했다.
본래 모든 존재는 상반되는 속성을 가질 수 없다.
불과 물이 공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만, 예외가 있다면 허무의 속성을 지닌 자다. 허무는 상반되는 속성을 함께 지닐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허무를 지녔다한들 너무 많았다.
그야말로 모든 속성의 친화력을 다 갖고 있으니.
‘허무의 문’조차도 여기에는 맞지 않다.
-모든 게 뒤섞이면 그것이야말로 혼돈이겠지. 하지만 혼돈의 문은 열린 적이 없는데······.
돌문의 정령은 인상을 찌푸렸다.
혼돈의 문은 정령의 탑이 세워지고 열린 적이 없는 문이다.
“열어라.”
또 다른 신비라.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지체없이 선택하자, 돌문의 정령도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 건방진 드루이드로군. 오냐, 열어주마. 너에겐 자격이 있는 것 같으니.
끼이이이익!
돌문의 정령이 몸을 열었다.
-다만, 조심해라. 혼돈에 잡아먹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충고를 듣고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그 속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갔다.
*
혼돈의 탑.
정신을 어그러트리는 저주가 만연한 곳.
깜깜한 칠흑 그 자체였으나.
《‘철혈군주의 심장’이 정신을 지탱합니다.》
《‘거인의 항마력’이 저주를 상쇄합니다.》
《‘돌연변이’로 인해 혼돈의 길이 밝혀집니다.》
내게는 보인다.
혼돈의 탑이 숨겨놓은 길이.
돌문의 정령도 내가 13개의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몰랐을 것이다.
히든 특성들로 말미암아 혼돈의 영역조차도 멀쩡하게 걸어다닐 수 있었다.
-혼돈이 통하지 않아?
-저 인간 뭐야. 아니, 드루이드인가?
-나랑 계약하자!
순식간에 혼돈의 정령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녀석들을 지나쳐갔다.
탑을 오르자 더 큰 혼돈의 정령들이 모습을 보였다.
-건방진 놈. 감히 이곳을 올라?
-너도 혼돈으로 만들어주마.
아래층의 정령들에 비해, 훨씬 더 공격적이었다.
갑자기 거인처럼 변하더니 나를 찍어눌렀다.
하지만 저것들은 허상이다. 겁 먹은 자들의 정신을 짓누르는 정신체일 따름이다.
휘이익!
당당하게 손을 대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과거의 영광을 찾으러 왔나. 그게 가능할까?
한층을 더 올라가자, 그곳에 빌헬름이 있었다.
스릉.
나는 미켈라의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빌헬름의 모습을 한 혼돈의 정령과 맞섰다.
창! 촤앙! 치이익!
놈은 나와 똑같았다. 똑같이 베고, 지르며, 찔러왔다.
허나, 물러서지 않았다. 진짜 빌헬름이었다면 일격에 즉살당했겠지만 놈은 빌헬름의 모습을 한 ‘나’였다. 똑같은 힘과 기술을 지니고 똑같이 행동하는.
그렇게 몇시간을 싸웠을까.
시간의 단위를 훌쩍 넘겨 하루는 족히 지난 것 같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틀, 삼일, 십일.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징그러운 놈!
휘이익!
혼돈의 정령이 다시 연기를 내뿜고 사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계단을 올랐다.
-여기까지 오다니, 자격은 만족했다.
-계약을 하자.
-너는 자격이 있다.
그곳엔 이전의 혼돈보다 훨씬 더 커다란 놈들이 있었다.
계단도 없었다.
여기가 최상층인 걸까?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도 없군.”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혼돈의 정령들은 확실히 강력하다. 내가 본 어떠한 정령보다도 더.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작 이 정도 올랐다고 계약을 구걸하는 놈들에게 무슨 격이 있겠는가.
-나와 계약하면 별을 얻은 것과도 같은 효과를 지니게 될 거다.
-나와 계약하자. 세계에서 ‘유일’한 장비의 위치를 알려주마.
-스킬은 어떠하냐? 혼돈 계열의 최상위 스킬을 선물해주지.
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이것저것 조건까지 붙이는 걸 보면.
유일급 아이템에 혼돈 계열 최상위 스킬은 조금 끌리긴 하지만, 뭘 믿고 혼돈과 계약을 한단 말인가.
거인인 척을 하고, 나인 척을 하며 거짓을 늘어놓은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저 계약의 내용 역시 거짓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
다수의 정령과는 계약할 수 없으니까.
-어딜 가는 거냐?
-내려가봤자 아무 것도 없다.
-멍청한 선택을 하는군.
-어차피 다시 올라오게 될 거다.
혼돈의 만류를 뒤로하고 나는 탑을 내려갔다.
한층을 내려갈 때마다 더 극심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올라갈 것을 종용하듯.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다.
그렇게 기나긴 시련이, 싸움이 시작됐다.
*
두 명의 ‘나’를 상대한다.
또 내려가면 이번엔 네 명의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은 여덟, 열 여섯.
이상하게 몸이 지치지는 않았으나 시간에 의해 정신은 마모되고 있었다.
제아무리 철혈군주의 심장이 있더라도 무한하게 정신력을 지켜주진 않는다. 초인과도 같은 정신도 시간 앞에선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냥 올라가서 아무런 혼돈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까하는 고민이 안 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억지 계약을 맺을 수는 없었다.
계약의 선택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어야만 했다. 강요에 의해, 강제에 의에 굴복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기에.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간다.
10일.
20일.
30일······.
더는 시간을 세는 게 무색해질만큼, 나는 혼돈과 싸웠다.
-빌어먹도록 징그러운 놈이로군!
-나가라! 나가!
혼돈의 정령들이 마침내 백기를 흔들었다.
나가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들뜬 마음에 바깥으로 달려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주변을 경계해야하는 법이었기에.
스컥-!
역시나 바로 뒤에서 혼돈이 덮쳐오고 있었다.
‘음습한 놈들.’
끝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이다.
그림자와 같은 혼돈을 베어내자, 그 사이로 환한 빛이 보였다.
정령이다.
설마 빛의 정령인가?
빛의 정령 역시 최상위 급으로 분류되는 희귀한 정령이었다.
그런데 빛의 정령이 왜 혼돈의 영역에 있지?
‘저건 빛의 정령이 아니다.’
하지만 빛의 정령이라 하기엔 미묘하게 다르다.
나는 혼돈을 걷어내고 탈출할 수 있는 입구가 아닌, 빛을 향해 걸어나갔다.
-거긴 입구가 아니다.
-다시 돌아갈 생각이냐?
-미련한 놈. 그래, 죽을 때까지 싸워봐라!
혼돈의 정령들이 말려세웠다.
여태까지 조롱하며 놀리던 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니까 더 가보고 싶어진다.
입구의 문은 작아지고 있었다.
지금 탈출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빛은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혼돈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것.
-그만! 멈춰라!
-더 가면 돌이킬 수 없다.
-영영 혼돈에 머물고 싶느냐?
귀가 아플 정도로 혼돈은 말이 많았다.
혼돈을 계속해서 걷어내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닿은 순간.
《탑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메인 퀘스트 3이 완료되었습니다.》
《내용을 정산중입니다.》
······ 이게 진짜 정상이었다.
오르고, 내리며, 혼돈이 만들어낸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게 정답이었던 게다.
《백성전의 몇몇 성좌가 흥미를 보입니다.》
《‘정령탑의 주인들’이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순간 수많은 존재가 갑자기 흥미를 보이며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콧대 높은 성좌와 탑의 주인들마저도.
그중 정령탑의 주인이라면 정령왕을 말하는 것일 터.
내가 혼돈의 탑을 정상까지 올랐기 때문일까?
글쎄.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도 갔다.
지금 내 앞에서 계속 빛을 내고 있는 이것.
《‘천상의 정령’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