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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도시 아르카나
카페에 혼자 앉은 김서연의 얼굴이 짜증으로 붉게 물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처음부터 그랬다.
같이 마주하고 앉았지만 영혼이 다른데에 가 있는 느낌.
온전하게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박현명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느낌이었다.
‘머리도 잘랐는데.’
머리도 장발에서 단발로 잘랐다. 어울리는 옷을 찾으려고 두 시간을 고민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도 전혀 하지 않았다.
파격적인 대변신. 못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흥미가 없어보이네?
-이제 일어나도 되냐?
게다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일어나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나가고자 자리를 박찼다.
예전의 박현명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헤어진 적이 없던 것도 아니잖아?’
5년간 연애하며 헤어진 횟수가 다섯 번은 넘는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항상 자신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먼 거리를 달려 직접 보러 왔음에도 냉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앞에 두고 그럴 수가 있지?’
그래. 앞에 것들은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헤어질 때 심한 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자신을 앞에 둔 채 누구보다 강하게 부정했다.
전혀. 전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번호를 적어주고, 명함을 받아갔다. 데이트 약속마저 잡았다. 보란 듯이, 자신의 앞에서.
“박현명 주제에······.”
차라리 김하나가 못생겼다면 전혀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콧방구나 뀌며 둘이 잘해보라고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하나는 유튜브에서 ‘의신’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의신. 의로운 여신이란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만한 여자가 박현명을 뭐가 아쉬워서 만나겠는가.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질 사이가 확실했다.
무엇하나 잘난 게 없는 박현명.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생기거나 키가 큰 것도 아니다.
몸이 좋기를 하나, 유머가 넘쳐서 재밌기를 하나?
일 할 때와 데이트 할 때를 제외하면 항상 집에서 게임만 하는 히키코모리를 누가 좋다고 만나겠나. 자신이나 되니까 만나준 거지.
드르르르!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진우 오빠’라고 저장된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름을 보며 김서연이 미소를 지었다.
박현명과는 180도 대비되는 남자. 그야말로 모든 게 정반대였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크게 사업을 하는 덕분에 돈도 많고, 잘생긴데다 키도 크다. 몸도 좋고 유머도 넘치고 활동적이라 뭐 하나 흠잡을 게 없었다.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여보세요? 진우오빠? 뭐? 용서해달라고? 또 나한테 숨기는 비밀 없어?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숨겼는데 내가 오빠를 어떻게 믿어? 완전 다른 사람 같아서 나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이제 안 그런다고? 흐음, 알겠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끝이야, 끝. 그러니까 나 데리러 와. 여기 주소가······.”
*
“요, 우리 방송국 최고존엄 김원. 또 사고쳤다며?”
“··· 김하나입니다. 제발 김원이라 부르지 마세요.”
한숨을 푹 쉰 김하나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한 번 갔으면 됐지 추가로 물어볼 게 있다며 다음날 출근시간에 한 번 더 호출한 것이다.
김하나의 옆자리에 앉은 서정아가 의자를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이번에는 누군데?”
“성형외과 병원원장이요.”
“미인들 많이 볼텐데 왜 그런 짓을 했대?”
“모르죠, 저는.”
“하기야. 우리 의신 김원이 자연미인이기는 해.”
“말 걸지 마요. 죽을 거 같으니까.”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정규직으로 채용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것도 잠시.
‘그 사건’이 있은 이후 방송국의 일은 열 배로 늘었다.
“부장이 출장가면서 너한테 이거 맡기던데?”
“뭐요? 아······.”
파일첩을 받은 김하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라시아’ 이사람 미국인 아니었어요? 이걸 왜 저한테?”
그라시아라 불리는 인물에 관한 정보가 담긴 파일첩이었다.
등장하자마자 산을 가르며 괴물 열 마리를 동시에 날려버린 슈퍼- 히어로라던가.
영상을 보면 가관이긴 하다. 진짜 영화가 아닌가 싶을만큼. 수천, 수만 개의 검의 형상을 한 섬광을 하나로 합쳐 쏘아내는 장면이 특히 압권이었다.
총과 폭탄으로도 잡지 못한 괴물을 일격에.
그런 사람이 갑자기 왜 한국에?
“그 사람이 널 만나보고싶다고 했대.”
“절요? 왜요?”
“한눈에 반했나보지.”
“장난치지 말고요.”
“몰라. 하여간 그거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미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 웬만한 국빈급 의전 이상일 거 같다던데?”
“······ 별로 안 하고 싶은데요.”
이런 거물의 인터뷰를 이제 막 정규채용된 자신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다른 디맨션 워리어들도 그라시아는 존중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끝판왕이 갑자기 방한을 해서 자신을 보겠다니.
“그럼 그 사람은 어때? 네 남자친구.”
서정아가 턱을 끌어 김하나의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남자의 등이 있었다.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를 한 전사. 순식간에 괴물을 제압하고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을 김하나가 직접 찍은 것이다.
김하나가 입을 쭉 내민 채 서정아에게 핀잔했다.
“남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부적 같은 거지.”
그 일이 있은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김하나에게 저 남자는 정말 행운의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름도, 사는 곳도, 아무 것도 모르고 남은 건 저 사진 한 장 뿐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런 것치곤 매일 물고 빨고 장난 아니던데?”
“아니, 먼지가 쌓여서 닦은 걸 그렇게 표현해요?”
서정아가 피식 웃었다.
김하나는 타격감이 있는 후배였다.
“저녁에 연예부 기자들이랑 술한잔 하기로 했는데, 콜?”
“약속있어요.”
“남자?”
“예.”
“아이고. 오늘 남기자들 술이 달겠네, 달겠어.”
서정아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그간 무수히 많은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던 천하의 김하나가 갑자기 남자와 저녁약속을?
그러거나 말거나 김하나는 일에 집중했다.
일에 치여 죽기 싫으면, 정신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치워놔야만 했다.
*
“배신자를 죽여라!”
“간악한 뱀공주를 죽여!”
눈을 뜨자, 피칠갑을 한 이자벨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널린 시체들. 모두 파이살메르의 병사들이다.
전투는 아직 한창이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워프는 활성화 되어있었다.
넘어가려면 진즉에 넘어갈 수 있었음에도 이자벨라가 나와의 신뢰를 지킨 것이다.
‘여왕의 친위대들.’
대전사들이 포함된 추적대다.
조금만 늦었으면 황천길로 갈뻔했다.
“‘별과의 소통’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여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기야 여왕이 직접 나섰다면 이자벨라도 길게 버티지는 못했을 테니.
천운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운에 의지할 순 없는 노릇.
“내가 길을 뚫겠다.”
워프로 향하는 길목을 수십의 전사들이 막고 있었다.
이자벨라 역시 지칠대로 지친 상태.
【Lv.6】
대전사들의 레벨은 무려 6에 육박했다.
이자벨라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그들을 죽이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이미 반나절가량을 이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기약없이 버텨내는 일을 그녀는 해낸 것이다.
길까지 뚫어달라고 하기엔 염치가 없으리라.
‘별 할퀴기.’
별의 계승자가 되며 얻은 주력 스킬.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 스킬이 마침내 발동했다.
<<모든 ‘성력’을 태웁니다.>>
<<지속시간 41초>>
무수히 많은 별빛이 내 주먹에 스며들었다. 이후 마치 별빛으로 만든 클로를 착용한 것처럼 뾰족한 칼의 날이 주먹 위에 돋아났다.
한순간 울버린이 된 기분이다.
별 할퀴기는 그 이름처럼 별조차도 할퀴어낼 수 있는 광역 스킬이었다. 물론 이대로 사용해도 되기는 하지만 그러기엔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간악한 배신자와 불신한 이단자를 죽여라!”
“위대하신 여왕폐하의 뜻이다!”
간악한 배신자는 이자벨라고, 불신한 이단자는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워프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전사들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꽈아아아아아아앙!
후아아아아!
고막이 아플 정도의 폭발이 일더니, 불기둥이 세워졌다. 허나 그 불기둥은 진짜 불이 아니라 별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별빛 내의 대전사들은 모조리 증발한 상태.
“······.”
“가지.”
할 말을 잃고 별기둥을 바라보던 이자벨라에게 말했다.
바로 쏘아내면 41초간 지속되는 별의 기둥이다.
‘별 할퀴기’는 모든 성력을 한꺼번에 태워 지속시간 동안 너른 영역에 침입을 막아내고 멸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영역이다.
‘상상 이상이군.’
솔직히 놀랐다.
단발성이긴 하지만 이제 레벨 1인 스킬이 이만한 효과라.
10을 찍고 스킬이 진화를 이루면 얼마나 더 대단해질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따라와라. 축복을 받은 자는 이 ‘별의 기둥’을 넘을 수 있다.”
내가 먼저 넘어가자, 이자벨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별의 기둥을 넘었다.
하지만 다른 전사들은 별의 기둥을 넘지 못한채 뼈째로 증발해버렸다.
열이 넘는 전사들이 죽고서야 그들은 마침내 추격을 포기했다.
이제 남은 건 워프를 넘는 일뿐.
활성화 된 워프를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눈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자벨라.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면 말리진 않으마.”
오랫동안 꿈꿔온 자유.
워프를 넘어 다른 대륙으로 향하길 그녀는 항상 기도하고 기원했다.
허나 막상 평생을 지낸 사막을 벗어나려하자 오만 감정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 아닙니다.”
“그렇다면, 해방의 순간이다. 기뻐하도록.”
“예.”
이자벨라는 자유를 택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워프’가 활성화됐습니다.》
《‘스타팅 포인트’의 워프는 무료입니다.》
《‘이자벨라’의 ‘한계저주’가 ‘별의 축복’으로 무효화된 상태입니다.》
《‘칼츠만 사막’에서 워프 가능한 연결도시는 12곳입니다.》
《‘아르카나’를 선택했습니다.》
《워프를 시작합니다.》
*
《‘칼츠만 사막’을 벗어나 ‘중앙대륙’으로 워프되었습니다.》
《황금의 도시 ‘아르카나’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Tip : ‘아르카나’는 극에 달한 물질만능주의의 도시입니다. 대부호 수준의 골드가 없다면 발도 들이지 않기를 권합니다.》
워프를 넘어서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황금빛 터번을 쓰고, 황금으로 이루어진 마차를 탄 채 이동중인 사람들이 보인다.
칼츠만 사막과 이어진 다음 워프장소는 대도시 아르카나였다.
‘스타팅 포인트와 이어진 대도시 중 하나지.’
스타팅 포인트는 모두 여러 도시와 이어져있다.
이곳 아르카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여왕은 절대로 따라오지 못할 장소이기도 하고.’
여왕의 추적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여왕이 직접 이자벨라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아르카나는 사막도시 파이살메르와도 무척이나 사이가 나쁜 동네였다.
여왕과 친위대가 들어섰다간 그대로 전쟁이 발발할만큼.
그런데도 워프가 이어져있다는 게 아이러니할 따름이었다.
“도시가······ 굉장히 화려하군요.”
이자벨라가 넋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게 솟은 건물과 주변 양식에 압도된 모습이다.
사막 외의 도시는 처음 가볼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르카나는 골드면 전부 되는 곳이다.”
“골드라면 챙겨온 게 있습니다.”
이자벨라가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얼추 무게로 보건대 300골드 정도.
중앙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에 긁어모은 골드였다.
“300골드면 하룻밤 먹고 자면 끝나겠군.”
물론 이것도 초보자에겐 상당한 돈이지만, 이곳 아르카나에선 입에 풀칠조차 못할 금액이었다.
이자벨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300골드면 노예 열 명은 살 수 있습니다만······.”
그거야 칼츠만 사막이 스타팅 포인트니까.
애당초 사막은 물물교환이 주를 이룬다. 골드로 살 수 있는 노예는 사냥용 노예밖에 없다.
“저길 봐라.”
손을 뻗어 빵집 앞에 있는 간판을 가리켰다.
“빵······ 하나가 50골드?”
“왕에게 진상되는 최고급 밀로 만들기 때문이지. 그러니 50골드도 싼 거라고 저렇게 홍보하고 있는 게다.”
“제 단검을 팔면 됩니다.”
호박이 박힌 단검. 그야 팔면 수만 골드는 받을 것이다.
자신의 애검까지 팔겠다는 태도는 훌륭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없다. 300골드로 불리면 되니까.”
“··· 불린다니요? 이 돈으로 장사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도박장.”
“······ 예?”
꿈뻑꿈뻑. 이자벨라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는 재차 말했다.
“도박장으로 간다.”
“그, 그게 무슨······?”
이자벨라가 경악하며 쳐다봤다.
돈을 불리는 방법이 도박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무엇보다 독실함의 대명사인 성각자가 도박을?
딱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황금의 은총】.
히든 특성 13개 중 하나!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
걱정돼 죽겠다는 눈빛으로 이자벨라가 내게 시선을 던졌다.